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49화 (849/956)

꿈의 무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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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윤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단유는 맨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택윤은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그렇게 부끄럽습니까?”

“공 이사님도 제 입장이었다면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닐 건데요.”

“글쎄요. 전 단유 씨처럼 화려한 과거가 없어서요.”

단유는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전 누구보다 평범하고 싶었는데 말이죠. 지금 생각하면 왜 저런 일들을 했었나 싶습니다.”

“남들은 부러워할 일 아닌가요? 어려서부터 모델에 가수까지 모두 섭렵하다니.”

단유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다행히 이쪽을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가수라고 부르지 말아 주실래요? 고작 노래 하나 부른 거로.”

“원 히트 원더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딱 단유 씨의 경우를 일컫는 거 같은데.”

“히트는 하지 못했으니, 그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쨌거나요.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건데,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하아.”

단유는 앞에 놓인 물컵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흔치 않은 모습에 택윤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재밌는 이야기를 하길래 저러나 싶어 이쪽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단유는 헛기침을 하며 택윤을 바라본 후, 물 한 모금을 머금었다.

“그나저나 역시 신생이라 그런 걸까요? 보고 있으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들어요.”

“네?”

설마하니, 내부 행사 한 번 했다고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으니 단유는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회의 때 결정된 일 말입니다.”

“아, 네.”

4분기, 그리고 다음 해 1분기까지 진행을 목표로 한 프로젝트의 결정으로 회사는 부득이 추가예산 투입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엄숙해진 목소리와 진지해진 표정. 단유도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조금 걱정이 되는 부분이 없잖아 있습니다.”

“뭐가요?”

“뭐, 연예기획사다 보니 일반 회사의 경우와 다를 수 있음은 이해하지만, 오늘과 같이 즉흥적으로 기존 예산 편성안을 깨고 추가 승인을 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분명 그런 점도 있겠죠. 하지만 어차피 초기 투자가 많이 필요하다는 것은 예전에 동의한 부분 아닌가요?”

“아무리 정밀한 계산을 해도 조금씩 틀어지는 게 예산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예산안을 미리 작성하고 그에 맞추려 하는 이유는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회사가 감당해야 하는 리스크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회사가 아무런 수익 활동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죠.”

단유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택윤은 모자라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예산은, 경영 전략에 맞춰 재무적인 이해에 따라 기획되어야 합니다. 발전 지향적 경영 전략이 수립되었다면, 그에 맞춰 적극적인 예산안이 구성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기본은 분명해야 합니다. 정확히 예산이 언제, 어디에 편성되고 쓰여야 하는가, 라는 겁니다. 그것만 정확히 지켜진다면 적어도 회사가 갑자기 망하는 일은 없을 거란 얘기죠. 거꾸로 말하면, 그걸 지키지 못하는 회사는 리스크에 허덕이다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거죠.”

“공 이사님은 현재 회사의 경영 전략에 문제가 있다고 보시나요?”

“경영 전략뿐 아니라 경영 철학 자체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회사라는 단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은 한 개인의 경우도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한 달 동안, 혹은 1년간 쓸 수 있는 돈이 정해져 있다고 가정해보죠. 적당한 생활 수준을 유지하면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돈을 쓰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그에 따라 지출을 관리하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흔히 말하는 재무 관리의 개념이죠?”

문득 공 이사를 만났던 처음의 기억이 떠올라 단유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 공 이사는 단유의 재무 관리를 해주겠다며 이것저것 묻다가 단유가 상상도 못 했던 거액을 소유하고 있음을 깨닫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급기야 자신이 준비했던 재무관리표를 조용히 휴지통에 버리기까지 했었다.

