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53화 (853/956)

꿈의 무게(7)

-------------- 853/952 --------------

―다음 소식입니다. 지난 5년간 의붓딸을 성폭행한 계부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습니다. 40대인 A 씨는 사실혼 관계의 아내가 집을 비울 때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 택시 운전사가 시원하게 욕을 내뱉었다.

“이런 쓰레기가 겨우 10년이야? 이게 나라야?”

쓰레기 같은 범죄자에 대한 욕은 판사에 대한 욕으로 이어지고, 한국 사법체계에 대한 전방위적 비판과 이런 시스템을 두고만 보는 정치계에 대한 비판과 무능력한 대통령이라는 작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다, 결국 이 사회에 더 이상 욕먹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그렇지 않아요?”

이럴 때가 난감하다. 어떤 토의과정도 없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 무조건 동의하라는 듯한 눈빛으로 강요하면 말이다. 물론 지금 택시 운전사의 시선은 전방을 향하고 있지만, 뒷좌석에서 룸미러로 훔쳐보면 울긋불긋한 광대 위로 불만이 한가득 이라, 지금이라도 당장 택시를 몰고 국회 의사당으로 쳐들어가 누구 하나 잡을 기세로 노려보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에 동의를 해야 할지 명확히 가늠하기가 힘들다. 계부가 흉악한 범죄자라는 사실에 동의하란 말인지, 그런 범죄자에게 비교적 가벼운 징계를 내린 사법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란 말인지.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회가 태업이라 비판받아 마땅한지, 나랏일은 모두 대통령 책임, 이라는 주장에 동의를 하란 건지.

잠시 택시 안에 침묵이 감돈다. 이대로 대답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때려잡아야 할 반민족 반국가 반사회적 인사 목록에 평일 오후 택시에 탄 승객 두 명이 오를까 걱정이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앞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눈치를 보기 때문인지, 결국 마음 약한 명수가 큰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네요.”

나쁘지 않은 대답이다. 정확히 무엇이 그렇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애초에 애매한 질문이었으니 애매한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또 뜻이 통하는 것일까? 택시 운전사는 한층 목소리를 높여 드센 비평의 칼날을 휘둘렀다. 이 시대에 가장 격한 비평가는 택시 운전사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이 택시를 운전하는 저 남성에 국한되거나.

“나라가 이 꼴이니까 사람들이 점점 희망을 잃는 것이야. 요새는 아무도 꿈을 안 꿔. 살기 바쁘거든. 그런데 살면 뭐해? 잘 사는 놈은 계속 잘 살고, 못 사는 놈은 계속 못 살고, 당하는 놈은 계속 당하는데. 그렇죠?”

“그렇네요, 예.”

오랜만에 귀국한 명수는 도움이라도 요청하고픈지 옆자리를 힐끔 바라보지만,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던 단유는 요지부동,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듯 그저 바깥만 바라볼 뿐이었다.

“미안하다. 마침 차가 고장이 나서.”

“넌 그 비싼 차를 사놓고 왜 안 타고 다녀?”

탈 일이 없으니 안 타고 다닌 것뿐인데, 그게 설마 방전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보험사 긴급 출동 서비스를 부르고 기다렸겠지만, 갑자기 귀국하는 명수를 그대로 공항에 세워둘 순 없어 택시를 이용한 것뿐이다.

과거를 더듬어보면 예전부터 택시 운전사분들은 어리거나 젊은 두 사람이 택시를 타면 가볍게 인사를 건네거나 외모 칭찬을 한다거나 하면서 말을 붙이곤 하다가, 썩 내키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갑자기 시사평론가로 전향해서 침을 튀기곤 했었다.

“정 졸리고 심심하면 껌이 좋은데.”

명수의 투덜거림에,

“오죽 답답하면 그러시겠어.”

라고 대답하는 단유였다.

하긴 좁은 택시 안에서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분들이니 사실 반 폐쇄적인 공간에 갇혀 있는 셈이다. 게다가 요즘은 택시를 부르는 손님도 뜸하다 하니 사람 만나기가 쉽기는 하겠는가? 오랜만에 손님이 타면 그저 반가운 탓일 게다. 빈 택시 안에서 들어도 이해 못 할 가요채널을 틀어놓진 않으니, 매일 듣는 게 시사 채널이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사 전문가 수준의 정보를 머릿속에 구겨 넣게 된다. 그런 루틴을 이해하면 택시 운전사의 대화 요령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다만 승객들 중에는 그런 대화가 반갑지 않은 사람도 있음을, 때로는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특히 이런 식으로 중구난방 떠들며 정확한 표적 없이 아무 곳에나 갈기는 형태의 비평이 불편한 단유는 더더욱 그랬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정형되지 않은 토의 방식 자체가 불편한 이유다.

