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무게(2)
-------------- 848/952 --------------
대훈은 외부 약속이 있어 택윤과 점심을 먹기로 했던 단유는 회사 건물을 나가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아, 안녕하세요.”
좀 떨어진 거리였는데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던 시화는 단유가 마주 서서 고개를 숙여주니 입을 길게 늘리며 웃었다. 통통한 볼을 발그레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는 시화의 모습은 여느 팬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지윤과 시율도 함께 인사를 하고 쭈뼛대는데, 마침 지윤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시화가 손에 힘을 줬다.
“응?”
뭔가 물을 새도 없이 시화가 강하게 끌어당기는 바람에 지윤은 시화를 쫓아 달려야 했고, 결국 단유와 마주 보게 되었다. 당황한 지윤의 속내는 모르는지, 시화는 히죽 웃으며 단유에게 물었다.
“이사님, 점심 드시러 가세요?”
“아, 네.”
“우리도 점심 먹으려고 하는데.”
“아, 네.”
“우린 편의점에서 사 가지고 연습실에서 같이 먹기로 했어요. 도시락 싸온 언니들도 있거든요.”
“아, 그래요?”
“네! 그래도 먹고 나서 청소 다 할 거니까, 연습실 더럽게 하진 않을 거예요.”
단유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근데요, 이사님?”
“네?”
“이사님 혹시 사인 있어요?”
“사인이요?”
“있으면 사인해주시면 안 돼요?”
“저요? 왜요?”
“이사님 사인 받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그게 왜 받고 싶냐는 물음이었던 건데, 눈을 반짝이며 단유를 올려다보는 시화는 전혀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이었다. 단유는 옆에 서서 난감해하는 지윤을 바라보았다.
“아, 그게··· 아마도 이사님이 예전에 뮤직비디오 나오시기도 했으니까, 그러니까 시화한테, 아니 저희한테 이사님이 마치 연예인 같달까? 그런 기분으로 물은 걸 거예요. 아마.”
단유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지난 주말, 잠시 방심했던 결과가 이리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오전 중에 직원들이 단유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때도 그랬지만, 막상 앞에 달려와 사인해 달라는 시화를 보니 뒤늦은 후회, 라는 심정이다.
그러다 뒤에서 여전히 쭈뼛대는 시율과 눈이 마주쳤다. 시율은 얼른 고개를 숙였지만, 단유는 그것이 단지 부끄러워서만이 아님을 알아챘다.
“무슨 일 있어요?”
“그게요, 지난 주말 동안에요, 이사님이 옛날에 불렀던 노래도 찾아 듣고 뮤직비디오도 찾아보고 그랬거든요? 이사님 어릴 때 되게 멋있어가지고요, 지금도 멋있으시지만, 옛날에 이사님 어릴 때는 더 귀엽고 멋있고 그래가지고요.”
단유의 질문을 사인에 대한 것으로 이해한 시화의 엉뚱한 대답에 단유는 고개를 저은 뒤 재차 물었다.
“아뇨. 지윤 씨도 그렇고 시율 씨도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아서요. 혹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 물었던 겁니다.”
그제야 이해한 시화가 입술을 안으로 말며 입을 닫고, 대신 지윤이 단유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까 월평 결과 발표를 했는데, 그것 때문인 거 같아요.”
“아.”
단유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지윤은 뒤에 서 있던 시율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시율이 되게 열심히 했거든요.”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따르지 못해 실망했다는 지윤의 말에 단유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요. 시율 씨는 예비 평가 때보다 훨씬 연기가 좋아졌던걸요.”
단유의 칭찬에 시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월말 평가까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도 좋아진 것을 보면 분명 노력했다는 증거겠죠. 저 개인적으로는 다음 월말 평가 때 더 좋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길 한가운데서, 우연히 만난 단유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터라, 잠시 반응을 못하던 시율은 이내 눈시울이 뜨거워져 다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 모습에 시화가 ‘언니’를 외치며 조르르 달려가 시율을 폭 안았다. 등을 토닥이는 모습을 보던 지윤은 단유를 향해 고마움을 전했다.
“감사해요, 이사님.”
“뭘요. 그냥 느낀 대로 말한 것 뿐인데. 지윤 씨도 잘했어요.”
“아.”
“지윤 씨도 짧은 시간 동안 발전했어요. 다만 긴장을 너무 했던 탓인지 발음이 잘 들리지 않았고, 그래서 대사 전달력이 떨어졌던 게 흠이었을 뿐이었죠.”
“아, 네···.”
