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52화 (852/956)

꿈의 무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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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고용주와 전 고용인의 관계에서 이제는 오롯이 한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 대 대표로 만난 자리, 임을 강조한들 들어먹을 귀가 아니다. 허나 상대가 꼴같잖게 나온다고 똑같이 대응하는 법은 이제껏 바닥을 구르면서도 배운 바가 없던 대훈이라, 끝까지 예의를 갖추려 했다.

그러나 한 마디 한 마디 속을 긁어대는 단어만 조합하여 그물 던지듯 던져대니 반항이라도 하고 싶어 조소를 짓는다.

“제가 배운 것 중에 적당히가 없어서요. 항상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거든요. 이 바닥이.”

“그건 밑바닥에서 구를 때나 하는 이야기지. 자리에 올랐으면 자리에 맞게 처신하는 법도 배워야 하잖나?”

그러나 어지간히 우습게 보는 모양인지 ‘네까짓 게?’라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광식의 시선.

“글쎄요. 저는 제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요. 무엇보다 대표라면 밑바닥 구르는 매니저들 못지않게 더 열심히 움직이고 뛰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밥숟가락 챙기겠다고 남들 밥상 엎어대면서 돌아다니는 걸 보고 열심히, 라고 하진 않아.”

“밥상 엎은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러길 바라네만, 만약 경거망동하면 가만히 보진 않을 거야.”

우스운 소리다. 대훈이 생각하기에 대표라 불리며 회사를 운영하는 리더라면, 적어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칭찬하고 그들이 가진 장점을 살릴 수 있게 돕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눈앞의 광식은 절대 좋은 리더가 아니었다. 사소한 트집이나 잡고 단점을 거론하며 면박 주기를 일삼던 사람이었다. 그런 주제에 이제 와, 자기 사람들 챙기는 척을 하는 꼴을 보려니 이제껏 지켜온 소신이 무너질까 두려울 정도였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참으며 다시 미소를 지어본다.

“하하, 경고를 하시려고 오늘 자리를 만드신 겁니까?”

“충고네.”

마음 같아서는 그 충고 그대로 돌려드리죠, 라고 말하고 싶지만 경솔한 언행은 언젠가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법이니, 아무리 보기 싫고 미운 광식에게도 대훈은 함부로 말을 내뱉지 않았다.

“말 끝나셨으면 차를 시키시죠.”

“됐네. 식사는 다음에 하지.”

다행이라 생각하며, 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장 오늘 저녁부터라도 어제보다 더 열심히 움직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특히 광식의 밑에서 고생하던 몇몇을 위해서라도.

‘밥상을 엎는다고? 아예 그 밥상 다시는 못 받게 해주겠습니다.’

다짐하며 대훈은 광식을 배웅했다.

****

넓은 연습실의 전면 거울이―조금 과장해서―뿌옇게 변해버릴 정도로 땀과 열기로 가득하고, 바닥을 누비며 나는 마찰음과 헐떡이는 숨소리도, 앞에서 ‘하나, 둘, 셋, 넷’을 외치며 박자를 구분하는 트레이너의 목소리도, 열정에 녹을 것만 같은 연습실 풍경.

“그럴 리가.”

최첨단(?) 에어컨을 설치한 탓에 열기를 자동으로 감지하여 언제나 비슷한 온도를 유지되는 연습실은 오랜 시간 있어도 공기가 탁해지지 않고 선풍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필요도 없다.

그야말로 오랜 시간 연습에 몰두해야 할 연습생들에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돈을 많이 들이셨군요.”

“그만큼 연습생들 및 소속 아티스트들에게 최고이고 싶은 것이죠.”

설명을 듣던 사람들은 속으로야 ‘돈지랄’이라고 했지만, 겉으로 티를 낼 수 없으니, 엄지를 치켜들었다. 대훈은 사람들의 반응에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더구나 저희 회사 소속 트레이너 분들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습니다. 사실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겠죠.”

대형 기획사 정도라면 코웃음을 칠 이야기지만, 여기 모인 소형 기획사 소속의 대표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소문이 있지만, 속사정에 밝은 이들은 그들이 전 회사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그들이 왜 이 회사로 오기로 결정했는지를 알고 있었으니 팀장의 자랑에 딴지를 걸 생각은 가지지 않았다.

“자, 이야기만 들어서 뭐합니까? 직접 가서 보시는 게 가장 좋죠.”

