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54화 (854/956)

추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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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김에 쉬다 가면 좋을 텐데.”

“안 돼요. 모레 시합이라서 지금 가야 돼요.”

체력이 좋아졌다 해도 컨디션 조절은 필수다. 장시간 비행은 컨디션에 악영향을 줄 수 있으니, 그럼에도 명수의 외박(?)을 허락한 구단이 대단하다.

“내가 대단한 거지. 이 정도 쯤은 거뜬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니까 구단에서도 날 믿어주는 거지.”

“알았어. 그래서, 어떡할 거야?”

주어 없는 물음에도 명수는 이해한 듯 미간을 좁히며 고심에 빠지는 모습이었다.

“데려갈게.”

“괜찮겠어?”

“상미도 패티 많이 보고 싶어 하니까.”

“그래? 알았어. 검역증명서 같은 거 준비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까, 나중에 내가 데리고 갈게.”

“그래, 알았어. 부탁할게.”

명수는 단유를 한 번 바라본 후, 하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시즌 끝나면 다시 올게요.”

“그래. 몸조심하고.”

“네.”

“상미한테도 안부 전해줘.”

“그냥 전화하시면 되죠.”

“전화는 매일 하거든?”

“정말요?”

“너야 바쁘니까 그렇다 쳐도 상미랑은 매일 통화하니까.”

“걔는 왜 그런 말을 안 한대?”

“그게 뭐 별거라고. 비행기 시간 늦겠다.”

“예. 아무튼 선생님도 건강하세요. 다음에 올 때는 선물 잔뜩 사가지고 올게요.”

“선물 안 사와도 돼.”

“백 하나 사 올까요?”

“괜찮은 거로다.”

“하하, 네.”

그렇게 명수는 손을 흔들고 떠났다. 기력을 잃고 깊은 잠에 든 호빵을 안고 있는 사진을 핸드폰에 간직한 채.

집에 함께 돌아온 하은은 거실로 들어서니, 어쩐지 기운 빠진 눈으로 바라보는 패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얘도 알겠지?”

“동물이라도 인지 능력은 있으니까, 알지 않을까요?”

“외롭겠다.”

“그래서 명수가 데려간다고 한 거죠.”

하은은 쪼그리고 앉아 패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라면 신나게 달려와 밥 달라고 졸랐을 녀석이 젖은 눈으로 하은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처량해 보였다.

“그동안 호빵 괴롭히는 맛으로 살던 녀석이 이제 호빵 없으니까 무슨 낙으로 사려나?”

흉보는 말과 달리, 패티가 가여워 안타깝다는 목소리다. 아니, 어쩌면 떠난 호빵의 빈자리를 안타까워하는 것이리라. 작은 털뭉치 같던 녀석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모양이라, 하은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패티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

“요즘 B반 아이들 분위기가 전과 달라진 거 같아요.”

“네? 뭐가요?”

카페테리아에 신인개발팀장과 함께 들러 휴식시간을 가지고 있던 매니저는 우연히 마주친 댄스 트레이너로부터 제보를 받았다. 처음에는 설마 애들이 벌써 빠져서는(?) 게으름을 피운다는 소린가, 의심을 했다.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그냥 애들이 열심히, 라고 해야 하나?”

“아, 난 또. 그럼 좋은 거잖아요?”

“나쁘진 않죠. 말 잘 듣고 하라는 거 잘 따라하면 가르치는 입장에서야. 그런데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냥 아이들이 뭐랄까? 진지해졌다고 해야 할까요?”

“예?”

“정확히 표현할 말이 없긴 한데, 그냥 딱딱한 느낌? 그냥 느낌일 뿐이고, 대놓고 문제가 있어 보이지도 않으니 뭐라고 묻지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실장님은 아시는 게 있나 싶어서 물어봤던 건데.”

“하아. 제가 요즘 일이 갑자기 많아져서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고 애들을 좀 방치했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실장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어쩌면 그냥 애들이 열심히 하려고 수업에 집중하니까,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처음 댄스 트레이닝을 했을 때는 안무 기본기가 없던 연습생들이 많이 힘들어했단다. 그래도 서로 위로해주는 분위기, 같은 게 보였는데 요즘은 그런 분위기가 없고, 대신 악을 쓰고 끝까지 수업을 따라오려는 각자의 모습이 더 눈에 부각 된다는, 트레이너의 부연설명이었다.

사실 트레이너 개인의 입장에서는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다독이는 분위기보다는 선생님에게 집중하며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고, 그래서 지금의 연습실 분위기가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냥 단지, 갑자기 애들이 달라진 게 혹시 매니저님께서 한 말씀을 하신 건 아닌가 싶어서였어요.”

