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46화 (846/956)

평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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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언니. 이것 좀 봐요.”

막내인 시화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조르르 달려왔다.

“아직도 옷 안 갈아입었어?”

연습복으로 갈아입던 시율이 되묻자, 조금 있다 입겠다며 그보다 이거 좀 보라며 핸드폰을 흔들어댔다.

“나 또 발굴했어요.”

‘발굴’이란 단어에 시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 있어?”

시화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이것 봐요. 되게 어릴 때래요.”

시화가 들이댄 핸드폰 속에는 어린 시절 단유의 옆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 듯한 모습인데, 몰래 찍은 것인지 아니면 컨셉으로 구도를 잡고 찍은 것인지 헷갈린다. 하지만 그의 외모는 헷갈릴 게 없이 딱 시율의 취향이었다.

“우와, 완전 지금이랑 똑같애. 똑같은데 어린 모습? 이사님은 어렸을 때도 잘생겼구나.”

“엄청 인기 많았을 거 같애, 그죠?”

토요일에 단유의 과거를 알게 된 연습생들은 단유의 또 다른 과거를 찾기 위해 주말을 불태웠다. 각자의 집에서 컴퓨터를 붙잡고 SNS를 뒤지며 단유의 과거를 찾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과사(과거 사진)가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찾은 것들을 연습생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단톡방에서 공유하다가 ‘발굴’이란 표현이 쓰이게 되었다.

“이런 데 왜 안 유명했지?”

찾은 것만 따져도 꽤 조회수가 높고 개별 게시물마다 좋아요 수도 많았다. 이를 토대로 보면 충분히 유명세를 떨칠 만하다 싶은데, 왜 자신들이 모르고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니까요. 우리 엄마한테 보여주니까, 누구냐길래 우리 회사 이사님이라고 하니까 연예인이냐고 하더라니까요.”

“이사님 정도면 홈마로 전직해서 맨날 쫓아다녔을 거야.”

“언니가 홈마면, 전 팬매할래요.”

“왜?”

“우리 이사님 지켜야죠. 악팬이실지도 모르는데.”

“야!”

그때 채린이 옷을 다 갈아입고 다가왔다.

“수빈아, 얼른 옷 입어. 시간 다 됐어.”

“아, 네.”

시율은 머리를 정리한 후 얼른 일어나 탈의실을 나가는 채린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오늘도 우리 채린이는 상큼상큼하네?”

“왜 그래요? 갑자기?”

시율은 자신보다 2살 어린 채린이 귀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어깨에 걸친 팔을 흔들었다.

“좋아서 그러지!”

서로 알게 된 지 반년도 되지 않았지만, 사실 친해지는 데는 1달도 길다. 물론 친해지게 된 것은 통합반으로 구성된 후, 통합 B반에서 함께 레슨을 받으며 친해졌지만 그 전부터 시율은 채린이 좋았다. 성격 이전에, 일단 채린의 외모가 주는 상큼함과 귀여움은 같은 여자인 시율이 봐도 충분히 합격점이었다. 게다가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은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시크함이랄까. 평소 무심한 듯한 인상이지만, 짓궂게 장난을 쳐도 싫은 내색 않고 다 받아주며, 다만 약간 곤란한 듯 미간에 주름을 만드는 모습까지도 시율은 보기 좋았다.

가식 없는 성격에 함께 레슨을 받으며 생긴 동질감이 그녀에 대한 호감도를 상승시켰다.

‘이렇게 따지면 내가 일방적으로 얘를 좋아하는 셈인가?’

하지만 채린도 시율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쉬는 시간 때마다 시율의 옆으로 다가와 몸을 붙이지 않을 테니까.

“이사님 과사 봤어?”

“조금요.”

“역시 찾아봤구나.”

“언니들이 항상 먼저 찾아서 톡에 올려주잖아요?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죠.”

새벽까지도 알림이 뜨는 걸 보며 이 언니들 위험하다는 생각까지 했다는 채린의 표정을 보며 시율은 키득거렸다. 역시 귀엽다, 라고 생각하며.

연습실에 들어가니 예상했던 바지만, 역시 몇몇을 중심으로 노트북 주위에 모여 있었다.

“가자.”

시율은 채린의 손목을 붙잡고 무리지어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못 이기는 척, 털털 따라오는 채린은 무표정 속에서 눈을 반짝이며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떼지 못한다.

하지만 채린을 데리고 갔던 시율은 오히려 노트북보다 다른 곳에 시선이 끌렸다. 홀로 연습실 벽에 기대고 앉아 이어폰을 끼고 있는 아름의 모습이 보여, 시율은 보다 먼저 연습실에 와서 노트북을 보고 있던 경빈의 어깨를 툭툭 쳐 주의를 끌었다.

