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47화 (847/956)

꿈의 무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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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내내 이어진 트레이닝에 모두들 땀에 흠뻑 젖었다. 기운 내보자고 파이팅을 외치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 가수는 못 하겠다.”

배우 지망이었던 보민이 숨을 헐떡이며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기본기라며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게 전부였지만, 그 간단한 안무도 쉬지 않고 1시간여를 하다 보니 온 몸에 알이 배어 앉아 있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언니, 힘내요.”

막내 시화가 눈을 찡긋거리며 다가와 얇은 손가락으로 종아리를 조물락거려주니 간지럽다며 겨우 웃음을 터뜨리는 보민이었다.

“넌 정말 잘하더라.”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고개만 살짝 들어 시화를 바라보았다. 젖살이 통통하게 올라있는 시화는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전 어렸을 때부터 춤추는 거 좋아했거든요.”

“수련회 같은데도 나가고 그랬어?”

“초등학교 때 수련회 장기자랑하러 나가고 그랬죠.”

“초등학교라니. 새삼 니가 어리다는 게 실감나네.”

초등학교 졸업한 지 ‘6년’이나 지난 보민의 소회에 시화가 풋, 실소를 머금었다.

“언니랑 저랑 4살 밖에 차이 안 나거든요?”

“너 초등학교 6학년일 때, 난 고1이었다.”

“얘들아, 나도 있거든?”

불쑥 끼어든 지윤 때문에 왁, 하고 웃음이 터졌다. 16살인 시화와 지윤은 6살 차이.

“그리고 우리 되도록 나이 이야기는 하지 말자. 큰 언니 마음 상한다.”

지윤이 아름을 향해 눈을 찡긋 해 보이자, 이마에 붙은 앞머리를 떼어내며 땀을 닦던 아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멕이는 거니, 챙겨주는 거니?”

“당연히 언니를 생각해서죠. 제가 언니 엄청, 엄청 좋아하는 거 알죠?”

“어쩌겠니. 이 나이에 들어온 내가 죄지.”

“그렇게 말하니까 더 나이든 것 같잖아. 그런 말 마요.”

“알지? 너랑 나 2살 차인 거?”

“히잉.”

통합 B반의 두 큰 언니의 나이 배틀을 보며 아이들은 미소를 지었다. 자기들도 힘들 텐데, 동생들 힘내라고 애써 저리 농담을 한다. 친하게 지내자며 통성명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같은 꿈을 향해 달린다는 동지애로 뭉쳐 서로를 돕고 위로하며 하루하루를 함께 하다보니 벌써 깊이 정이 들었다.

레슨이 끝나고 잠시 틈이 난 사이에 그렇게 모여서 쉬고 있을 때, 벌컥 문이 열리며 연습실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예의 매니저였다. 드러누웠던 보민이를 포함하여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매니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됐어, 그냥 계속 쉬어. 쉬면서 듣도록 하고.”

뭔가 알려줄 게 있다며 들어오면, 괜히 긴장하게 되는 연습생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난번에 예고 없이 연습실에 들어왔을 때, 그는 기존에 없었던 월말 평가가 준비되었다고 발표했었다. 이번에도 그런 충격적인 발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지레 겁부터 먹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어느새 시율 옆에 채린이 다가와 몸을 기댔다. 시율은 그런 채린의 어깨를 감싸며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월말 평가 결과가 나왔다.”

몇몇이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가 분위기를 느끼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긴장한 얼굴로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매니저의 입만을 주시하는 아이도 있었다.

“먼저, 이번 월말 평가 준비하느라 다들 수고했었다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갑작스러운 무대에도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아니까. 그만큼 멋졌고, 다들 잘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서로에게 수고했다고 박수 쳐 주자.”

와, 하는 탄성과 함께 박수를 쳐 주는 아이들, 아름은 곁에 앉은 지서와 슬기의 어깨를 감싸주고, 시율은 채린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보민은 경빈의 허리를 감싸고 흔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자, 그리고 이전에 말했듯이 이번 월말평가에서 1등을 한 사람에겐 광고 출현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지? 어떤 의미에서는 기회일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희들이 앞으로 가야 할 곳은 더 크고 높은 세계니까. 그렇지?”

“네!”

“그러니 설령 1등을 못 했다고 좌절하지 말고, 1등 한 친구는 너무 들뜨지 말길 바란다.”

“네!”

“그럼 발표하겠다.”