물론이다. 사실 무명의 회사에서 위탁 연습생을 받는다고 했다면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D&D 엔터테인먼트는 현재 기획사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 같은 회사였다. 소문만 무성한 재력가의 후원을 업고 등장한 D&D가 설립과 동시에 업계에서 나름 소문난 작곡가, 안무가들을 싹쓸이한다는 소문이 돌고, 최근에는 시은을 영입하는 초대박을 터뜨리기까지 했으니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회사에서 위탁 연습생을 받는다고 하니, 소문과 달리 돈이 부족한가, 라는 의심은 들었지만, 그런 의심과 별개로 그곳에 소속된 트레이너들의 명성을 고려하면 충분히 위탁을 결정할 법도 했다.

때문에 각 회사의 대표들, 또는 영업이사들이 직접 찾아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이라는 설명을 듣던 단유는 연습실이 있는 층으로 향하는 무리의 뒷모습을 보며 기획팀장에게 물었다.

“이것도 수익사업의 일종인 거죠?”

“그렇죠. 기왕에 좋은 트레이너들을 두고 있는데 써먹어야죠. 트레이너들에게도 수익이 늘어나는 일이니 나쁘지 않을 테고요.”

본래는 연기학원이나 보컬학원 등에서 기획사의 위탁을 받는 편이지만, 가끔 이렇게 ‘훌륭한’ 트레이너들이 포진된 기획사에서 연습생 관리 자체를 위탁받아 키우는 경우도 있다고 기획팀장은 설명했다.

사실 단유에게 위탁 연습생 과정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오래전, 갤럭시즈와 나윤이 속해 있었던 기획사에도 위탁 연습생이 있었고, 단유도 가끔 나윤을 보러 갔다가 만나면 인사를 나누기도 했었다. 다만 그때는 그냥 있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게 기획사의 입장에서 얼마나 수익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탓에 질문을 던졌던 것일 뿐.

“그럼 혹시 연습생이 늘어나게 되면 원래 있던 연습생들에게 피해가 가진 않나요?”

“음,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위탁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늘면 자연히 따라오는 문제들이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들, 아시죠?”

“대충은 알 것 같네요.”

나윤과 식사를 빙자한 데이트를 하며 나누던 다양한 대화 중에는 위탁 연습생과의 소소한 마찰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딱히 위탁이 문제라기보다는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과 오랜 시간 같은 공간에 있다 보니 생기는 소소한 시비들이었으나,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딱 밥 한 숟가락에 뒷담화 한 젓가락 정도의 이야깃거리였을 뿐.

“사소한 갈등은 있을 수 있지만, 그건 개인의 사회성 문제라고 봅니다. 물론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는 연습생이 있다면 바로 조치를 취할 테니 회사에서는 이전보다 더 엄격하게 관리를 할 겁니다.”

“얼마나 더 받을 예정인 건가요?”

“저희 추측으로는 많아야 다섯을 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섯이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여기며 되묻자, 원래 위탁 결정이란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며, 역시 돈이 얽힌 문제다 보니 서로의 입장이 맞지 않으면 위탁을 거절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어중이떠중이를 다 받을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가 거절할 정도인가요?”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저희도 품격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최고의 시설, 최고의 트레이너, 대기업 못지않은 환경을 제공하는 마당에 아무나 받지는 않을 겁니다.”

단가는 비싸겠지만, 본래 이 시장이 비쌀수록 가치는 올라가는 법이란다.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엘리베이터가 내려간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위탁 연습생을 받게 되면 회사 자금 문제는 없어지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여전히 부족한 게 많지요. 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것보다 더 미래를 생각하면 지금 이 사업은 회사가 도약하는데 발판이 되줄 겁니다.”

“어떻게요?”

“회사가 움직이는 건 돈입니다. 하지만 회사가 성장하는 건 사람 때문이죠. 사람이 많을수록 기획사가 성장할 기회는 많아지는 법입니다. 돈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지요.”

요컨대, 위탁으로라도 인재풀이 넓어지는 것이 회사에 유리하다는 묘한 설명. 그가 말하지 않은, 혹은 하지 못한 여러 뒷사정이 그 속에 숨어있음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여러 회사의 대표들과 중요 인사들이 연습실을 구경왔다 나간 후, 잠시 숨 돌릴 틈을 얻게 된 연습생들은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른 회사 연습생도 우리 회사에 오는 건가?”

나름 이쪽으로 얄팍하나마 지식이 있던 지서가 지윤의 물음에 답했다.

“아마 그럴 거예요.”

지서는 윗층에서 기획팀장이 단유에게 했던 설명과 유사한 이야기를 연습생들에게 들려주었다.

“전부 돈이구나.”

“윗분들에겐 돈이지만, 저희들에겐 빚이죠.”

