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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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연예계에 뛰어들어 온갖 연예인들의 수발을 들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누구보다 빠르게 로드에서 팀장까지 승진하고, 편안한 길을 걸을 수 있었지만, 자신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모험도 마다치 않고 도전하는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고 있다, 는 영웅담을 늘어 놓아봐야 어린 연습생들의 공감대를 끌어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매니저였다.
제 딴에 분위기를 풀어보려 농담도 했지만, 썰렁하기만 한 반응에 그마저도 쑥 들어가니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많이 먹어.”
라며 고기 한 점 집어 마주 앉은 연습생들의 접시에 올려주는 일밖에 없었다.
‘하긴.’
무심코 내뱉어버리기엔 창피한 인생의 이야기. 지금 자신이 집어준 고기를 먹으며 상큼한 미소를 짓는 저 아이의 나이였을 때, 자신은 학교에서 생기 없는 얼굴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거창한 꿈 같은 것도 없었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겠노라 마음먹지도 않았다. 그냥 학교에 나가면 늘 보는 얼굴들과 마주하며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나 하다가 어영부영 수업을 받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학교 뒷골목 그늘에 숨어 침을 찍찍 뱉어대며 담배나 태우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매니저란 직업을 선택한 계기는?
‘우연이지.’
안면을 익히고 지니던 동네 형이 소개해줘서 운전대나 잡으면 된다는 이야기에 시작하게 된 아르바이트가 오늘날의 매니저를 만들었다. 그저 운이 좋아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결코 아니며, 나름 치열하게 살았노라 회고할 수 있을 수준의 삶을 살았지만, 술도 마시지 않은 맨정신에, 미래에 닥칠 시련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자기들끼리 희희낙락하는 어린 연습생들에게 풀어놓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지금도 보면, 조금 전 끝난 경연식 평가가 끝났음을 순수하게 기뻐하며, 나무 도마에 담겨 나온 붉고 탐스러운 소고기가 석쇠 위에 올라가 고소한 향을 뿌려대는 광경만으로 자지러지는데, 이런 이들에게 인생의 팍팍함 따위 알려줘 봐야 의미 없다.
‘혹은 꼰대란 소리 듣고 싶지 않은 거지.’
솔직히 꼰대란 소리, 나이 들면서 가끔 듣긴 했다. 굳이 좋게 해석하면 기성세대를 달리 부르는 별칭이지만, 실제로는 그저 나이만 먹고 아랫사람들을 경시하며 잔소리만 입에 담는 이를 일컫는 멸칭이라 들어서 좋을 건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옆에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건너건너 들은 바에 따르면, 자신보다 한참 어림에도 불구하고 이미 수중에 주체할 수 없는 수준의 경제력을 얻은 단유가 있는데, 자기가 뭐라고 인생 이야기를 늘어놓겠는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회사 내에서 어떤 유언비어가 퍼져나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알 생각도 없는 단유는 쏟아지는 시선을 견디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나름 어색한 분위기를 풀겠다는 생각으로 말을 꺼냈었지만 되려 어색해진 탓에 이후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무릎 위에 손을 얹어 놓은 자세까지도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인데, 새삼 자신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단련된 자신을 향한 시선에 대한 경계 신호가 쉴 틈 없이 울리고 있어 꽤 곤란한 처지랄까? 길게 이어진 좌식 테이블을 꽉 채운 연습생들은 다들 옆에 앉은 짝과 왁자지껄 떠드는 대신 가까이 있지 않으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확히 알기 힘든 목소리로 사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틈틈이 단유를―어쩌면 매니저도 함께―훔쳐보는 시선을 던지는데, 제 딴에는 노골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 몰래몰래 보지만, 모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왜 쳐다보냐 물어보기도 애매한 분위기이고 그들이 쳐다보는 이유를 짐작하는 게 어렵지도 않으니, 그저 종업원들이 구워주는 고기가 익을 때까지 정자세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아까처럼 매니저가 말이라도 붙여주면 좋으련만, 그도 분위기를 감지한 건지 입을 꾹 다물고 앞에 놓인 반찬만 뒤적이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뿐이라, 자신도 대훈처럼 매니저에게 카드를 던져주고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하는 중인데, 자신을 이 자리에 오게 한 장본인이 입을 열었다.