“언니, 무슨 일 있어?”

경빈은 시율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언니, 원래 레슨 전에 음악 듣잖아요.”

평소와 같았다면 이리 물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평소보다 훨씬 처진 분위기에 슬쩍 보이는 눈빛도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시율이 지레 그리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끔 그럴 때가 있잖은가. 아무것도 아닌데도 과도하게 의미 부여하며 다르게 보려는 것. 어쩌면 지금 이사님이 이전과 달라 보이는 것과 비슷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경빈의 말처럼 평소와 같은데 괜히 오해를 하는 것일지도.

시율은 아름의 분위기를 살피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 속에서 따라 웃기 시작했다.

레슨이 시작하기 전까지 그렇게 시간을 때우다 트레이너가 연습실로 들어오면서 그들의 짧은 유희는 끝이 났다.

****

“채린이는 그렇게 진행하면 되겠네요. 다른 의견 있으십니까?”

워낙 기획팀에서 준비를 잘한 탓에 딱히 다른 의견이 나올 게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 자리에서 그런 사소한 문제를 두고 의견을 나눌 일은 아니었다. 단지 보고가 제대로 되는지만 확인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김 팀장?”

“네, 대표님.”

“다른 이야긴데요.”

“네.”

“혹시 이번과 같은 월말 평가, 다음에도 계속 할 수 있겠습니까?”

대표의 질문에 팀장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따지자면, 대표가 하라면 해야 하는 입장인데, 저리 묻는 의도가 뭘까를 먼저 고민해 보는 것이다. 직장 상사의 질문에 의중을 파악하여 현명한 답을 제시하는 것은 부하 직원의 도리다.

“매달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겠습니다만, 준비만 잘 된다면 정기적으로 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선 선결되어야 할 문제라면, 역시 비용입니다.”

돈 이야기를 겨우 벗어났다 싶으면 언제나 그랬듯이, 그리고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돈 이야기로 회귀한다. 대훈은 손가락을 굽혀 관절 부위로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비용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제대로 준비를 하려면 이번처럼은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실 이번 기획을 준비하며 기획팀은 물론이고 지원을 해준 다른 팀들도 과하게 혹사를 한 면이 있습니다. 주어진 시간도 짧았고요.”

“그건 대표로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즉흥적인 면이 있었어요. 하지만 조금 전 사원들의 평가서를 보니까, 이 행사가 회사 내부에 꽤 긍정적이라는 점에서, 대표로서 욕심이 안 낼 수가 없네요.”

사과하는 대훈의 손에는 전 사원들의 무대 평가를 한눈에 보기 좋도록 깔끔하게 정리된 문서의 복사본이 들려있었다. 돈 이야기가 나오는 동안 잠시 한눈 팔며 살피기에 적당해서 대훈은 회의 중에 틈틈이 읽어내려갔었다.

“시간이 좀 더 주어지고 비용도 충분하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은 드물다.

“다만 여기에 첨언을 하자면, 무대의 완성도 역시 끌어올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아무리 연습생이라도, 그리고 평가를 위한 무대라 하더라도 기본적인 무대 자체의 완성도가 떨어지면 관객의 입장에서 보고 있기가 힘드니까요.”

기본적으로 사원들에게 연습생들의 무대를 평가해야만 하는 의무는 없다. 그들은 비록 대표의 요청―이라고 쓰고 ‘지시’라고 읽는다―을 받아 참석한 이들이니 말이다.

“그건 무대 구성의 문제가 아닐까요? 아직 연기가 익숙치 않은 아이들도 있고, 연기가 능숙하다 하더라도 1인극으로 5분여의 무대를 오롯이 혼자 이끈다는 건 전문 배우라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맞습니다. 그런 점도 감안을 해야 했지만, 지난달까지 준비되었던 커리큘럼이 그런 연기를 배우는 것이었으니 임의로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시간도 없었고. 하지만 만약 다음 평가를 이런 식으로 한다 하면 미리 준비를 해야 할 테죠.”

“알겠습니다. 그런데 계속 연습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엔 자리가 자리니만큼 이쯤에서 줄여야겠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주제로 회의를 길게 끄는 건 예의가 아니다. 대훈이 그쯤에서 이야기를 멈추도록 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연습생 커리큘럼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려면 역시 저희들만으로 어려우니, 다음 회의 기타 안건 상정 시 트레이너 한분을 모셔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팀장의 즉석 제안에 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다음 회의 기타 안건 중 하나는 정해진 거군요.”