“글쎄요.”

다른 의미로는 애들이 철이 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지난 월평 때의 일을 계기로 좀 더 진지하게 수업에 임하기로 마음 먹었거나. 들어보니 썩 나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매니저는 아이들의 상황을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현상이면 칭찬해주지만, 나쁜 일이 있었던 거라면 즉시 조율해야 한다. 사실 너무 좋아도 문제고, 너무 나빠도 문제다. 언제나 중간 정도의 텐션을 유지하게끔, 그렇게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 그게 매니저의 업무다.

매니저가 연습실이 있는 2층으로 갔을 때, 마침 복도에 나와 있는 애들도 있었는데, 매니저와 마주치자 곧바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왔다. B반의 막내인 16살의 시화와 18살 경빈. 나이가 어려서인지 같은 B반의 언니들이 힘들어 죽는 얼굴을 해도 동네 놀이터에 온 꼬마들처럼 기운이 넘치는 녀석들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채린은 17살, 저들과 비슷한 또랜데, 녀석만 세상 다 산 녀석처럼 늘 무표정이라 가끔 채린의 나이를 잊곤 했다.

‘아니지, 아니지.’

생각이 튀는 걸 막으며 매니저는 입을 열었다.

“이제 온 거야?”

학교 수업을 마치자마자 바로 왔는지, 아직 교복을 입고 있었다.

“금방 옷 갈아입겠습니다!”

“그래. 아, 잠시만.”

탈의실로 향하려던 두 사람을 불러세웠다.

“요즘 어때?”

“네?”

“수업은 받을만하니?”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힘들진 않고?”

“아, 네. 뭐, 조금 힘들긴 해도 다들 배우는 거잖아요.”

아이들의 대답은 그저 평이할 뿐인데, 사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매니저의 속내를 먼저 읽거나 헤아려 대답할 리 없으니 원하는 답을 듣기란 쉽지 않다. 차라리 직설적으로 물어야 옳겠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물어본들 제대로 대답이나 하려나?

“다른 애들이랑 잘 지내고?”

“네? 네.”

“···그래, 얼른 가서 옷 갈아입고 나와.”

매니저는 둘을 보낸 후, 연습실로 향했다.

안에 들어서니, 보다 일찍 와 있던 언니 라인의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매니저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지각한 사람 없지?”

“네.”

아이들은 나타난 매니저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몰라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아직까지는 매니저를 보면서 긴장할 때다. 나중에 3년, 4년 장기 연습생이 되거나, 데뷔 이후 밤낮없이 같이 붙어 지내다 보면 긴장도 풀리고, 허물없이 지내는 경우도 생기겠지만, 아직은 무리라 하겠다.

“잘하고 있는지 보러 온 거니까, 너무 긴장하지들 말고 쉬어.”

쉬란다고 그대로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는 이는 없었다. 괜찮다고 몇 번 더 손을 내저은 뒤에야 주춤거리며 자리에 앉는 연습생들.

이렇게 얼굴만 봐서야 이들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기 어렵다. 차라리 애들이 한참 연습 중일 때 몰래 와서 지켜봐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하며 매니저는 주변을 살폈다. 청소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내부 시설은 잘 관리하고 있는지 눈으로 대충 훑어보면 과연 남자 아이들이 속한 A반보다는 깔끔하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잠시 살피고 있을 때,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시화와 경빈이 연습실로 들어와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는 미리 와 있던 아이들 틈으로 기어 들어가듯이 가 앉는다. 그리고는 마치 이제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듯이 매니저를 바라본다.

‘뭐라도 발표해야 할 분위기네.’

사실 그냥 애들 분위기나 살피자고 내려온 것만도 아니어서 이참에 공지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모인 김에 이야기할게.”

숨소리마저 크게 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라, 매니저는 얼른 다음 말을 이었다.

“이번 달에는 월평이 없다.”

기뻐할 줄 알았지만, 딱히 그런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럼 뭐가 또 있을까 걱정하는 눈빛이다. 매니저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리라. 그에 응해 매니저는 말을 이었다.

“대신 다음 달에는 중순에, 그러니까 14일, 토요일이지? 그때 월평을 보기로 결정되었다.”

역시 그럼 그렇지, 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 그러나 매니저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월평 결과 우수한 성적을 받은 연습생에 한해···.”

다시금 매니저의 입으로 모이는 시선들.

“시은의 뮤직비디오에 출현할 수 있게 된다.”

“시은 언니 컴백해요?”