“이사님?”
초롱초롱한 눈빛이 부담스러운 시율이었다. 단유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네?”
“이사님은 오늘 어땠어요?”
“괜찮았습니다.”
“지난번보다 좋아진 거 같아요?”
예비 평가 당시 단유의 솔직한 평가에 앞에서는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하고는 이후 본래 자리로 돌아간 뒤, 평가가 끝날 때까지 어두운 얼굴이었던 그녀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네.”
정말요, 라고 되물으며 손뼉을 치는 시율과 덩달아 웃는 연습생들.
“그런데요.”
이번엔 채린이었다.
“네.”
“이사님은 결혼 안 하셨죠?”
아무래도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딴짓하며 수군대던 이유가 바로 지금을 위해서였다는 듯 다들 미어캣이 되어 단유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따가웠다.
“얘들이 못하는 말이 없어.”
매니저가 채린을 제지했으나, 주변 연습생들의 뜨거운 시선에 단유는 입을 열었다.
“안 했어요.”
“그럼요, 혹시 여자 친구도 있어요?”
이사가 젊고 잘생기다 보니 어린 연습생들이 관심을 가지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던 매니저였으나, 그래도 직급상 한참 위에 있는 이에게 ‘스스럼없이’라는 단계를 넘어 ‘건방지게’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까 걱정될 레벨의 질문이 오가는 것은 자기 선에서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다시 한번 채린을 향해 인상을 구기며 주의시켰다.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채린으로 인해 안 그래도 어색했던 분위기가 더 어색해지는 것 같아 단유는 그냥 신경 안 쓴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없어요.”
이걸 무슨 반응이라고 불러야 할까? 자신의 여자친구 유무가 연습생들에게는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저렇게 신이 난 얼굴들을 하는 건지 단유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사님은 저희의 연예인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이유를 물었더니 나오는 답변이었는데, 역시나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답이었고 논리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웃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름이었다. 정확히는 단유가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한 뒤로 계속 어색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린 채였다.
‘친구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 자신의 문제’라는 단유의 발언 이후, 아름의 머릿속은 꼬인 실타래처럼 엉켜서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갑자기 친구의 이야기를 꺼낸 거지? 여기서 친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라면, 결국 내 이야기인 걸까? 내가 지수한테 느끼는 감정을 눈치챈 건가? 아니면 지수가 내 이야기를 한 걸까? 지수랑 따로 이야기할 만큼 친한 걸까? 지난번에 봤을 때는 별로 친해 보이진 않았는데? 혹시?’
라고 생각할 때쯤, 단유가 여자친구가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정말 없는 걸까? 혹시 아무도 몰래··· 그런 건 아니겠지?’
두 사람이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 몰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혹은 카페 같은 곳에서 단둘이 마주 앉아 웃고 있는 장면 같은 게 연상되어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름 씨?”
“네? 네?”
뜬금없이 놀라는 표정을 지은 탓인지 주위 사람들이 모두 아름을 쳐다보았다.
“너 왜 그래?”
매니저의 물음에 아름은 고개를 흔들었다.
“잠깐 딴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부른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리니, 단유는 눈으로 아름의 접시를 가리켰다.
“그거 드시라고요. 아무것도 입에 안 드시길래.”
“우와, 이사님 배려 짱짱!”
채린과 시율은 마치 자신의 손이 캐스터네츠라도 되는 듯 인형처럼 박수를 쳤다. 아름의 속도 모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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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무한대로 시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적어도 고기를 입안에 넣고 있는 동안에는 단유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훔쳐보는 시선도 없었다.
‘이래서 다들 한우, 한우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사님 덕분에 포식했습니다.”
매니저도 배가 부르니 처음의 어색했던 표정이 많이 풀린 듯했다. 어색하다기보다는 서먹했던 것이겠지만, 딱히 그가 어떤 오해를 하든 풀어줄 생각이 없어 함께 침묵을 지켰던 단유로선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풀린 것 같아 만족했다. 앞으로도 어색한 사람과 함께 식사해야 하는 경우라면 이 집을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며, 카운터에서 명함을 받아 챙겼다.