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혹시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 분 계신가요?”

다들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지 침묵을 지키거나 눈이 마주치면 살짝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럼 이쯤에서 회의를 마치도록 하죠.”

****

“아, 힘들다.”

대훈은 단유와 함께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랄 거까지야. 전 그냥 듣기만 했는데요.”

“저도 듣고만 있었는데 여간 쉬운 일이 아닌 거 같아서요.”

단유의 대답에 대훈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럼 단유 씨한테도 수고했다고 말해야겠네요.”

“하지만 전 대표님보다는 편하죠. 전 결정권자도 아니고 책임도 지지 않으니까요.”

대훈은 찬장에서 컵을 두 개 꺼내 단유에게 하나를 건네며 대꾸했다.

“하지만 돈 냈잖아요. 원래 돈 낸 사람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법이거든요.”

“대표님도 빚을 내지 않으셨나요?”

“빚냈죠. 빚냈으니까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거죠. 분명히 처음에는 절대 조급해지지 말자 했는데, 시간이 걸려도 튼튼하고 안정적인 회사를 만들자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괜히 조급해져만 가니까. 어떻게 하루도 돈 걱정을 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일까요?”

“신생 회사는 초기에 돈 나갈 일밖에 없다 하신 분은 대표님이십니다.”

“그렇죠.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계속 적자만 나면 버티기가 힘든 거죠. 여기가요.”

한 손으로는 머리를 가리키고, 다른 한 손은 커피가 든 컵을 입에 가져다 댔다. 커피 머신에서 갓 뽑은 구수한 커피에서 약하게 달달한 향이 피어올랐다. 대훈은 그것을 운치, 라고 불렀다.

“그래서 단유 씨를 보면 힘이 납니다.”

“왜요?”

“돼지 저금통 보는 기분이랄까요?”

“······.”

“농담입니다. ···농담은 농담으로 받으시라니까요?”

“제가 따로 농담을 잘하는 학원이 있는지 알아봐 드릴까요? 아니면 제가 따로 수강할 학원을 알아봐야 하는 걸까요?”

“괜찮습니다. 하하.”

라고 멋쩍은 웃음을 흘리던 대훈은 표정을 고치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빨리 수익이 날 수 있는 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요즘 잠을 설칠 정도입니다.”

“그 광고 건도 대표님께서 직접 받아내신 거라면서요?”

“제가 한 능력 하잖습니까? 하하. 아무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준비는 거의 끝났어요. 지금 추진 중인 배우 영입과 시은의 새 프로젝트 앨범 구상도 마무리가 보이고요, 작곡가 팀도 외부 의뢰건이 있어 한동안 바쁠 테지만 그게 다 수익 아니겠습니까?”

“돈 많이 버시길 바랄게요.”

“그게 어디 제 돈만이겠습니까? 1대 투자자님의 수익 반영에 보탬이 되도록 해야죠.”

“응원하겠습니다.”

“응원만 마시고, 아! 기왕 알려진 거 데뷔는 어떠십니까?”

“사양하겠습니다.”

단유의 빠른 대답에 잠깐 헛웃음을 흘린 대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커피를 즐기는 듯 싶더니 피식 웃음을 흘리기에 단유가 돌아보자,

“혹시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라고 묻는다.

“무슨 후회요?”

“저에게 대표직을 맡긴 일이요.”

“대표님이 아니면 누가 대표직을 맡나요?”

“글쎄요. 오늘 회의에서도 그렇고 평소에도 느끼는 바지만, 전 현장이 적성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차라리 대표가 아니라 영업 이사 정도라면 적당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고, 지금의 자리가 영 과분하단 생각도 들고 그렇네요.”

“충분히 잘하고 계신다, 고 공 이사님이 말씀하시더군요.”

“그분은 사람의 좋은 면만 보려고 하시니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공 이사님은 돈 문제가 관련되면 누구보다 깐깐하고 까다로우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대표님을 잘하고 있다 하면, 정말 잘하고 있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훈은 단유의 대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그래도 그런 평을 듣는 게 기분은 좋은지 입술을 씰룩거렸다.

“잘 모르지만, 저 역시 대표님께서 잘 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근거는요?”

“회사 사람들의 표정이 다들 밝으니까요. 회의 시간에도, 비록 지금이 적자라 해도 다들 표정이 밝잖아요? 희망이 있다는 뜻이겠죠.”

“희망이라.”

대훈은 그 단어를 입에서 굴리다가 커피와 함께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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