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4)
-------------- 840/952 --------------
대기실에서 다음 무대를 준비하던 아름은 밖에서 들려오는 박수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름 뿐만 아니라 대기실에 있던 다른 연습생들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채린이지?”
“역시 채린이네.”
이미 대기실에서부터 채린의 외모는 다른 연습생들의 눈에 띄었다.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채린이 오늘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다는 예상들은 다 하고 있었던 셈이다. 대놓고 부럽다, 며 말하는 이는 없었지만, 표정에서 속마음이 모두 드러나고 있는데 단 한 사람, 아름만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채린이 거둔 성과에 대한 불편함이 아니라, 다음 무대에 올라야 하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연습 때도 잘했잖아?”
진행을 돕던 매니저가 아름의 마음을 안 다는 듯 다독였다.
“네.”
“잘 할 수 있지?”
“네.”
“잘 할 수 있어. 잘할 거야. 연습한 대로만 해. 맏언니잖아? 그치?”
“네.”
그리고 그때 무대를 마치고 돌아온 채린이 대기실로 들어오니 연습생들도 그녀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수고했어, 채린아.”
“잘했어, 채린아.”
채린은 가장 가까이 있던 아름과 시선이 마주치자, 총총 뛰어와 품에 안겼다.
“언니.”
“잘했어, 채린아. 잘했어.”
“정말요?”
“그래. 다들 그래서 박수를 보내잖아?”
“무서워서 혼났어요.”
말하는 투나 행동은 아직 어린애지만, 아름은 그녀가 꽤 ‘강단’이 있음을 안다. 그래도 익숙치 않은 무대에 혼자 오르는 경험이 낯설 테니 이리 벌벌 떠는 것이겠지.
매니저가 채린을 떼어놓으며 말했다.
“이제 아름이 올라가야 되니까.”
“네, 언니!”
“응.”
“언니도 파이팅 해요.”
“응.”
채린은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다른 연습생 언니들에게 뛰어갔다. 그녀에 대한 부러움은 제쳐두고, 함께 고생한 동료로서, 평소 언니들에게 잔망스럽게 애교떨던 동생으로서 그녀를 안아주는 연습생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름은 매니저의 신호에 정신을 차렸다.
“자, 올라가자.”
“네.”
“채린이보다 잘 할 수 있지?”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아,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라, 매니저의 질문을 이해했다는 의미로서.
문을 나서 무대에 오르니, 처음 강당에 도착했을 때 보았던 빈 의자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앞서 무대에 오른 연습생들은 이런 풍경을 눈에 담으며 연기를 했구나 생각하니, 새삼 그들이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름은 너무 긴장이 돼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도 파악이 안 될 정도였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던 그때, 가장 앞줄에서 아름은 익숙한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단유였다. 바로 곁에 앉은 대표님과 무슨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지만, 그를 발견한 순간 이제껏 느끼고 있던 긴장감이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대신 그에 대한 묘한 감정이 샘솟았다.
아름은 그 감정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했다. 승부욕. 다른 연습생 동기들에게도 잘 느껴지지 않던 감정을 유독 단유를 보며 느끼는 건, 역시 지난번 일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그저 대화가 끝났기 때문인지 단유의 시선이 무대로 향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덤덤하기만 한 단유의 눈빛에 아름은 다시 한번 치솟는 감정에 남은 긴장과 불안을 떨쳐낼 수 있었다.
‘지고 싶지 않아.’
그 마음 하나만을 붙잡고 눈빛을 불태우는 아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유는 다음 무대를 기다릴 뿐이었다.
****
같은 시간, 지아는 강당에 있지 않았다.
“가고 싶어?”
믹서 앞에 앉은 창모는 등받이를 뒤로 기울여 몸을 기댄 채로 지아를 바라보았다.
“아뇨. 그런 거 아니고요.”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끝이 들릴 듯 말 듯 하는 지아의 모습은, 처음 보는 이에겐 답답함을 유발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한 달여 이상을 함께 지내다 보니 익숙해져 버린 창모였다.
“그럼 주말에 회사 나와서?”
“아뇨, 그런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왜 그렇게 우울한 얼굴이야?”
“그냥, 발전이 없는 것 같아서요.”
물론 처음에 창모는 지아에게 그 성격 좀 고쳐보라고 충고를 하기도 했지만, 지금에는 지아 본래의 성격이 다소 소심한 면이 있는 데다 워낙 자존감이 낮은 이라 쉽게 극복하기 힘들다는 것을 이해했다.