“윽, 빚이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아파.”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쓰러지는 지윤의 머리가 곁에 있던 보민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보민은 깔깔 웃으며 땀에 전 지윤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언니, 땀 좀 봐.”

“내가 더러워?”

“아니요. 그럴 리가요. 신경 쓰지 마요. 나중에 샤워하면 되는데.”

지윤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우리 데뷔할 수 있겠지?”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언니?”

보민이 되묻자 지윤은 울적한 얼굴이 되어 바닥에 떨어진 땀방울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어떤 사람들은 3년, 4년씩 연습하고 데뷔한다고 하잖아. 되게 잘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오래 걸리는데, 지금 기초도 겨우 따라가는 내가 과연 그 정도 수준에 오르려면 얼마나 걸릴까 걱정이 돼서.”

“엄살은. 언니 잘하시잖아요?”

“잘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체력이 안 돼. 내 나이가 벌써 22살인데, 3년 연습생으로 있으면 25살이잖아. 그리고 그동안 빚을 갚을 정도로 성공하려면 또 얼마나 걸릴지 모르고. 그러면 정산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때는 또 내 나이가 몇이겠니?”

나이 이야기를 꺼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분을 보충하던 아름이 눈을 흘겼다. 지윤은 두 손을 합장하고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해본다.

“체력은 점점 떨어지는데 빚을 갚으려면 시간은 더 오래 걸릴 테고, 그 시간 동안 더 체력은 떨어지고, 무대 위에 서는 게 힘들어지고, 그러면 인기를 못 얻고, 인기를 못 얻으면 계속 정산받기 힘들어지고. 나 언제 성공해보냐?”

반쯤은 우스갯소리로, 그냥 자학개그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슬기가 얼굴을 굳히며 대꾸했다.

“언니, 그런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평소 진지한 성격이긴 했지만 다소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 하여 주위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농담이야, 농담.”

지윤이 웃으며 손을 저었지만, 슬기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농담이라도 그런 이야기,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너, 왜 그래? 웃자고 한 이야기잖아?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달려들면 갑분싸야.”

슬기는 말리는 동갑내기 친구 보민의 만류에도 얼굴을 펴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연습실을 나가버렸다.

“쟤는 또 왜 저래?”

지서가 지윤의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하자, 보민이 슬기 대신 변명했다.

“슬기 친구 중에 데뷔한 애가 있거든요.”

“그래?”

“그 친구는 16살, 그러니까 시화 나이 때부터 가수를 준비했었대요. 그러다가 작년에 겨우 데뷔를 했는데 데뷔 무대 이후로 음방에 나간 적이 없대요. 계속 지역 행사만 돌아다니고 있다는데, 되게 고민이 많대요.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요. 그런데 계약 때문에 회사를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으니 억지로 하고 있대요.”

“그러다가 우연히 직캠 같은 거로 성공할 수도 있는 거잖아?”

지서의 물음에 보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다고, 지금은 성공해도 싫다고 그런다는데요. 아예 이쪽 길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그래서 슬기한테도 그랬대요. 그냥 일찍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가라고.”

“친구 맞아요?”

어떻게 친구한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냐고, 경빈과 시율이 씩씩거리는 시늉을 했다.

아무튼 그런 이야기 때문에 최근 마음이 심란한 슬기, 라는 보민의 변명에 지윤은,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굳이 이 자리에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어야 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신이 가볍지 않은 내용을 너무 무신경하게 말한 탓도 없진 않다. 무엇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꿈을 위해서 시간과 돈과 젊음을 희생하고 있지 않은가? 그 희생을 ‘농담’으로 승화시키기엔 아직 함께 한 시간이 길지 않고, 서로에 대해 아는 바가 깊지 않다.

“너희 둘 되게 친하구나? 그런 이야기도 하고.”

“동갑이잖아요.”

스무 살 동갑내기 친구이면서 슬기는 가수 지망, 보민은 배우 지망이다 보니 서로의 고민을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었던 모양이다.

돌아오지 않는 슬기 때문에 지윤은 슬기가 나간 방향을 잠시 바라보았지만, 그래도 따라 나가기엔 모양이 빠지는 것 같아 선뜻 일어서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다 역시 같은 가수 지망인 시화에게 시선이 닿았다. 말없이 눈으로 문을 가리키자, 역시 막내이면서도 눈치가 빠른 시화가 얼른 일어나 ‘언니 데려올게요’라며 달려나가려 했다.

“됐어. 내가 갈게.”

보민이 시화의 어깨를 누르고 일어서서 연습실을 나갔다. 그 후, 침묵이 감도는 연습실.

“다들 잠시만 볼래?”

그때까지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아름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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