단유의 미소를 본 공 이사도 단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가 다시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새로 출시된 TV를 매장에서 보고 욕심을 낸다면요? 그 TV가 거실에 걸리면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삶의 질이 대폭 올라갈 것 같다는 생각을 품게 되지만, 대신 그 TV를 구매함으로서 잃게 될 미래의 이익, 혹은 손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현명하게 생각한다면 자신에게 저 TV를 사고도 여유가 있는지를 따져볼 것이고, 여유가 없다면 구매를 포기하고 다음을 노리거나 혹은 대체제를 찾겠죠.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당장 지갑을 열고 계산대로 달려갈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결정된 사안은 거기에 비교하긴에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오늘 결정된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수익으로 이어질 테니까요.”

“성공한다면, 이라는 조건이 붙으니 문제죠.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도 당연히 상정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부분에 있어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넘어가더군요. 이쪽 계통의 사람들이 대부분 성공만 바라보며 실패의 경우를 백안시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게 이 회사 임원들 내에서도 은연중에 깔려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던데.”

택윤은 약간은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눈썹 끝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말씀드리는 거고요. 제 생각에는 단유 씨가 그런 분위기에 일조한 게 아닌가라는 우려가 들더군요.”

“저요?”

“여기 사람들, 솔직히 너무 편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게 말하면 꿈의 직장이겠지만, 나쁘게 말하면, 좀 심하게 표현해서 어린이집 놀이터 같습니다.”

택윤의 냉정한 비판에 단유는 조금 놀랐다. 그 정도로 나쁜가, 라는 생각을 하며 이유를 되물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오늘 결정된 프로젝트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닙니다. 저처럼 나이 든 사람도 아는 탑급 가수가 회사에 들어왔는데,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겠죠. 긍정적으로 보면 이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도 낮지 않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희망사항일 뿐, 실제로는 어떻게 될지 결과를 봐야 알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유명한 가수라도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니라더군요. 이 바닥 속설처럼 까봐야 안다고, 실제 프로젝트 결과를 미리 짐작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하물며, 그렇지 않아도 빡빡한 예산안이 운영되는 마당에 굳이 지금 새로 예산 추가 승인을 해야 할까요? 차라리 다음 해로 넘기는 게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은 아닐까요?”

단유는 택윤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기에 프로젝트 승인을 한 것이 위험하다는 말인가요?”

“위험하다기보다는 적절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대훈 씨가 말한 것처럼, 지금이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것은 저보다 이쪽 시장에 밝은 대훈씨니까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겠지만, 돈의 흐름을 보았을 때 굳이 지금이어야 할까라는 의문은 듭니다.”

그럼에도 공 이사가 회의 때 그런 의견을 강하게 제시하지 않은 건, 자신이 표면적으로만 ‘이사’로 불릴 뿐, 실제로는 감사직으로 등기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훈의 경영에 직접적인 의견을 내거나 개입하는 건 그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는 처음부터 단유가 부탁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처음 회사 설립 시 대훈 씨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 하셨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대훈 씨의 경영 전략에 대해 이런 의구심을 가져도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 거죠.”

“그런가요.”

마침 그때 카트를 끌고 온 홀 직원이 두 사람 사이에 접시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구수한 갈비탕의 향이 코를 직접 자극했다.

“그거 아십니까? 갈비탕은 핏물과 뼛조각 제거만 빼면 별로 만들기 어렵지 않은 음식입니다만, 핏물을 제대로 빼지 못하면 역한 냄새가 나서 먹기가 쉽지 않아지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제대로 된 갈비탕을 위해선 사전에 준비가 길어야 하는 법이죠. 이 회사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여기 회사 사람들은 단유 씨에게 받은 은혜를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어요. 단유 씨가 넘치도록 자금을 베풀고 이후에도 추가 투자도 서슴지 않겠다 하니, 지루한 핏물 빼기마저 허투루 하고 서둘러 육수에 고기를 담그려 하는 겁니다. 놔두면 역한 냄새가 날지도 모르는 갈비탕이 나오려는 거죠. 그런 겁니다.”

단유는 뿌연 국물 위로 삐죽 솟아있는 갈비뼈를 바라보다 택윤을 바라보았다. 택윤의 안경 위로 김이 서려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요?”

