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50화 (850/956)

꿈의 무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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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양채린이라고 합니다.”

“그래, 반갑다.”

사내가 내민 두툼한 손을 내밀자 허리 숙여 인사했던 채린은 얼른 그 손을 붙잡았다.

부슬부슬한 턱수염에 덥수룩한 머리 스타일, 헐렁한 꽃무늬 남방을 걸친 옷차림의 사내는 멀리서 보면 꽤 냄새 날 것 같은 외모인데 고급향수라도 뿌렸는지 인사를 나누는 내내 은은히 코를 자극하는 향이 느껴졌다. 게다가 전체적인 패션과 어울리지 않게 알록달록한 천연색의 안경까지 끼고 있으니, 한순간에 서울역 앞 노숙자에서 파리 몽테뉴 거리의 ‘패셔니스타’로 둔갑한 모양새다.

‘······.’

솔직히 말하면, 패셔니스타를 꿈꾸는 동묘 뒷골목 아저씨가 솔직한 감상이다. 하지만 감상은 감상이고 차마 상대 면전에 대고 ‘이상해요’라고 말할 순 없는 법이다. 특히 상대가 앞으로 함께 작업할 광고의 감독이라면.

“프로필보다 실물이 훨씬 좋은데?”

“감사합니다.”

외모만 보면 말도 거칠게 할 것 같은데, 의외로 나긋나긋한 중저음의 목소리라 그마저도 언발란스하게 느껴졌다. 인사를 나눈 채린이 굳은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서자, 곁에 있던 매니저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감독을 상대했다. 한쪽 팔로 채린이 더 물러서지 못하게 막으며.

“많이 긴장한 모양입니다.”

다행인지 채린의 표정에서 감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킬 염려는 없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든, 나쁜 쪽으로 생각하든, 상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그대로 상대에게 들켜버린다면 그것만큼 곤란한 일은 없을 것이다.

“긴장할 필요 없어. 지금 당장 카메라 돌릴 것도 아닌데.”

그렇게 웃음을 흘린 감독은 매니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 애가 그쪽 기대주인가 보죠?”

“그렇게 평가할 정도는 못 됩니다. 이제 갓 시작한 아인데요. 하지만 회사에서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희 연습생들 중에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아이기도 하고요.”

고작 두 번의 평가만 받았을 뿐이고, 전 사원을 대상으로 한 평가 무대에서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그것만 가지고 기대주라 평하기엔 아직 누적된 성과가 없다. 하지만 그런 내부 사정을 일일이 이야기하는 것도 우스우니, 매니저는 두루뭉술하게, 적당히 포장해서 채린을 자랑했다.

“이거 단순히 엑스트라로 쓰기에 아까울 정도네요, 하하하. 카메라는 익숙하고?”

다시 채린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감독의 말에 매니저가 대신 대답했다.

“아시잖아요? 요즘 아이들, 카메라 별로 안 무서워합니다.”

“그래도 막상 슛 들어가면 얼굴 굳는 사람들 많아요.”

“혹시라도 그런 일 벌어지지 않게 잘 교육 시키겠습니다.”

“뭐, 아직 시간 있으니까 두고 보는 걸로 하고.”

사실 조금 튀어도 상관없다. 촬영 후 보정으로 손을 봐도 되고, 카메라 테크닉으로 적당히,

‘아, 그럴 필요도 없으려나.’

어차피 엑스트라인데.

“그나저나 요즘 그쪽 회사 유명합디다? 시은 씨가 그쪽 회사로 들어갔다고 하던데.”

“하하, 네. 무려 그 ‘시은’이 저희 회사 소속이 되었죠.”

“몇 달 전만 해도 있는 줄도 몰랐던 회산데 어디서 이렇게 불쑥 튀어나왔대? 깜짝 놀랐어요.”

“하하, 그런가요? 그런데 앞으로는 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여기 있는 채린이도 그렇지만, 저희 회사에 더 기대해도 좋을 아이들이 많이 있기도 하고요.”

감독의 덕담(?)에 송구스럽다는 듯 자세를 낮추면서도 회사에 대한 자랑과 영업을 빼놓지 않는 훌륭한 매니저의 자세는 회사 대표가 봤다면 분명 기뻐했을 모습이었다. 다만 채린은 익숙지 않기도 하거니와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란 생각에 매니저에게서 반걸음 뒤에 물러서서 다소곳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오늘의 미팅에서 채린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함께 온 매니저가 채린을 소개시켜 주고,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이야기만 전하면 끝일 미팅이었다. 사실 조금 의문이 드는 상황이긴 했다. 애초 광고란 걸 처음 찍는 것이니 사정을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들어보니 자신의 역할은 고작 ‘엑스트라’ 수준의 짧은 등장씬이 전부라는데 말이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채린은 매니저에게 넌지시 물었다.

“원래 엑스트라들도 이렇게 하는 건가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매니저가 채린을 힐끔 보더니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넌 그냥 엑스트라가 아냐.”