“정말요?”

“대박.”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지는 연습실. 예상했던 반응이고, 기대했던 반응이라 매니저는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대신 미간을 억지로 좁히며 큰 소리로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런 이유로 다음 주부터 레슨 시간이 연장된다.”

“아.”

짧은 탄식이 쏟아지지만, 그보다는 출현에 대한 기대로 반짝이는 눈빛들이었다.

“알겠지만, 시은의 이번 곡은 우리 회사에서 내는 첫 번째 곡이니만큼 굉장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

작곡팀이 만든 곡을 시은이 컨펌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고, 지금도 안무팀에서 새 노래에 맞는 안무를 창작하려 애쓰고 있다는 건 굳이 연습생들에게 이야기할 소재는 아니었기에 말을 아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너희들 실력, 아직 많이 부족해. 하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위에서는 보고 있다. 그건 지난번 채린이가 증명해주었기에 생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언급된 채린이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곁에 앉아 있던 시율이 채린의 어깨를 안아주자 슬며시 고개를 기대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매니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직 몇 명이 출현하게 될지는 결정되지 않았어. 다시 말하면 이번 월평 결과에 따라 한 명 이상, 혹은 여기 있는 전부가 다 출현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나올 수 있는 건 아니다. 능력이 안 되는데 억지로 출현시켰다간 제대로 된 그림이 안 나올 수도 있잖아? 그런 위험은 회사 입장에서는 질 수가 없으니까, 철저히 실력 위주로 뽑을 거다. 그렇다고 너희들에게 전문 안무가 수준의 무대를 바라는 건 아니다. 충분히 노력하고 성장한 모습을 보인다면 얼마든지 뮤직비디오에 나와도 될 거라고 본다, 는게 윗분들의 입장이야.”

설령 단 한 컷만 나오는 거라도, 무려 시은의 뮤직비디오니 탐을 내지 않을 연습생은 없었다.

“요즘 너희들이 굉장히 열심히 한다는 이야기를 트레이너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어. 많은 분들이 기대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앞으로 더 열심히 해주길 바라고, 내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여기 있는 모두가 함께 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매니저는 입을 닫았다. 들떠있는 아이, 온갖 근심을 껴안은 아이, 자신 없어 하는 아이와 반드시 해내겠다고 욕심내는 아이의 표정들을 두루 살피며 매니저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

딱히 어떤 파벌 같은 게 생기거나, 왕따가 생긴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트레이너의 말처럼 정말 순수하게 지금의 일에 진지해진 것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지금 이렇게 동기부여까지 했으니 앞으로 더 발전된 모습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수고들 해.”

“네!”

매니저는 밝은 목소리로 화답하는 아이들에게서 등을 돌려 연습실을 나갔다.

****

같은 시간, 단유는 대훈의 사무실에서 대훈과 마주 앉아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뭐 절대 강요는 아니고요.”

강요는 아니라지만 저렇게 애달픈 눈으로 바라보면서 부탁을 하면, 어쩐지 단유는 거절을 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어렵습니다.”

“그런가요?”

“이미 흑역사로 한 차례 곤욕을 치렀더니 더는 그런 과거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네요.”

“아, 아쉽네요. 이거.”

대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래도 기왕이면 비주얼 괜찮은 사람이 나와주면 좋은데.”

“돈 없어요?”

“네?”

“왜 굳이 뮤비 출현까지 돈을 아끼려는 것처럼 보일까, 해서요. 그냥 전문 배우 섭외해서 만들면 되잖아요?”

“그보다는 좀 더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어서죠.”

“그 의미란 게 저로서는 와 닿지가 않네요. 작곡과 안무까지 가능한 회사, 라는 걸 어필하고 싶다는 건 이해했어요. 하지만 굳이 뮤직비디오까지 내부 사람들을 쓰겠다는 건 무리 아닌가요?”

그 질문에 대훈이 답하길, 예전에 어떤 가수가 회사 소속 아티스트들을 총동원하여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냈던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영감을 받았단다. 보는 사람이나 만든 사람이나, 모두 의미있는 작품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전 그런 아티스트가 아니잖습니까?”

연습생들을 출현시키는 것까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단유는 왜 나오길 바라는 것일까?

“그리고 시은 씨도 제가 나온다고 하면 이해를 못 할 거 같은데요.”

“아, 그건 아닙니다.”

“네?”

“시은 씨는 단유 씨가 출현하는 것에 대해 반기는 입장이었거든요.”

“···네?”

단유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재차 확인했고, 대훈 역시 재차 고개를 끄덕여 확인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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