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44화 (844/956)

평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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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여기서 만난 거지?’

라는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스키니진의 허벅지 부근을 정처 없이 헤매는 손의 움직임이 단유의 눈에 포착되었다.

“주말인데도 나오셨네요?”

“주말이지만, 오늘 연습생 평가가 있다고 해서 나오라고 하더군요.”

“아.”

겨우 생각해낸 질문이었는데, 단유의 대답에 지아는 얼굴을 붉혔다. 숨을 곳이 있다면 머리라도 집어넣고 싶었다.

“그런데 지아 씨는 왜 안 오셨어요?”

“아, 저는 선생님 작업실에서 일이 있어서요.”

창모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지아의 대답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하시네요.”

“아니요, 그런 건. 제가 너무 부족해서···.”

“부족하다는 걸 알고 배우려는 자세는 칭찬받아야 하죠.”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럼 계속 수고하세요.”

단유는 짤막하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저기···.”

“네?”

“어, 그게···.”

한참 뜸 들이다 다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지아.

“꼭 제대로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뭘요?”

“저한테 기회를 주신 거요.”

단유는 지아를 빤히 바라보다가 지아의 인사에 대꾸했다.

“지아 씨한테는 인사를 많이 받네요.”

“네?”

“사과도 받고, 감사도 받고. 저만 보면 계속 고개를 숙이시니까.”

“아.”

“지난번에도 말했는데. 안 그래도 된다고요.”

“아.”

“사과해야 할 때 사과하고,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하는 건 좋은 습관인 거 같긴 해요. 하지만 너무 잦으면 오히려 오해를 살 수 있어요.”

“오해요?”

단유는 손에 든 음료수에서 올라오는 단내를 맡으며 대답했다.

“뭐든 과하면 그렇잖아요? 진정성 없게 느껴진다거나. 지아 씨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죄송합니다.”

단유는 입을 반쯤 열었다가 닫았다. 단지 회사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왔다 뿐이지, 전과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었다. 하긴 사람 성격이란 게 그리 쉽게 변할 리 없다. 어쩌면,

‘말로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지만, 실제로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나 성취감이 부족한 것일지도.’

여전히 불안해 보이고, 자신감이 부족해 보이며 눈치를 살피기 바쁜 모습이었다. 그래도 히스테리컬(?)한 모습은 많이 줄어들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음료 마시려고 오신 거 아니에요?”

인사만 하고 있지 말고, 자기 볼일 보라는 말을 둘러 표현했더니, 그건 또 냉큼 알아들었는지 허둥대며 음료 디스펜서를 조작하는 지아였다. 그런데 또 뭐가 문제인지 음료수를 뽑아놓고도 망설이는 모습이다. 추측컨대 원래 뽑으려던 음료가 아니었던 모양. 그 와중에 또 단유의 눈치를 살피느라 눈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아마 저런 모습 때문일 테다. 그녀에게 호기심이 생기는 건.

“도와드릴까요?”

“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예를 들면, 뭔가 반듯이 정렬되어야 하는 책장에 혼자 툭 튀어나와 있는 모습이랄까. 평소 잘 보이지 않는 책상 뒤 전원선도 어지럽게 널려있으면 신경이 쓰여서 앉아있질 못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단유가 디스펜서를 조작하기 위해 지아 곁에 서니 지아는 지레 놀란 얼굴로 한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단유는 개의치 않고 버튼을 눌러 ‘이거 맞아요?’라고 확인한 뒤, 컵을 추출구 아래에 놓고 음료를 내렸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며 카페테리아 내에 잠시 머물렀던 정적을 내쫓았다. 그러나 묘한 분위기마저 내쫓지는 못한 듯, 지아는 붉어진 얼굴로 단유를 힐끔 쳐다보았다.

‘왜 계속 도와주지?’

생각은 거기서 그쳐야 했지만, 저도 모르게 만화 같은 상상을 하는 건 아직 어리기 때문이리라.

‘열 살 먹은 어린 애도 아니고.’

지아는 허리 뒤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음료가 나오는 걸 지켜보았다. 이윽고 단유가 컵을 집어 건네자, 또 자연히 ‘고맙습니다’란 인사가 나왔다.

단유는 예의 덤덤한 표정으로 지아를 일별한 후 돌아서려는데, 또 다시 지아가 단유를 불렀다.