“네?”

“D&D 엔터의 첫 시작이 너로부터 시작하는데, 단순히 엑스트라라고 생각해?”

하지만 맡은 배역이 ‘엑스트라’ 아닌가. 미팅 후 잠시 보여줬던 콘티 상에서 채린은 주인공이 화면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을 때, 귀퉁이에서 지나가다 잠깐 고개를 돌려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것으로 끝이 났다.

아니, 그보다.

“시은 선배가 시작 아니에요?”

“물론 시은이도 있지만, 걔랑 너는 다르지.”

매니저는 휴대폰을 품에 집어넣고 시선을 완전히 채린에게로 향했다.

“시은이는 완성된 연예인, 하지만 넌 우리 회사와 함께 시작한 연습생. 회사 전체로 보면 누가 성공하더라도 좋을 일이지만, 기왕이면 우리 회사와 함께 성장한 네가 성공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겠어? 앞으로 들어올 후배들을 생각하면 말이야.”

“후배요?”

낯선 단어에 채린이 깜짝 놀랐다.

“넌 영원히 후배가 없을 거 같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아직 저희 들어온 지 3개월 밖에 안 됐고.”

“네가 영원히 3개월 차 연습생일 건 아니잖아? 앞으로 1년 차, 2년 차, 그리고 10년 차, 20년 차가 될지도 모르잖아? 설마 그 전에 회사가 망할 거 같아?”

“아뇨.”

“그럼 1년 차 되기도 전에 관두려고?”

“아뇨.”

“네가 이 일을 계속하다 보면 당연히 후배가 들어올 거 아냐. 그럼 그 후배들한테 넌 어떤 모습이고 싶어? 당연히 성공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후배 뿐만이 아니지. 당장 네 주위 사람들에게도 네가 당당히 성공한 모습을 보여야지. 너희 부모님도 네가 성공하길 바랄 거고, 네 친구들도 그렇지? 그런 사람들에게 성공한 모습을 보이려면 당장 지금부터라도 생각을 고쳐. 넌 그냥 엑스트라가 아니야. 언젠가는 주인공이 될 ‘양채린’이라고 생각하도록 해.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양채린, 회사를 대표하는 아티스트 양채린, 후배들이 존경하는 양채린이 되겠다고 마음 먹으란 말이야.”

“네.”

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는 그 모습을 힐끔 보더니, 다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적당한 각오로는 이 바닥에서 성공 못 한다.”

“네.”

“혹시 지난 평가 때 네가 1위 했다고, 다른 사람들이 다 너보다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채린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지난 시간 함께 레슨을 받으며 언니 동생들이 어떤 각오로, 어떻게 연습하는지를 보았다. 그런 면에서 채린은 오히려 이번 평가의 결과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자신보다 훨씬 연기도 잘하고 무대를 잘 꾸민 언니도 있었으니까.

“아무리 잘해도 기회를 얻지 못해 성공에서 멀어져간 사람만도 수두룩한 세상이야. 운이 나쁘다고? 그건 운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야. 운도 좋아야 하지만, 그걸 능가하는 노력과 재능과 실력이 겸비되어야만 하는 일이야. 그러고도 성공한 이는 극히 일부. 지금 네가 경쟁해야 할 상대는 단지 한 연습실에 있는 이들만이 아니야. 서울 시내에만 수백 개가 넘는 기획사가 있고, 그 기획사 지하 연습실에서 땀 흘리는 수많은 연습생들, 그리고 이미 데뷔한 사람들이 모두 너의 경쟁 상대야. 적당히는 안 통해. 엑스트라? 벌써 스스로를 엑스트라 따위로 규정하고 마는 정신으로는 절대 성공 못 해.”

“네.”

매니저는 핸드폰을 들어 채린을 향했다.

“여기 봐.”

매니저의 핸드폰에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채린의 얼굴이 담겼다.

“나중에 이 영상이 어떻게 쓰일지 참 궁금해지지?”

“흑역사인가요?”

“흑역사가 될지, 아니면 팬들이 가장 소장하고 싶어하는 시크릿 영상이 될지는 네 노력에 달린 거야.”

채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손가락 내려.”

“네.”

브이자를 해보이려 슬금슬금 올라오던 손가락이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지금은 보잘 것 없는 핸드폰 영상이지만, 다음에는 50인치 TV화면에서 네 단독샷이 뜰 수 있길 바란다.”

채린은 핸드폰의 작은 카메라 렌즈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

“잘도 간지러운 이야기를 하시네요.”

대훈은 소름 돋는다는 듯 팔을 쓸어내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전 사실만 말했을 뿐인데.”

대훈의 맞은 편에 앉은 건들건들한 외모의 사내는 잔을 들며 아무렇지 않게 반응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이 얼마나 좋으면 시은을 가져갔을까? 그럼 다른 사람은 운이 지지리도 없어서 시은을 뺏긴 거네? 나 같은 사람?”

