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38화 (838/956)

평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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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추워.”

강당의 전면 무대 뒤편 대기실에 모여있던 연습생들은 서늘한 기온 탓에 덜덜 떨었다.

“갑자기 온도가 뚝 떨어진 거 같아요.”

“며칠 지나면 겨울이니까.”

평소 날씨의 변화 따위에 큰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지금의 긴장감을 떨쳐내기 위한 수단으로 들먹인 것일 뿐. 하지만 무대 준비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다른 연습생들에겐 별로 주의를 기울일 만한 화제가 되지 못하는 듯 보였고, 연습생 곁에서 도움을 주고 있던 메이크업 스태프의 대꾸마저 없었다면 공연한 혼잣말이 되었으리라.

“자, 이거 붙여.”

때마침 대기실로 들어온 매니저가 연습생들에게 하나씩 건넨 것은,

“핫팩이요?”

“추워서 몸이 굳으면 안 되니까. 옷 안에 보이지 않게 붙이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야.”

경험이 많은 매니저였기에 달리 고지가 없었음에도 미리 준비하여 연습생들에게 나눠주는 센스를 보여 환영을 받았다.

“오늘 가장 중요한 건 긴장하지 않는 거야. 실수해도 돼. 괜찮아. 너희는 아직 연습생이야. 비록 평가 우수자에게 특별한 혜택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걸로 모든 게 끝나는 거 아닌 거 알지? 앞으로도 갈 길은 멀어. 지금은 단지 과정일 뿐이라는 거 꼭 기억하고, 그저 오늘은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한다. 알겠지?”

“네!”

****

“매달 사원 행사로 하기엔 무리가 많겠죠?”

월말 평가는 매달 진행해야 하지만, 매달 이렇게 크게 일을 벌이기엔 효율은 물론이고 비용적으로도 문제가 된다.

“일단 오늘 일을 진행한 후, 기획팀에서 자체적으로 내부평가해서 보고서 올리겠습니다.”

팀장의 대답에 대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쉽다는 듯 덧붙였다.

“그래도 마음 같아서는 매달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주말마다 이렇게 부르면 아무리 애사심 넘치는 직원이라도 인상을 쓸 겁니다.”

“인상만 쓰면 다행이게요? 면전에서 욕이라도 할까 겁나네요.”

“지금도 뒤에서 기회만 노리는 친구들이 없진 않을 겁니다.”

팀장의 대꾸에 대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인정했다.

“이번엔 조금 무리했다는 걸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시작하는 단계 아닙니까? 이런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성장하는 거죠.”

연습생은 총 17명. 통합 A조 9명과 통합 B조 8명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에서 광고 데뷔의 기회를 얻는 건 오직 한 명. 그렇기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신경전이 있을 거라고 추측은 가능했지만, 비단 연습생들 사이에서만 신경전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기왕이면 A조에서 우수점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A조를 맡은 총괄 트레이너의 바람에 B조 총괄 트레이너가 넉살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느 조의 누구든 다들 좋은 평가를 받는 게 가장 좋죠.”

마치 대인배인 것처럼 굴지만, 실은 B조에 배우 지망생이 다수 있는 데다가 오디션에서 특출난 실력을 선보였던 나영이 속해 있었기에 A조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자신이 있었다.

굳이 우려가 된다면, 평가를 맡은 직원들의 성비가 여성 쪽으로 쏠린 면이 있어 남자 연습생들이 다수인 A조에 더 후한 점수가 가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는데, 어쨌든 실력 하나만 놓고 보자면 역시 A조에 뒤지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었기에 A조 총괄 트레이너와의 신경전에서 여유로울 수 있었다.

앞줄에 앉은 고위 임직원들이나 트레이너들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사이, 뒷줄에 배치된 일반 직원들도 약간의 기대감을 서로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 이것도 특근 수당 나오겠지?”

“아까 못 들었어? 다 시간 정확히 계산해서 준다고 팀장님이 말씀하셨잖아.”

“다른 회사는 주말에 산에 간다고 부른다던데, 그거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지.”

“나 운동 되게 싫어하는데, 만약 우리 회사에서 산에 간다고 주말에 불렀으면 나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했을 거야.”

“나도, 나도.”

“너는 솔직히 운동 좀 해야 하지 않겠어? 그 뱃살 어쩔?”

“내 뱃살 키우는 데 뭐라도 보탰어?”

“지난번에 점심 쏜 거 잊었네? 와, 야박해라.”

“야, 고작 국수 한 그릇 가지고 유난이야? 나는 몇 배로 샀다? 왜 그래?”

“그만들 해. 먹는 거 이야기하니까 배고파지잖아.”

“아침 안 먹었어?”

“원래 난 주말에 늦잠 잔단 말이야. 오늘 여기 오는 거 깜박하고 늦잠자다가 뒤늦게 생각나서 서둘러 나오느라고 아무것도 못 먹었어. 야, 지금 들려? 나 꼬르륵 거리는 거?”