****

아름의 부름에 아이들은 경직된 얼굴로 연습실 맏언니를 바라보았다.

“내 생각인데, 우리 함께한 지도 시간이 좀 지났잖아? 그런데 그동안은 서로 친해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선지 너무 분방했던 거 같아.”

시화는 ‘분방’이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가만 보니 채린 언니나 경빈 언니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눈동자를 굴리다 서로 눈이 맞았는데,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입술을 꾹 깨물며 얼른 아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로에게 지킬 건 지키자고 했지만, 정확히 무엇을 지켜야 할지를 정하지 않은 탓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 같아.”

지윤은 고개를 떨궜다. 조금 전 벌어졌던 일은 분명 자신의 말실수 때문이긴 하지만, 그게 이렇게 큰 잘못이라도 되는 양 이야기를 나눌 일인지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내 생각엔 우리가 함께 있는 동안 지켜야 할 규칙 같은 걸 세우자는 이야기야.”

여기 있는 이들 중 셋째인 지서는 고개를 떨구는 지윤을 흘깃 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 말은 회사에서 정한 규칙 말고 따로 우리끼리 규칙을 정하자는 거예요?”

회사에서 정한 규칙만 해도 외우기 힘들 정도라 아예 연습실 한 벽에 리스트를 붙여놓을 정도였다. 「연습실 안에 핸드폰 들고 들어오지 말 것」부터 해서 「마지막 나가는 사람이 전원이 모두 꺼졌는지 확인하기」같은 사소한 것까지 주욱 나열되어 있었다.

“그건 회사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고, 우리끼리 잘 지내려면 우리들만의 약속이나 규칙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

“예를 들면요?”

지서의 되물음에 아름은 건너편에 앉은 고개 숙인 지윤을 보며 대답했다.

“서로에게 상처되는 말하지 않기, 같은 거.”

“그런데 어떤 말이 상처가 되는지 알 수 없잖아요. 지윤 언니도 악의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고.”

“나도 지윤이가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래도 우리 사이에 데뷔를 하니 못 하니 같은, 불안해질 것 같은 말은 안 했으면 좋겠어.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데뷔하고 싶잖아?”

“······.”

“나도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안 할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절대 지윤이 혼내려고 하는 말 아니고. 그러니까 지윤아, 너무 상처받지 마.”

“······.”

“니가 우리들 위해서 앞장서서 분위기 좋게 하려고 했다는 거 알아. 언제나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좋은 뜻으로 하는 행동이 모두 좋을 수는 없는 거잖아? 알지?”

“······네.”

“아마 이거 말고도 각자 생각하기에 이런 건 안 했으면 좋겠다 싶은 게 있을 거야.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하나씩은 있지 않니?”

바닥에 주저앉아 이야기를 듣던 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누군가는 그런 게 있나 싶은 생각이고, 누군가는 있긴 있는데, 차마 언니들 앞에서 말하기가 어려웠다, 는 사람도 있다.

“지금은 곧 레슨 시작할 시간이니까 각자 생각만 하고 나중에 다시 모여서 이야기하자.”

“네.”

아이들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름은 그런 아이들을 둘러본 뒤, 엉덩이를 끌며 움직여 지윤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는 지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괜찮아?’라고 물었고, 지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른 아이들은 눈치를 살피며 엉덩이를 떼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때 문을 열고 슬기와 보민이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을 향하자 슬기가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보민은 잘했다며 슬기의 등을 토닥였고, 어린 시화와 경빈이 달려가 ‘언니, 괜찮아요?’라며 위로했다.

****

“좁은 공간에 갇혀 있으면 생각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거 같아.”

“그런 면도 없잖아 있지. 하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라고 봐.”

“그렇겠지.”

“당장 널 봐도 그렇잖아? 가장 넓은 스타디움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지만 네가 창의적이거나 자유로운 생각을 하는 건 아니잖아?”

“왜 나한테 그래?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덕담은 못할망정?”