“그런 뜻은 아닙니다.”

“알아. 그래서 하는 말이야. 이 대표가 능력이 정말 좋다는 말. 이리 능력 좋은 사람인 줄 알았으면, 진작에 이 대표를 진급시켰을 건데.”

“다행이죠. 덕분에 이렇게 대표라는 직함도 달게 되었으니. 다 대표님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묘하게 ‘대표’라는 단어에 강세가 들어간 느낌이라, 광식은 피식 웃음을 날렸다.

“이거 참. 생선가시가 목에 걸린 느낌 같군.”

“차라도 내오라 할까요?”

“이야기가 마저 끝나면 내가 시키지.”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자네 회사에 투자한 사람, 그 아이지? 일전에 본 적 있던?”

광식은 유진이 자기 친구라며 데리고 왔었던 단유를 본 적이 있었다. 단유가 가진 명함―서울대 출신―도 마음에 들었고, 일반인치고 꽤 괜찮은 외모이기도 해서 넌지시 제안한 적도 있었지만, 단유의 딱딱한 반응에 금방 흥미를 잃었던 적이 있었다.

“생각하시는 그 사람이 맞을 겁니다.”

“거 참. 그때는 그저 머리 좀 있는 친구라고만 생각했더니, 그런 재력가일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알았다면 바뀌었을까요?”

“물론이지. 그러고 보면, 난 참 운이 나쁜 사람이야. 눈앞에 보물이 있는데도 모두 놓쳐버렸으니.”

쯧, 혀를 차고는 입술 주위를 엄지로 훔쳐내던 광식은 예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대훈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서 문득 예전 일산의 한 스튜디오 주차장에서 마주했던 광식의 모습을 떠올리는 대훈이었다.

“그래도 말이야, 상도덕이란 게 있잖아?”

“물론입니다. 이 바닥에서 상도덕 지키지 못하면 명함 접고, 셔터 내려야죠.”

대훈은 정중한 듯, 하지만 살짝 비꼬는 말투로 광식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진짜 상도덕을 지켜야 할 사람이 누군데, 라는 의미를 광식은 이해했을까?

“그런데 요즘 이 바닥 물을 흐리는 사람이 있다고, 주변에서 난리가 아니더란 말이지.”

“그런가요?”

“난 되도록 가만히 있으려고 했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내 밑에 있다가 나간 사람인데, 그간의 정이 있잖은가. 밑에 있는 동안 일을 허투루 배우진 않았을 거고, 그러니 적어도 그런 소문대로 망나니는 아닐 거라고 말이야.”

듣던 망나니가 기가 차서 혀를 찰 노릇이다. 소문의 망나니는 그 소문의 근원지가 어디냐고 추궁하는 대신, 진짜 망나니에게 되물었다.

“무슨 소문이 돌길래 그러십니까?”

“이제 막 만들어진 회사에서 저열한 방법으로 모략을 써서 사람들을 데려가려고 한다고. 실제로 데려간 사람도 있고.”

“처음 듣는 소문인데요.”

“당사자는 귀가 어두운 법이라잖나?”

“아, 소문의 망나니가 저였군요?”

이제 알았다는 듯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대훈은 손뼉을 쳤다. 또 한 번 혀를 차며 대훈을 보던 광식은 헛기침과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본래 회사에서 열심히 일 잘하던 사람들을 빼가는 것도 불쾌하지만, 그 과정에서 회사와 이간질을 시켜서 다투게 만들기도 했다고 하던데.”

“글쎄요, 이간질이라.”

“마치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헛바람을 넣게도 만들고, 양쪽이 모두 합의한 계약까지 사기로 몰고 가서 회사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그러고. 뭐, 이야기는 많지만 전부 소문이거니 생각했는데, 최근 자네가 우리 회사에까지 접근했다는 보고를 받고는 도저히 좌시할 수준이 아니라 생각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거네.”

이간질, 이라고 부르는 일은, 사실 전 회사의 소위 ‘노예 계약’이라 불리는 부당 계약을 맺고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던 소수의 전속 작곡가들, 전속 안무가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가수나 배우 못지않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 작곡가, 안무가, 그 외 스태프들이 적잖게 있었다. 예전부터 그런 상황에 안타까움을 느끼던 대훈이었기에 마침 ‘힘’이 생긴 틈에 그들에게도 정당한 대우를 받고 일할 기회를 주고 싶었고, 대훈의 ‘힘’이었던 단유의 ‘투자’에 빌어 그들에게 자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것이 현재 D&D 엔터테인먼트 작곡가 및 안무가 팀의 탄생 비화라 하겠다.

“자네가 사업을 성공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적당히 지켜야 할 선이 있는 법이네.”

“적당히 하지 않으면요?”

대훈은 입꼬릴 올리며 되물었다. 광식의 얼굴이 일그러질수록 대훈의 입꼬리는 길게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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