“저기요.”

“네?”

“저, 말 놓으세요. 편하게.”

“이게 편해요.”

단유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하곤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다 지아는 긴 한숨을 뱉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 모습들과 이미지가 중첩되며 만들어낸 단유에 대한 인상은 ‘어른스럽다’를 넘어 ‘의지하고픈’ 사람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도 분명히 잘 알고 있고, 자기 분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지금 지아가 억지로 누르고 있는 그 상상을 볼 수 있다면, 재수 없다고 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제를 알아야지.’

문득 손에 들고 있던 컵에서 진한 단내가 피어오름을 느꼈다. 창모는 이 향이 좋아서 매일 이걸 마신다고 했다.

‘아, 심부름.’

지아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얼른 작업실로 향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죄송합니다.”

“너 오는 거 기다리는 동안 믹싱까지 끝냈다.”

원래는 믹싱하는 과정을 보며 배워야 하는데 지아가 너무 딴 생각에 빠져 시간을 지체했던 나머지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 또 지아의 입에서 죄송합니다, 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적당히 사과하란 단유의 조언이 무색하게 매번 죄송할 일이 만들어지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믹스다운 전에 클리핑이 안 뜨는 선에서 레벨 조정하는 것만 주의하면 되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중에 혼자서 해봐도 될 거야.”

“네.”

지아는 창모에게 컵을 건넸고, 창모는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작업실에 창모만 있지 않았다.

“주말에도 많이 바쁘셨던 거군요.”

“정말이라니까요.”

창모와 말을 나누는 이는 바로 아까 전까지 단유와 함께 있었던 매니저였다.

사무실로 먼저 가겠다며 단유와 헤어졌던 매니저는 사무실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창모의 작업실로 향했다.

“어, 계셨네요?”

“있는 줄 알고 오신 거 아닌가요?”

“뭐, 사무실에 가니까 계실 거라고 해서 혹시나하고 와본 겁니다. 주말에도 나오셨을 줄은 몰랐거든요.”

“무슨 일 있나요?”

“지난 번에 말씀드렸던 거요. 컨펌을 받아야 하는데, 바쁘시면 다음 주 월요일에 해도 되지만, 이왕 계신다니 빨리 끝내자는 생각으로 와봤습니다.”

“지난번? 아, 시은 씨 거요?”

시은의 영입이 결정된 이후, A&R 팀의 미팅 중에 나온 이야기였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 축에 속하는 시은이 영입되면서 언론이나 커뮤니티 등에서 회사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데, 기왕 분위기를 탔으니 이 기회를 살리면 좋지 않을까, 라는 기획이 나왔다.

시은의 이적 후 첫 앨범이니 기획사의 이름이 들어가는 만큼 더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과 동시에 바로 앨범이 나오는 건 비용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무리가 있으니 프로젝트성 음원을 만드는 건 어떻겠냐는 말이었다.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요. 사실 저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죠.”

창모를 비롯 회사 소속 작곡가들에게는 자신들이 작곡한 음원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창모야 이 바닥에서 나름 유명한 이라, 굳이 이런 프로젝트를 하지 않더라도 곡을 만들어 파는 것에 문제가 없지만, 그 외 소속 작곡가들의 경우엔 곡을 발표할 창구가 많이 모자란 면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회사가 프로젝트를 기획해 작곡가들의 곡을 음원으로 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시은의 영입 전이라면 마땅한 보컬이 없는 마당이니 성립할 수 없는 프로젝트였다. 게다가 이를 들은 시은도 흔쾌히 허락을 해 주었기에 진행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쏠렸다.

작곡가 팀의 입장에서 A&R팀의 제안은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오래 걸리면 안 된다, 몇 달 안으로 곡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조건이 내 걸리자, 다소 곤혹스러웠던 것도 사실.

짧은 시간에 만족할 만한 퀄리티의 곡을 작곡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작곡가 팀을 이끄는 리더로서 창모는, 이 제안이 좋은 기획이고 해보지 않고는 모른다며 다른 팀원들을 독려했다.

그리하여 A&R팀에서는 임시로 프로젝트 진행 스케줄을 짰고, 이를 창모에게 컨펌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왜 매니저님이 직접 오셨어요? A&R에서 오지 않고.”

“부탁을 받았죠.”

