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51화 (851/956)

꿈의 무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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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가 끝날 때까지 단유는 택윤이 해줬던 이야기를 곱씹느라 말이 없었다. 그 탓에 택윤은 단유가 혹시 불쾌함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젠 저 친구 표정을 보고도 대충 속내를 짐작할 정도가 되었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택윤의 광대가 미세하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그때 식사를 마친 단유가 입을 열었다. 웃은 걸 보았나 싶었는데,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다.

“일단 당분간은 이대로 지켜보도록 하죠.”

“그럴 생각이었어요.”

단유는 팔을 뻗어 테이블 한쪽에 놓인 티슈를 뽑아 입을 훔쳤다.

“공 이사님의 의견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시와 견제가 시스템에 포함되는 이유는 독단과 독선에 대비하기 위함이겠죠. 그런데 전 아직 잘 모르겠네요.”

말을 하면서 단유의 손은 수저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자신이 썼던 숟가락과 젓가락을 정리하는 습관은 몇 번을 봤는데도 익숙하지 않았다. 보기 싫다는 의미가 아니라,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수준에서의 강박이 익숙하지 않다는 의미다. 딱히 욕먹을 습관도 아니니 으레 그러려니 하며 택윤은 단유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찌되었던 결국 이후의 결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네요. 만약 이것이 연구실에서 실험 개요를 짜는 일이라면, 실제 작업이 들어가기 전에 많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이건 대중을 대상으로 무형의 상품을 파는 일이잖아요? 어떤 선택이 성공할지 혹은 실패할지를 가늠하는 건 일반적인 경우에 빗대기가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하니까.”

“다만 분명히 염려되는 부분이 있음도 알겠습니다. 결국 회사라는 조직체는 돈으로 움직이는 것이니 자금의 운영이라는 측면에서는 선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그 적정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에 대한 기준이 아직 명확하지 않네요. 말씀하셨듯이 이 회사는 다른 회사와 달리 투자 대비 수익의 정상 비율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어디까지 투자를 해야 하고 어디까지 모험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게 가장 크네요.”

“네, 그러니 대훈 씨의 결정을 동종 업계에서 일했던 임원들이 모두 동의한 거겠죠. 그들에겐 그것을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경험이라는 게 있으니까.”

반면 경험이 없는 택윤은 보수적으로 안정적인 입장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어떤 선택이 신중한 선택인지, 혹은 소극적인 선택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네요.”

“그게 사업인 거죠. 그래서 어렵다는 거고.”

“그래서 제 선택은 우선 대표님을 믿어보자는 겁니다. 처음부터 그가 성공만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이것도 제가 감당해야 할 리스크의 한 부분이겠죠. 아직 축적된 데이터가 없으니 이번 기회에 과연 이러한 도전이 무리였던 것인지, 아니면 성공을 위한 발판이었던 것인지를 지켜보도록 하죠.”

“역시···.”

“네?”

“아, 나쁜 뜻은 아니고, 그냥 역시 단유 씨는 여유가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여유요?”

“설령 이 회사가 망한다고 해도, 단유 씨에겐 비싼 수업료 정도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정도는 아닌데요.”

단유는 손사래를 치고는 의자를 뒤로 물리며 일어섰다.

“비싼 수업이라면 아무래도 오늘 공 이사님이 제게 해주신 수업이 비싼 수업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제가 계산할게요.”

“매번 얻어먹는 것 같아 죄송하네요.”

“비싼 수업을 받아 배부른 학생이니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가요?”

“앞으로도 이렇게 자주 비싼 수업을 받을 수 있다면 언제든지 수업료를 지불하도록 하죠.”

“그렇다면 다음에도 제가 식당을 미리 잡아놓도록 하죠.”

“얼마든지요.”

식당을 나와 넥타이를 고쳐매던 택윤이 단유를 힐끔 바라보더니 웃으며 한마디했다.

“단유 씨의 가장 큰 매력이 뭔지 아시나요?”

“제 매력이요?”

그런 게 있었나, 싶어 괜히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내려다보지만 달리 특이하게 보일 만한 건 없었다.