“그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죠. 하지만, 언제나 성공만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건 단발성 성과에 그칠 가능성이 있고, 예산안을 깨뜨리는 일은 습관성 폐습이 될 수 있으니 우려하는 것입니다.”

단유는 택윤의 따끔한 지적을 곰곰이 되짚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택윤도 자신이 꺼낸 말이 있어 이후 입을 닫았고, 덕분에 숟가락을 내려놓을 때까지 조용한 점심 식사가 되었다.

****

보상이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못하지만, 분명 이번에 주어진 것 못지않을 거란 대훈의 장담을 듣고 돌아선 연습생들은 서둘러 연습실로 돌아왔다.

“정말이야?”

“방금 대표님이 그랬다니깐요?”

“뭐지? 설마 방송국 데뷔?”

“에이 설마요. 만약 진짜면 전 포기.”

“왜?”

“무섭잖아요. 실력도 안 되는데.”

“실력이야 천천히 키우면 되고, 난 그래도 데뷔할 수 있으면 좋겠다.”

곧 시작될 레슨을 준비 중이던 아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릿한 통증이 아름을 정신을 깨웠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어. 가수든, 배우든, 뭐든. 위로? 필요 없다. 데뷔만 하면, 무대 아래 카메라가 모두 자신을 향할 것이고, 팬들의 함성이 오롯이 자신에게로 쏠릴 것이다. 그렇게 만들 것이다. 작심삼일이라도 좋다. 잠깐 흔들렸지만 다시 또 각오를 다지고 다시 하는 거다. 속아도 좋다. 또 속는다 해도 희망을 갖자.

‘난 성공할 거야.’

연노랑색의 레슨복 아래를 질끈 묶어 몸에 달라붙도록 만들었다. 이편이 몸을 움직이는 데 편했다.

트레이너가 연습실로 들어오자 사담을 나누던 연습생들은 빠릿하게 정렬하며 트레이너를 향해 인사했다.

“자 오늘부터 오후에는 보컬 트레이닝을 한다. 지난달까지 배웠던 발성 연습은 각자가 꾸준히 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거기에 음정에 맞게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울 거야.”

선천적으로 짧은 성대가 길고 두꺼운 성대보다 고음에 유리하다, 하지만 대부분 짧은 성대를 갖고 태어나지 않으니, 성대가 얇고 길어질 수 있도록 후천적인 훈련이 필요하다는 등의 이론적 설명이 곁들여지며 시작된 수업에서 아름은 눈에 힘을 주고 레슨에 참여했다.

“아름아.”

“네?”

“화났니?”

“아니요.”

“그런데 왜 그렇게 눈에 힘을 주고 있어?”

“아, 네. 그냥 집중하다 보니.”

“지난 발성 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소리를 낼 때는 어디에 힘을 줘야 한다고?”

트레이너가 다른 연습생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힘을 주면 안 됩니다.”

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연습생들의 반응에 트레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처럼 배에 힘을 준다거나, 등에 힘을 준다거나 하는 방식은 소리를 제대로 내는 법이 아니야. 어딘가에 힘을 주는 순간 목소리는 변해버리게 마련이고 어딘가에 무리가 되는 거야. 그리고 아름이가 방금 한 것처럼 눈에 힘을 주고 연습을 하면, 그게 습관이 돼서 나중에 고치고 싶어도 고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는 거야. 습관이란 게 정말 의식 없이 반복하다가 몸에 들러붙는다 말이야. 처음부터 그런 습관은 붙지 않게 주의해야 돼. 오케이?”

지적 받은 아름은 고개를 떨궜다.

“고개 들고.”

“네.”

그래도 붉어진 얼굴은 감출 수 없었다. 다행히 트레이너는 더이상 아름을 붙들지 않았고, 다시 시작된 레슨 동안 아름은 얕은 숨을 반복해 들이마셨다 내쉬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진정시키려 애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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