“······.”

이게 뭐라고.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매니저의 얼굴만 뚫어져라 보는 8명의 아이들.

“1등은···, 양채린.”

“우와!”

발표와 함께 손을 번쩍 드는 시율. 그리고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의 채린.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아이들. 축하해, 라고 해맑게 웃으며 박수를 보내는 연습생과 감추지 못한 감정을 드러내기 싫어 입꼬리가 떨리는 연습생.

“채린이는 비록 가수 지망이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던 결과가 반영된 모양이다. 잘했어.”

“감사합니다.”

일어나서 매니저에게, 그리고 다른 연습생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는 채린이었다. 연습실이 떠나가라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연습생들은 축하한다며 채린의 등과 종아리, 팔 할 거 없이 두드릴 수 있는 곳은 모두 두드려댔다.

잠시 그들에게 기쁨을 나눌 시간을 준 매니저는 곧 그들을 제지했다.

“자, 조용. 채린이는 지금 바로 나랑 4층 회의실로 가야 돼. 기획팀장님한테 앞으로 계획을 들어야 하니까, 얼른 준비하고.”

채린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후, 시율과 잠시 시선을 교환한 뒤,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이후 잠잠해진 연습실. 마룻바닥에 주저앉은 연습생들과 마주 선 매니저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남은 연습생들을 둘러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커리큘럼 바뀌었지? 본래 지망이 뭐였든, 아마 이번 달부터가 진짜 힘들 거야. 보니까 벌써 힘들어 죽을라는 녀석도 보이는데.”

울상을 짓는 몇몇을 보며 매니저는 눈을 부라렸다.

“지난달에 대본 외우느라 죽겠다고 했었지? 차라리 그때가 나았다고 생각하는 애들도 있을 거다. 그런데 배우 지망이든, 가수 지망이든 상관없이 많이 힘들 테니까, 전에 말한 것처럼 서로 도울 수 있으면 돕고 서로 격려하면서 레슨에 충실하길 바란다. 알겠지?”

아이들의 힘 빠진 대답을 들으며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월말 평가는 말 그대로 월말 평가야. 물론 중요한 평가이고 거기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사람은 분명 반성해야 할 거야. 하지만 1등을 못 했다고 해서 지레 낙담하지 말기 바란다. 이건 너희들이 앞으로 달려야 할 지루한 마라톤의 첫 시작과 마찬가지니까. 너희들은 아직 제대로 달리지도 않았어. 반환점 따위도 아니고 이제 겨우 출발선에서 발을 뗀 거야. 그러니까 너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완주에 목표를 둬라. 다들 들어봤겠지만, 살아남은 사람이 강한 거야.”

매니저의 훈계는 말 그대로 이번 평가는 ‘고작’ 평가일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마치 학교에서 주마다, 혹은 월마다 보는 쪽지 시험 같은. 설령 점수를 좋게 받지 못했다고 해도, 1등을 하지 못했다고 해도 거기서 끝이 아니니 계속 분발하란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을 테다.

매니저가 채린을 데리고 나간 후, 연습실엔 정적이 내려앉았다. 신발 끈을 다시 묶는 아이들, 전면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거나 괜히 수건을 펼쳤다가 다시 접어서 정리한다든지 하며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머리로는 매니저의 이야기를 이해하지만, 역시 기회를 받지 못했다는, 그래서 제외되었다는 상황 때문에 오는 탈력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점심 먹어야지. 일어나자.”

지윤이 씩씩하게 일어서며 옆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등을 토닥였다.

“저, 도시락 싸 왔는데.”

“나도.”

“그래? 그럼 기다릴래? 도시락 안 싸온 사람들은 편의점 가서 먹을 것 좀 사 와서 같이 먹자. 어때, 경빈아?”

“네, 그래요.”

“그럼 얼른 일어나, 자!”

“넵!”