“저는 애들 데리고 일단 회사로 들어가 볼까 하는데, 이사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록 진짜 이사가 아니더라도 여기서 회사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해서, 단유는 은근한 동행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전혀 은근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단유와 함께 회사까지 가는 동안 공유할 화제도 없었기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자 물었던 질문이었지만.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선도하는 유치원 선생님처럼 앞서 걸어가는 매니저였지만 괜히 단유보다 앞서 걷거나 뒤처지면 안 될 것 같다는, 경험적 처세술이 작용한 탓에 단유와 비슷한 속도로 걸어가던 매니저는 무표정, 무소음의 단유와 걸어가는 동안 다시 아까와 같은 어색함과 뭐라도 이야기를 건네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사님.”
“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뭐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그게, 사실 전에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있어 그러는데, 혹시 예전에 데뷔하신 적 있으세요?”
“데뷔요?”
단유는 눈을 껌뻑거리며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아니, 실은 말이죠. 전에 있던 회사의 사람들이랑 연락하며 지내다가 그쪽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해서 말이죠.”
“무슨 이야기요?”
“이사님이 예전에 음반, 아니 음원을 낸 적이 있다고 해서요.”
“음원? 아.”
단유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적이 있긴 있네요.”
“아, 그럼 그게 이사님이 맞네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 이름으로 된 음원이 나온 적은 있어요.”
“그거 맞죠? 「리모트」?”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 생소하면서도 반갑달까? 단유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맞네요. 근데 원래는 가디스R이라는 그룹의 노래였죠.”
“네, 네, 그거요! 맞네! 이제 보니 이사님 생각보다 대단하신 분이셨네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묻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이야기를 용케 들은, 매니저 바로 뒤를 따르던 연습생들은 거기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사님, 가수였어요?”
“무슨 이야기야?”
“이사님이 노래 냈었대.”
“정말?”
“그럼 이사님 예전에 가수? 아이돌?”
“뭔데? 뭔데?”
“이사님!”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야기를 나눌 걸 그랬나, 후회될 정도로 아이들이 앞으로 몰려와 단유를 에워싸듯이 붙었다.
“야, 야. 이사님 곤란해하시는 거 안 보여? 떨어져, 떨어져.”
매니저의 제지에도 아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 핸드폰 있었으면 지금 바로 찾아 볼 텐데.”
“매니저님, 혹시 핸드폰으로 노래 찾아볼 수 있어요? 찾아서 들어보면 안 돼요?”
“길에서 다들 뭐 하는 거야? 그런 건 회사 가서 찾아봐.”
찾지 말라고는 하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회사에 들어가면 자신이 직접 찾아볼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미 찾아봤겠지?
“매니저님, 들어보셨어요? 어땠어요?”
매니저는 단유를 힐끗 보고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굉장하지.”
“정말요?”
“요즘 나와도 충분히 뜰 만한 노래던데, 그때는 왜 몰랐나 몰라.”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그 노래, 온라인 차트에서 꽤 상위권까지 진입했던 거로 기억하는데요?”
“걸그룹이 불렀던 노래 말씀이시죠? 그 노래는 알죠. 근데 그 노래를 이사님 버전으로 불렀던 건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사님 목소리가 들어간 노래는 아주 다른 느낌이던데요? 뭔가 매력적인 미성의 목소리여서. 지금 목소리도 좋으시지만, 약간 어릴 때의 이사님 목소리여서 그런지 신비롭다는 느낌도 들고, 그렇던데요?”
아주 금칠을 할 작정으로 말을 꺼낸 것이지 싶었다. 그런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에 단유는 그만하자며 손을 저었지만, 이미 아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회사를 가자고 난리였다. 조금 전까지, 비록 말은 안 했지만, 회사에 들어가기 싫어 꿈뜬 걸음을 옮기던 이들이 말이다.
“우리가 들어보고 평가해 드릴게요!”
시율과 채린이 짓는 미소를 보며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