“가장 친한 친구라고 내가 못 할 말 가리는 거 봤어? 할 말은 해야지.”

“이번엔 또 뭔데?”

“너 요즘 뛰는 게 편하지?”

“그렇지 않아도 진짜 그 말 하려고 했다. 나 요즘 날아다니는 거 봤냐? 진짜 내 심장이 두 개쯤 되는 거 같더라.”

“그건 그렇다 쳐도, 체력이 넘쳐나니까 열심히 뛰긴 하는데, 그것만 믿고 달리다 보니 경기 운영이 너무 단순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 그런 말 듣긴 했는데, 그래도 문제없잖아? 나 요즘 경기력 물올랐다는 말도 있는데.”

“남들이 지쳤을 때도 쌩쌩하게 달리니까 상대적으로 이득을 보는 거지. 네 플레이 자체는 너무 단순해. 지금 시즌에야 상대가 제대로 수를 못 내고 있지만, 당장 다음 시즌만 가면 네 플레이 스타일은 다른 팀의 견제에 쉽게 무너질 수도 있어.”

“그럴까?”

“바로 지난 경기만 해도 너 말이야. 상대 수비수가 라인을 짜고 있는데도 무작정 달렸지? 자신이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면서. 분명히 그때 사이드 쪽에서 같은 팀 멤버가 달려 들어가고 있는 걸 봤으면서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하지만 중앙에 밀집된 수비수를 벗기기엔 네 스피드보다 사이드에서 공격을 전개하는 게 좋을 거란 판단을 했어야 한다고 봐. 예전에 너라면 충분히 이타적인 플레이를 펼치면서도 골을 넣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너무 혼자 뛰는 경기가 많아.”

“일일이 다 보는구나?”

“내가 네 경기 안 본 적 있어?”

“야, 이거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려 하네?”

“말 돌리지 말고. 제대로 생각하면서 플레이해. 그래야 네 꿈인 장수 플레이어가 되지. 당장을 보지 말고, 미래를 봐.”

“알았어.”

“게다가 넌 단지 체력만 좋아졌을 뿐이지, 다치면 무슨 소용이야? 자칫 상대가 강하게 압박하다가 충돌이 나서 다치면? 그땐 네 심장이 두 개라도 소용없어.”

“알았다니까?”

“축구는 단체 경기라고, 네가 그랬어. 고등학교 때. 팀 입장에서도 단독 행동을 하는 우수한 플레이어보다 팀플레이를 할 줄 아는 플레이어를 더 선호할 거라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영국이라고 갑자기 개인플레이가 선호되기라도 하는 건 아닐 거 아냐?”

“얘는 왜 이렇게 잔소리가 늘었지? 너 때문이라도 나 다시 돌아가야겠다.”

“호빵이 기다린다.”

‘호빵’의 이름이 언급되자, 명수의 얼굴이 금세 시커멓게 죽어버렸다.

“여기야.”

그리고 말하는 사이에 벌써 도착했다. 명수가 고개를 들어 간판을 확인하니, 단유는 유명한 동물 병원이고 의사 선생님도 믿을 수 있는 분이라고 덧붙이며 병원 문을 열었다.

“들어가자.”

잠시 후, 단유와 명수는 작은 우리 안에서 눈을 감고 있는 호빵을 볼 수 있었다.

“괜찮은 거겠지?”

“괜찮지 않아. 조금 전에 들었잖아? 나이 때문에 더는 힘들다고.”

명수의 눈이 금방 촉촉이 젖어 들었다. 사실 반려견 때문에 현재 시즌 중인 선수가 귀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엄청난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 팀에서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명수에겐 호빵이 단순한 반려견이 아니었고, 멀리서 그저 사진이나 동영상만 보며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정도의 존재가 아니었다. 정말 호빵이 건강하기만 했다면 어떻게든 영국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사람에겐 누구나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누군가에겐 자신의 미래보다 중요한 반려견이 있을 수 있고, 누군가에겐 우정보다 소중한 꿈이 있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라디오 뉴스 채널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다른 어떤 규칙보다 자신만의 규칙이 중요할 수 있다. 그 뉴스가, 그 규칙이 다른 누구에게도 통용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혼자 떠들다 지쳐 조용해진 택시 안처럼, 연습실에도 미묘해진 분위기 속에 정적이 감돌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