“그래도 표정 연기나 감정을 싣는 느낌은 꽤 좋았어요.”
“하하, 네. 감사합니다.”
지윤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만약 다음에도 이런 행사를 한다면 기대할게요. 다들 열심히 해주세요.”
“저기, 이사님!”
“네?”
“혹시 저는 뭐 없나요?”
혹시 자신에 대한 것도 기억할까, 기대하는 시화였다.
“시화 씨는 목소리 힘이 참 좋았어요. 다른 연습생들보다 훨씬 힘이 넘치는 바람에 조금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면도 있지만. 그리고 시화 씨는 가수 지망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연기 쪽에도 소질이 없진 않구나, 라는 걸 느낄 수 있는 무대였다고 다른 분들이 평가하더군요. 저 역시 비슷한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단유는 손을 살짝 들어 인사를 받아주었다.
“점심들 맛있게 먹고 계속 힘내주세요.”
“네, 이사님!”
단유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자리를 떠났다.
****
“정말?”
지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화를 바라보자, 시화가 고개를 열정적으로 끄덕였다.
“정말요! 이사님이 나보고 소질 있네, 라고 하셨다니까요. 그쵸, 언니?”
빨대를 물고 있던 지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뭐,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시진 않으셨지만, 비슷한 의미긴 했어.”
“와, 부럽다. 완전.”
함께 듣고 있던 슬기도 부럽다며 시화의 등을 두들겼다. 시화는 몸을 비틀면서도 기분 나쁘지 않다는 듯 해맑게 웃었다.
“나, 팬미팅 간 기분이었다니까요!”
과자를 하나 집어든 채로 광분하던 시화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아쉬워했다.
“핸드폰이 있었으면 같이 사진 찍자고 했을 텐데.”
“오버다, 그건.”
“나 이제 진짜 우리 이사님 팬 할거예요. 이사님, 너무 멋져. 완전.”
그리고 동생들의 이야기를 듣느라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던 아름은 그제야 재생버튼을 눌렀다. 피아노 음률이 잔잔히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단유가 했다는 이야기가 맴돌았다.
어쩌면 그저 연습생들을 가엽게 여겨 예의상 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아름은 그런 응원이 절실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때까지 그녀는 주변의 관심을 받는 데 익숙했다. SNS도 그래서 일찍 시작했고, 축복받았다 일컬어지는 그녀의 외모는 SNS 속 인기를 크게 올려주었다.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 건, 솔직히 늦은 나이였지만 그래도 나름 많은 고민과 성찰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모두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고 싶다는 욕망과 자신의 장점이 외모에 있다는 객관적(!) 판단에 따라 기획사 오디션을 보았고, 당당히 합격했다.
작은 기획사, 라는 건 흠이 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한 달여가 지나면서부터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다. 신생 회사라지만 깔끔한 건물과 센스있는 내부 인테리어는 아침 출근을 즐겁게 만들었고, 훌륭한 트레이너들과 애교 넘치는 동기 연습생들과 만나 배우는 자리는 자신감을 키워주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아름은 점점 불안해졌다.
자신이 어렵게 잡았다 생각했던 기회를 누군가는 손쉽게 얻어가고, 눈앞에 있다 생각했던 기회는 자신보다 훨씬 예쁘고 어리고 재능 많은 동생이 가져갔다. SNS에 하소연도 할 수 없는 것이, 입사 이후 일괄적으로 SNS를 막았기 때문이며, 연습실에 있는 동안에는 핸드폰을 쓸 수 없어 고작 왼손에 들려 있는 오래된 음원 플레이어가 전부. 맏언니라 어리광을 피울 수도 없고,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상대도 없었다.
‘이것도 성격 문제일까.’
SNS로는 속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직접 대면하고 말하기엔 뭔가 어렵다.
동생들과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어도, 왜인지 동생들은 아름에게 말을 잘 걸지 않았다. 눈치를 보는 거 같은데 왜 눈치를 보는지는 모르겠고, 그래서인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도 하지 않는, 아니 못하는 것처럼 보여 괜히 신경이 쓰인다. 그래서 조금 떨어져 앉았더니 자기들끼리 하하호호 즐겁다.
연습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월말 평가 전까지도 어려웠던 연습이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오늘 안무 기본기를 배우는 과정은 결코 즐겁지 않았고, 한번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접었다 폈다 할 때마다 이마에 주름살이 하나씩 느는 기분이었다.
거울 속에서 인상을 쓰고 자신을 바라보면 이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던 못생긴 자신이 보이고, 고장 난 마론인형처럼 삐거덕거리는 자신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슬픈 음악을 듣고 있기 때문에 더 울적한 걸까?