“언제나 여유가 있다는 거예요. 가끔 그런 착각이 들 때가 있어요. 긴 삶의 경험을 축적한 나이든 이들에게서나 볼 법한 여유요. 말하는 태도나 내용,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삶에서 우러나오는 여유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저도 아직까지는 체득하지 못했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아무리 서둘러봐야 거기서 거긴데, 라는 생각. 누구보다 빨리, 누구보다 먼저 결승선에 다다르려 달렸지만, 결국 지나고 보면 다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더란 말이죠. 오히려 빠르게 달리려다 혼자 지치는 경우가 더 많고. 그래서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말, 최근에 유독 와닿는 느낌이에요. 천천히, 느리게 가더라도 전혀 문제가 안 되거든요. 오히려 끝까지 달려 완주를 하는 게 좋죠. 그러려면 항상 여유가 있어야 돼요.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 뒤를 생각하는 여유, 앞을 내다보는 여유. 그런 게 있어야 결국 끝까지 갈 수 있더란 말이죠.”

“벌써 과외 시간인가요? 마침 저기 카페가 있네요.”

“목이 마르더라고요, 하하.”

두 사람은 서늘해진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거리를 천천히 걸어갔다.

긴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직 하은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보니, 마침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어 늦을지도 모른다는 대답이 있었다.

―저녁 혼자 챙겨 먹을 수 있지?

하은의 질문에 단유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래요? 원래 혼자 챙겨 먹고 다녔어요. 누가 들으면 선생님이 매일 챙겨주는 줄 알겠어요.”

―챙겨줄 때 고마워해.

단유는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일찍 자’라는 인사말과 함께 통화가 끊어졌다. 단유는 홈화면만 덩그러니 떠 있는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틀어 발밑에서 꼬물꼬물거리는 시커먼 녀석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녀석, 호빵은 기운이 없어 자기 자리에서 단유를 게슴츠레 쳐다보고 있는데 젊고 시커먼 녀석, 패티는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알았어. 기다려.”

맨들맨들 윤기나는 사료 그릇에 사료를 부으니 이내 코를 박고 열심히 흡입한다. 진공청소기가 따로 없다. 생각난 김에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다 가볍게 손을 저었다. 대리석 바닥을 훑고 지나가는 작은 회오리가 금방 먼지를 빨아들여 잿빛으로 변한다. 호빵은 익숙하다는 듯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 이내 고개를 두 다리 사이에 파묻고 만다.

이후 번쩍, 빛이 나고 잿빛의 회오리는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드는 호빵. 단유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에 물기가 어려있었다.

“잠깐 기다려봐.”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패티가 먹는 사료와 별개로 따로 노령견을 위한 사료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이가 좋지 않아서 사료를 따라 물에 불려 줘야 하는데, 그마저도 요즘 잘 먹지 않아 걱정이 되고 있었다. 준비한 사료를 들고 호빵의 앞에 두자 호빵은 식욕이 없다는 듯 턱을 뻗은 두 앞다리 위에 두고 눈을 감아버린다.

“먹자, 좀.”

단유는 호빵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러다가 나중에 명수가 보면 나 욕먹어. 너 제대로 케어 안 했다고.”

영국으로 떠날 때 명수가 많이 아쉬워했다. 사실 호빵을 키우기로 결정한 것은 명수 때문이었고, 그래서 누구보다 호빵에게 애정을 많이 베풀었던 것도 명수였다. 사실 데려가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이미 호빵은 나이가 많이 들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수의사의 말이 있었기에 결국 데려가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잘 부탁한다며 떠난 명수에게 단유는 가끔 영상통화로 호빵을 보여주곤 했다.

단유는 고개를 돌려 화장솜을 찾았다. 호빵의 나이가 든 이후로 이렇게 눈꼽이 끼는 경우가 잦았는데, 제때 닦아주지 않으면 결막염 같은 질병이 생길 수 있다 하여 보일 때마다 닦아주는 편이다. 화장솜이 눈꼽을 처리하는 데 좋다하여 대량으로 사놓고 거실에 뒀는데, 본래 이를 항상 두는 데 두면 찾는 데 어려움이 없지만 하은이 한 번 사용하고 나면 그 위치가 매번 바뀌어서 단유는 이를 찾느라 두리번거리곤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리 멀지 않은 테이블 탁자 위에 있었다. 손을 뻗을 필요는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화장솜은 어느새 단유의 손 위에 올려져 있었다. 간단한 마법이다.

검지와 중지로 화장솜을 붙잡고 호빵의 눈을 가볍게 닦아주었다. 호빵은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얌전한 건지, 저항할 힘도 없는 것인지 분명하진 않았다.

사용한 화장솜은 어느새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한참을 다독여 호빵의 저녁까지 챙겨 준 후, 단유는 자신이 먹을 시리얼을 준비해 방으로 돌아갔다. 노트북을 펼치고 자신이 만든 자산 관리 프로그램의 로그를 확인하고, 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인터넷을 켜고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오늘 경기 일정을 찾았다.