“그런가요? 뭐 일단 주세요. 당장 컨펌해야 할 건 아니죠?”

“자세히 검토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니까 당장은 힘들 겁니다. 다른 분들 이야기도 들어봐야 할 테고요.”

“네, 그러죠.”

그리하여 창모가 매니저에게서 임시 스케줄표를 받아들 때, 지아가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아, 지아 씨. 지아 씨도 주말에 고생이 많네요.”

“아뇨, 그··· 저보단 선생님이 더 고생이 많으시죠.”

쭈뼛대며 대답하는 지아의 모습을 보며 매니저가 한 마디를 더 건넸다.

“이왕 주말에 나오실 거였으면, 오전에 있었던 행사에 같이 오시지 그랬어요?”

이미 그 문제로 잠깐 이야기를 나눴던 두 사람이었기에, 창모는 지아와 잠시 눈빛을 교환하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다음엔 꼭 갈게요.”

그렇게 답한 창모는―예의상―어땠냐며 물었다. 그리 물으면 사실 딱히 어떻다 대답하기 곤란했던 매니저는 연습생들이 고생이 많았지만, 다행히 큰 실수없이 무대가 진행되어 다행이었노라고 소회를 밝힐 따름이었다.

“매니저 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겠네요.”

“고생은요. 원래 제가 하던 일을 한 건데요.”

“하긴 뒤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라면, 역시 매니저님들의 수고를 무시하지 못하죠.”

“하하,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조금 신경이 쓰일 뿐.”

“저야 이런 골방에 틀어박혀서 곡이나 쓰면 되지만, 사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사람 상대하는 일이라고, 매니저 님이 그런 일들을 하지 않습니까?”

“아유, 그렇게까지 상찬하실 일은 아니죠.”

떠받듬에 익숙하지 않은 매니저가 손을 내저었다.

“다행히 아이들이 제 말에 잘 따라줘서, 그리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요? 아, 그러고보니 지아 씨 친구도 연습생으로 있잖아요? 그 친구는 오늘 어땠습니까? 잘했나요?”

그냥 지나가는 말인냥 꺼낸 창모의 말이었지만 지아는 그것이 자신을 배려하여 대신 매니저에게 질문한 것임을 알았다. 지아 역시 매니저의 대답이 몹시 궁금하여 그를 바라보니, 그런 분위기를 감지 못한 매니저는 그저 나쁘지 않았다, 는 정도로 답할 뿐이었다.

“제 눈에야 나쁘지 않았지만, 평가는 직원들이 했으니까, 결과가 나오지 않은 이상 뭐라고 하기 어렵죠.”

“아, 그런가요?”

“그리고 오늘은 결과야 어쨌든, 평가가 무사히 끝난 것만으로도 저는 모두를 칭찬하고픈 마음이었습니다만, 역시 매니저된 입장에서 아이들을 마냥 칭찬해줄 수만은 없어 말을 삼가고 있었지만요.”

“하하, 역시 그런 것도 신경을 써줘야 하는 거군요.”

“그래서 대신 오늘 하루만큼, 아니 내일까지는 편히 쉴 수 있게 풀어주려고요. 오늘 한우도 먹였으니 지금쯤 배나 두드리며 쉬고 있지 않을까요?”

“한우요?”

“마침 김 이사님이 함께 자리하셨는데, 그분이 다 쏘셨거든요.”

“아.”

지아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가 금방 입을 틀어막았다. 왜 그러냐는 물음에,

“조금 전에 봤거든요. 카페테리아에서.”

라고 했더니 창모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지아를 흘겨보았다.

“그래서 늦었구나?”

“네? 아니, 그건 아니고요.”

그때, 매니저가 손뼉을 마주치며 화제를 돌리지 않았다면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해 곤란했을 지아였다.

“아, 그거 아십니까?”

“네?”

“김 이사님, 예전에 음원 냈던 거요.”

“음원이요? 정식 음원?”

“네! 저도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요.”

라고 시작한 매니저의 이야기는 ‘지금쯤 아이들도 연습실에서 찾아 듣고 있을 거’란 말로 끝이 났다.

“그래요? 궁금해지는데, 한 번 찾아볼까?”

창모에게는 그저 신비롭기만한 이미지의 김 이사가 어린 시절 불렀다는 음원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는 투로 창모는 손가락을 튕기며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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