“언니!”
그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고 바라보니 이제 갓 20살이 된 슬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폰을 귀에서 빼며 물었더니, 같이 카페테리아 가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아니, 난 괜찮아. 너희들끼리 가.”
같이 가자고 한 번 더 조르지 않고, 슬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슬기가 고개를 돌렸고, 아름은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이게 외로움, 이란 거구나.
****
“아름 언니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가? 혹시···?”
계단을 오르며 슬기가 넌지시 운을 떼자, 보민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아닐 텐데요? 저랑 날짜 비슷해서 기억하는데요.”
“그럼 뭐지?”
슬기보다 한 살 많지만, 슬기가 빠른 년생이라 친구처럼 지내게 된 지서가 대꾸했다.
“그냥 그런 날도 있는 거지. 언니라고 항상 밝을 수는 없잖아.”
슬기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했으나 주위에 동생들도 있는 자리라 참는 모습이었다. 지서는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채린이는 왜 안 돌아오지? 오늘 연습 안 하나?”
“부럽다, 채린이. 나도 광고 찍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채린보다 한 살 많은 경빈은 배우 지망이라 특히 경빈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역시 안무 연습을 많이 부담스러워했다.
“연습 안 해서 부러운 건 아니고?”
지서가 되묻자 전혀 그런 거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요, 언니. 우리 정말 이것 저것 다해야 해요?”
보민을 바라보며 묻는 경빈의 물음에 보민은 경빈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왜? 하기 싫어?”
“하기 싫다기 보다는, 굳이 이렇게 안무까지 연습해야 하나 싶어서요.”
보민과 경빈은 배우 지망이었고, 특히 경빈은 예고 연기과라 특히 배우 쪽으로 확실한 노선을 걷고 싶어 했다.
“요즘은 배우나 가수의 구분이 불분명하잖아?”
보민의 말에 지서가 덧붙였다.
“가수로 유명세 얻고, 그걸로 연기를 하면 더 빨리 성공할 수 있지.”
경빈은 고개를 저었다.
“전 그런 거 별로라고 생각해요. 연기가 좋으면 연기만 해야지, 무슨 유명세에요? 자기 연기에 자신이 있으면 그렇게 둘러갈 필요가 없다고 봐요.”
“그래도 이번 월평 1등은 채린인데?”
“언니!”
“농담인 거 알지?”
“저도 아직 제가 부족한 거 알거든요? 그러니까 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안무 같은 거 배울 시간에 연기 쪽으로 더 하드하게 트레이닝 받으면 좋겠다고.”
계단을 마저 올라 3층 비상구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왼편에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직원들과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몇몇이 기억한다는 듯, 연기 잘 봤어요, 라고 말해주면 연습생들은 감사합니다, 라고 웃으며 대답하고 카페테리아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목소리로 ‘뭐 마실래?’ ‘나, 이거요’ 라고 속삭이듯 의견을 교환한 후 디스펜서에서 음료를 내렸다.
“이야, 너희들 먹을 복 있다.”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대훈이 히죽 웃으며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조금 전 속삭이던 것과 달리 크고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는 인사가 이어졌다.
“아, 그래. 마침 잘 왔네. 밖에 나갔다가 혹시나 해서 사 들고 온 건데, 먹을래?”
가끔 이렇게 밖에서 맛있어 보이는 디저트나 간식거리를 사와 카페테리아에 두면 쉬러 나온 직원들이 집어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대훈만의 서비스였다.
“우와, 이거 저희 주시는 거예요?”
딱히 너희들을 위한 건 아니었어, 라며 하하 웃는 대훈의 응대에 연습생들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너희들, 이번 평가 무대 어땠어? 많이 힘들지 않았어?”
“괜찮았어요.”
“정말?”
“···아뇨,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요.”
“하하, 그래? 그럼 다음에 또 하자고 하면 못 하겠네?”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또 할래?”
“······.”
“대답 못 하네? 어떡하지? 다음에 또 하면 또 좋은 기회가 있을 수 있는데.”
“정말요?”
“음, 미리 귀띔해 주자면, 이번엔 더 좋은 선물이 있을 거야.”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한 장난기 많은 아빠같은 표정을 한 대표 앞에서, 연습생들은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긴장된 표정으로 대훈을 바라보는 연습생들의 반응에 대훈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역시 어떤 일이든 보상이 주어져야 동기가 분명해지고 효율이 올라간다. 만고불변의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