‘한 시간 남았네.’

단유는 시계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깐이면 괜찮으리란 판단이 들었다.

****

시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팬들의 함성과 응원가를 부르는 목소리로 가득한 스타디움. 그 뒤편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단유는 초록색 경기장 위를 왔다갔다 뛰어다니며 몸을 풀고 있는 명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보이네.’

솔직히 말하자면, 명수의 몸에 새긴 ‘지치지 않는 체력’의 타투가 과연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긴 했다. 아직도 명명되지 않은 마법의 문자에 대해 나름 연구를 많이 하긴 했어도 완벽히 해석했다고는 할 수 없었던 때였으니까. 또 그쪽 세계가 아니라 이쪽 세계에서도 그 문자의 힘이 통할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무턱대고 명수의 몸에 글자를 새길 수는 없으니, 단유는 본인의 몸에 미리 테스트를 하긴 했다. 명수처럼 문신으로 새기진 않고, 대신 헤나를 이용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효과가 있음을 확인하였기에 명수에게 타투를 권유(?)했다.

그 효과가 영구적일지, 일시적일지 분명치 않았는데 다행히 요즘 명수를 보면 문자가 있는 한 계속 효과가 지속되는 것으로 보였다. 다만 다른 세계에서 보았던 것처럼 극적인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체감할 수 있는 선에서 체력의 증대가 있다는 정도였지만, 그게 어딘가? 정말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니, 단유로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명수에게 주고픈 선물이었다.

겸사겸사 명수의 경기도 직관하면서 혹시 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지 계속 관찰 중이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명수가 그 문자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되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혹시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힘을 얻어 상대와 겨루게 되었다고 화를 낼까? 아니면 우연히 얻은 힘이라도 자신이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니 잘못이 없다 여길까?

사실 명수를 잘 아는 단유로서는 당연히 명수가 어떤 답을 할 것인지 잘 알고 있지만, 혹시 명수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진 탓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다고 그 사실을 명수에게 말할 단유는 아니지만.

단지 그런 의문을 떠올린 이유는, 오늘 택윤과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대훈을 비롯한 회사 사람들은 단유가 투자하고 있는 돈 덕분에 별 걱정 없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좀 극단적인 표현이라 생각은 하지만, 분명 돈이 없어서 허리띠 졸라매고 힘들게 회사를 운영하는 곳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장을 찾아가거나 투자자를 찾는다거나 하는 소위 ‘영업’을 할 필요가 없이, 오로지 미래를 향해 달리기만 하면 되니까. 편하게 회사 생활한다, 는 택윤의 말은 그런 의미일 테다.

단유가 보기에 회사가 흥청망청 돈을 쓰는 것도 아니고 정말 필요한 곳에 자금을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다른 일반적인 경우라면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할 일들에도 별 고민 없이 ‘Go!’ 라 합의하고 의사봉 두드려 예산을 추진하는 중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단유는 ‘로또’나 마찬가지고, 그래서 그가 아무런 직함도 없이 회사를 오가지만 사람들은 ‘이사’라 존칭하며 우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정은 단순하다. 만약 단유가 사라진다면, 회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새로운 투자자를 찾기 위해 대훈은 지금의 여유를 부릴 틈이 없을 것이고, 이들이 추진하는 여러 프로젝트는 자금상의 문제로 중지되거나 혹은 시작도 전에 포기할 것이다. 시은과 같은 스타급 연예인의 영입은 시도는커녕, 바라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 회사에서 단유의 존재는 크다. 그건 객관적인 사실이고, 단유 스스로는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단유는 생각한다.

설령 자신이 누군가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힘을 준다고 한들, 그것이 부당할지 아닐지를 판단하여 자신의 선택에 주저할 필요가 있을까? 비록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지만, 그런 조건이 갖춰진 상황에서 자신이 다른 여러 제반 조건들을 고려하면서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눈치 볼 필요가 있을까? 공정한 경쟁과 정정당당함이라는 가치를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그 때문에 미리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을 줄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만약 그런 이유라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미 이 세상에 부정한 것인데? 매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단유와 정당하게 겨룰 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런 세상이다.

생각의 끝에서 단유는 마침내 결론을···.

“와아!”

내리려던 찰나, 골이 터졌다. 환호하는 사람들이 공중으로 뻗은 팔 사이로 그라운드를 가로지르는 명수의 환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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