지윤의 기운에 동화된 듯이 히죽 웃으며 일어서는 경빈이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쉽지 않은 듯 보였다. 특히 보민이는 그랬다. 여전히 종아리가 아프다는 듯 무릎을 세우고 종아리를 제 손으로 주무르고 있지만, 심란해 보이는 눈빛에 차마 위로도 못 하겠다. 그런 보민을 전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녀는 배우 지망이었고, 특히 현재 연습생들 중에서는 가장 연기를 잘한다고 트레이너에게 칭찬도 받았던 이였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다소 소극적이었던 게 평가에 마이너스였던 것인지, 그녀는 1등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가수 지망이었던 채린이 1등이 되어 광고 출현의 기회를 가져갔다. 박탈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윤은 고개를 돌렸다. 연습실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아름. 그녀보다 2살이 많으며 연습생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축이지만, 그래도 고작 24살. 그녀 역시 배우 지망이었고 그래서 지난 두달 간 누구보다 열심히 레슨에 임했던 모습을 지윤은 기억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

지윤 본인은 어차피 가수 지망이라, 비록 자신도 광고 출현이란 미끼가 탐이 났지만, 이렇게 결정된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게다가 채린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외모로만 따지면 사실 이중에서는 나름 탑인 채린이었으니까.

그러나 채린은 가수 지망이었기에, 배우 지망이었던 아름과 보민, 경빈은 평가에서 1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심 충격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노래와 춤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1등을 차지하지 못했다면, 그땐 자신이 저런 모습일 테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기운 빠진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 유지되면 다음 레슨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지윤은 다시 씩씩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챙겼다.

****

지윤과 함께 편의점을 나서는 사람은 시율과 시화, 두 사람이었다.

“채린 언니는 좋겠다. 그쵸?”

시화가 정말 부럽다는 듯 눈꼬리를 떨어뜨리며 물었다.

“부러워?”

“부럽죠, 당연히. 언니는 안 부러워요?”

“솔직하게 말하면 부러워 미치겠다. 근데 어떡해? 난 내가 생각해도 무대를 못 했는데.”

“하긴 언니는 무대를 너무 못했어.”

“이게, 오냐오냐 하니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우리 막내 오늘 혼 좀 나 볼래?”

“죄송해요, 언니!”

라고 대답하며 까르르 웃는 시화의 표정에 지윤도 덩달아 웃었다. 그러다가 시화 뒤에서 따라오는 시율에게로 눈이 갔다. 통합 B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시율은 채린을 정말 좋아했다. 그리고 그 무뚝뚝한 채린도 시율을 좋아했고. 그래서 두 사람은 무슨 사이냐고 장난처럼 몰기도 했었다.

그랬는데, 지금 시율의 표정은 꽤 울적해 보였다. 그래서 지윤이 물었다.

“왜 그래, 시율아?”

“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신의 평가가 좋지 못했다는 사실에 낙담한 것일까? 지윤은 다시 시선을 돌려 시화를 바라보았다.

“오늘 점심 맛있는 것 좀 많이 사와야겠다. 생각난 김에 아예 파티를 열까?”

“파티요?”

시화가 되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시화의 통통한 볼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지윤은 웃었다.

“편의점 털어서 간식 파티를 여는 거야. 좋지?”

“네, 좋아요!”

얘도 가만 보면 꽤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다. 현재 회사에 소속된 연습생들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시화지만, 늘 언니들 눈치를 보면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변에 마구 뿌리는 아이였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매일 매시간 긍정적일 수 있을까? 그런데 시화는 지친 척 ‘죽겠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애교를 부리고, 언니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거나 하면서 다른 사람을 챙기고 마음을 살핀다. 그런 탓에 지윤은 저도 모르게 시화를 먼저 챙기게 된다.

그리고 시화 못지않게 다른 사람들을 잘 챙기는 연습생이 있다면 바로 시율이었다. 꽤 스킨십을 좋아하는지, 동생들은 물론이고 지윤이나 아름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껴안고 팔짱을 끼는 등 친해지려는 노력을 많이 하던 아이였다. 사실 지윤은 그런 스킨십이 별로 익숙하지 않았는데, 시율이 다가와 팔짱을 끼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평소 시율도 눈이 많이 가는 아이였는데, 오늘 아침까지도 헤죽헤죽 웃으며 자기 딸처럼 챙기던 채린이를 옆에 끼고 있더니만, 매니저의 방문 후 눈에 띄게 우울해 보였다.

“다들 결과 때문에 기분이 많이 다운된 거 같은데, 달달한 거 잔뜩 사서 먹자. 그러면 기분이 좀 좋아질 거야. 오늘은 내가 쏜다!”

“오예! 그럼 다 쓸어 담아야지!”

시화가 지윤의 말에 맞춰 주먹 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다 곧 검지를 펼쳐 앞을 가리켰다.

“어? 이사님이다!”

지윤과 시율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가니, 과연 단유가 맞은 편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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