“발전이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야. 누구나 다 쉽게 작곡을 할 수 있었다면 개나 소나 다 작곡가가 되었겠지. 창의성이란 건 발전하는 게 아냐. 발견하는 거지. 넌 아직 그 발견을 하지 못한 거고.”
“네.”
“사실 요즘은 작곡도 컴퓨터가 스스로 하는 세상이잖아? 몇 가지 도입부 코드만 넣으면 컴퓨터가 알아서 곡을 완성시켜 주기도 하니까. 그런데 그런 곡이 과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없겠죠.”
“아냐, 있어.”
“네?”
창모는 바로 곁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내가 수학은 잘 못 하지만, 수십 개의 코드를 조합하는 것만으로도 수백, 수천 가지 곡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가정해봐. 그중에서 정말 깜짝 놀랄 만한 곡 하나가 나오지 않을까?”
모니터에 떠 있는 수십 개의 마스터링 되지 않은 트랙들을 흘깃 보며 지아는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발견이라는 거야. 만들어질 수 있는 수천, 수만 개의 곡 중에는 불협화음으로 듣기 힘든 곡이 대부분이더라도, 개중 하나는 기가 막힌 곡이 있을 거란 말이지. 불후의 명곡이라 불러도 무방할 곡 말이야. 바로 그걸 찾는 게 우리의 역할인 거지. 그럼 니가 할 일도 정해지지? 뭘까? 니가 해야 할 일이란 게.”
“······.”
“최대한 많이 코드를 조합하고, 곡을 만들어. 가능한 많이. 그러다 보면 감이 와. 아, 이런 코드 진행을 했을 때, 듣기 좋구나. 이렇게 멜로디를 붙이면 감동이 오는구나, 라는 걸 경험적으로 터득해야 하는 거지. 컴퓨터는 이걸 못하기 때문에 작곡이 어려운 거고, 사람은 이걸 고를 수 있기 때문에 작곡가가 될 수 있는 거야.”
“다른 작곡가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어쩐지 상식이 파괴되는 기분인데요.”
“네가 지금 다른 사람한테 배우는 거 아니잖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냐, 는 되물음에 지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죠.”
“나는 그렇게 생각해. 과거의 작곡가는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지금도 그 점에 있어서 부정할 마음은 없어. 하지만 현대의 작곡가는 과거와 달리, 작곡을 보조해줄 수단들이 무궁무진하잖아. 아주 오래 전의 작곡가들은 머릿속으로 악상을 떠올리며 음표를 그렸지만, 현대 작곡가들은 컴퓨터로 시뮬레이팅을 할 수 있으니까 훨씬 빠르고 간단하게 악상을 점검할 수 있지. 손가락 지문이 뭉개지도록 기타를 치고, 피아노 건반을 닳도록 두드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야.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 현대 작곡가들이 편하게 곡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왠 줄 알아?”
“왜요?”
“웬만한 곡들은 이미 세상에 다 나와 있다는 말 못 들었어? 어지간히 괜찮네, 라고 생각한 곡들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에 나왔을 확률이 높다는 거지. 그러니 의도치 않게 표절이 되는 경우도 있다, 고 하는 거지.”
“그렇네요.”
“물론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만약 의도치 않게 표절을 했다고 변명한다면, 그건 경험치 부족의 핑계라고 생각해. 많이 만들어보지 않고, 많이 들어보지 않아서 그런 거야. 많이 보고, 듣고, 경험하면 그게 과연 새로운 것인지, 아닌지 헷갈릴 수 있을까? 말했듯이, 수백, 수천, 아니다. 사실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의 가짓수로 만들어질 텐데, 그 중에서 과연 똑같은 곡이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건 마치 로또 1등이 수십 명이 되는 것과 같잖아? 어, 근데 실제로 로또 1등은 여러 명인 경우가 많잖아? 말하다 보니, 갑자기 또 이해가 돼 버리네? 지금껀 못 들은 셈 쳐라. 자기도 모르게 똑같은 곡을 만들 수도 있겠네.”
익살맞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창모의 언변에 지아는 실소를 흘렸다.
“뭐, 대충 표정이 풀린 거 보니 이제 시작해도 되겠지?”
“네.”
“집중하고, 오늘도 많이 만들고, 많이 들어보자고. 오케이?”
“네.”
“어제 작업했던 건데, 여기가 좀 많이 비는 느낌이거든? 좀 풍성한 음을 내야 이 구간 전체가 살아날 것 같지? 그럼 여기에 어떤 세션이 들어가면 좋을까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고.”
지아는 곧 창모의 가르침에 따라가기 시작했다.
****
긴장감이 풀리니 주변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없네, 지아는.’
사실 오르기 전부터 약간 마음에 걸렸던 것은, 운 좋게 회사에 들어온 지아가 자신의 연기를 평가한다며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침착하게 연기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아무리 친구라도 역시 그런 건 싫다, 고 해야 할까? 서로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절친도 아니고,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마음은 지아를 시기하던 아름인데 그렇게 여기는 지아 앞에서 미숙한 연기를 선보인다는 게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40여 명의 직원들 중 지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 점에서 약간 안심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아름은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한 후, 곧 연기를 시작하겠노라 말했다. 아름이 선보일 연기는 비리 혐의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은행 여직원의 역할이었다.
“전 몰랐어요! 아무것도 몰랐단 말이에요.”
처음 그녀가 감찰실에 불려왔을 때는 영문을 몰라 그저 두려워만 하다가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혐의가 씌어져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강하게 부정하기 시작한다.
“그건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제가 전산 입력한 건 맞지만, 저는 그저 위에서 시킨 대로 했을 뿐이라고요. 위에서 마감 시간 전까지 해야 한다고 독촉해서 했던 기억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 계좌 누구 거였는지 전 알지 못해요.”
그 계좌가 유령 계좌였다는 사실도 몰랐고, 그 계좌를 만들었던 것 역시 여인의 짓이었다는 감찰직원의 말에도 강하게 부정하지만.
“하아. 설마 그것까지 들켰을 줄은 몰랐어요.”
복잡한 절차를 거쳐 세탁된 돈이 최종적으로 향한 곳이 바로 그녀가 따로 관리하는 또 다른 계좌. 그리고 그곳에서 돈을 인출한 정황이 밝혀지며 그녀의 범죄가 드러나고, 그녀는 그것이 회사 고위층의 비리를 돕던 와중에 생긴 권한을 이용해 약간의 꼼수를 부려 일부를 다시 횡령하였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된다.
“저만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회사 고위층의 비리 와중에 약간의 수고비였을 뿐이었다며, 어차피 눈먼 돈이었을 뿐이라며, 왜 자신이 모든 혐의를 뒤집어써야 하냐며 되려 감찰 직원을 협박한다.
“내가 이곳을 나가 입을 여는 순간, 이 은행은 문을 닫아야 해요. 닫기만 할까? 여러 사람이 다칠걸?”
“괜찮은데요?”
“생각보다. 꽤 어려운 상황을 잘 표현해냈어.”
“문제는 너무 전문적인 내용이 많이 함축되어 있어서, 상황 전체를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인지 연기자의 표현력이 제대로 와닿지 않는 면이 있네요.”
트레이너들끼리 속닥거리며 감상을 나누는 와중에 바로 옆에 있던 팀장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대본 어디서 따온 거예요?”
“아, 무슨 소극장 공연용 대본이라는데 원래 1인극 용은 아닌데 그걸 조금 손을 본 거에요.”
“직접? 아니면 도와주셨어요?”
“제가 조금 봐주긴 했는데, 거의 아름이 혼자 한거나 마찬가지예요. 문장 해석력이 좋은 친구예요. 그래서 대본을 자기에 맞게 수정하는 것도 곧잘 하고요.”
“그게 좋은 건가요?”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완성도 높은 대본은 만나기 힘들기도 하거니와, 연기자라면 역시 대본 이상의 해석과 표현력을 보여주는 게 좋다고 보거든요. 그런 점에서 아름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연륜도 있고 하니, 아무래도 생각도 깊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 편이에요. 대본을 제 나름대로 해석하는 능력이 좋고 또 그 방향이 신선한 편이에요.”
“좋은 재능을 가진 친구라는 이야기구만.”
팀장은 트레이너의 보충 설명을 들으며 펜을 돌렸다.
“비쥬얼도 좋고.”
“피아노 전공인데 콩쿠르같은 무대에도 몇 번 서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별로 떨지도 않는 것 같네요.”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어요.”
대부분의 호평 속에 아름의 연기가 끝이 났다.
“꽤 괜찮은 조합이 나올 수도 있겠는데?”
대훈이 말아 쥔 평가지를 통통 손바닥에 두드리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