“아주 크게 들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들었겠다야.”

“이왕 준비하는 거 먹을 거라도 준비하면 좀 좋아.”

“그런 말 마라. 기획팀에서 부랴부랴 이거 준비하느라고 고생고생을 했다더라.”

“그래?”

“기획팀 윤대리가 메신저로 우는 소리를 어찌나 해대던지.”

장소 섭외 건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경비 문제 처리하고, 오늘 새벽에도 강당에 미리 나와서 세팅을 하느라고 고생을 했다는 후문을 들려주는 동기의 이야기에 다들 혀를 찼다.

“지원팀에서 하는 거 아녔어?”

“지원팀 애들이 준비할 게 너무 많다고 해서 기획팀이 도왔다던데.”

“근데 있잖아, 우리 회사 너무 주먹구구식 아냐? 기획팀, 지원팀, 총무팀 막 구색은 다 갖춰서 나눠놓고선 하는 일은 막 뒤죽박죽이고.”

“하는 일이 너무 많잖아? 솔직히 대표님이 이것저것 너무 많이 일을 추진하다 보니까 인원은 모자란 데 새로 뽑기에는 시간이 없고, 그러니까 여기저기 남는 사람들을 끌어모아다가 쓰는 거지. 그래도 우리 팀까지는 오지 않아서 다행이지 뭐.”

“우리는 뭐 노나? 며칠 전까지 우리 3박 4일을 거의 날밤까면서 지냈는데, 거기서 뭐라도 시키면 나 완전 죽었을 거다.”

“사람 좀 더 뽑던지, 아니면 일을 적당히 만들던지. 이거 판만 크게 벌이고 괜히 나중에 수습 못 해서 엉망 되고 그러는 거 아냐?”

“그건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네요. 우리는 그저 하라는 것만 잘하면 되지.”

“어, 조용조용. 시작하나 보다.”

****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귀한 시간 내어 오신 배심원 여러분. 최후 변론에 앞서 여러분께 한 가지 묻고자 합니다.”

변호사의 최후 변론이라는 주제로 연기를 시작한 연습생은 본래 쉬어야 할 타이밍이었던 것처럼 말을 끊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익숙하지 않은 연기를 하는 게 너무 어색하고 긴장되어서 목으로 나오는 게 목소리인지 내장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차라리 피를 토하고 병원에 실려 가면 편해지려나?

“참담하기 그지없는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저 여인이 유죄를 판결받는 장면을 기대하며 오셨습니까? 아니면 억울한 사연의 당사자인 여인의 무죄를 기대하며 오셨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사건처럼 판결이 어려운 사건은 저로서도 처음 맡은 일이라, 부끄럽지만 저 역시 혼란스럽습니다. ···네, 변론을 나선 변호사로서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압니다.”

수많은 정황 증거에도 불구하고 단정적으로 범인이다 지목할 만한 직접적 증거가 없으니 피고는 무죄, 라고 주장하고픈 변호사. 하지만 역시 정황적으로 너무나 불리한 상황이라 합리적 추론으로 보면 피고가 범인일 게 분명한 사건. 그러나 그럼에도 직접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피고가 단지 이 사건의 억울한 피해자일 수도 있음이니 섣부른 판단으로 피고가 유죄가 선고받지 않도록 신중한 결정을 해달라 읍소하는 변호사를 열연하는 연습생.

“기대 이상으로 잘하는 데요?”

“본래 가수 지망이었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연기에도 재능이 있다는 평가입니다.”

무대 위에 오른 연습생의 프로필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는 대훈은 옆에 앉은 단유에게도 물었다.

“어때요? 잘하죠?”

“연기 아직 하고 있으니까 집중 좀 해주시죠, 대표님.”

“아, 네.”

대훈은 단유의 대꾸에 머쓱해 하면서도 저리 집중해서 봐주니 괜히 또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저리 좋아할 거면 진작 좀 보러 가자고 할 때 가지.’

한편 단유는 무대에 선 연습생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추운가?’

강당에 설치된 히터를 켜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며칠 전 히터가 고장나 수리 중이어서 양해 바란다는 이야기를 앞서 들은 바가 있었다. 단유야 이 정도의 추위는 그저 새벽 운동 중에 늘상 마주치는 정도의 서늘함이었지만, 잔뜩 긴장한 채로 홀로 무대에 오른 연습생에겐 연기를 방해할 정도의 추위일지도 모르겠다.

‘미로라고 했던가?’

앞에서 연기하고 있는 연습생은 벌써부터 미리 활동명을 정해놓고 불러달라며 당차게 자기소개를 하여 기억에 남은 아이였다. ‘미로’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던 ‘정소영’. 자기 이름은 너무 흔해서 임팩트가 없다나?

지난번에 미리 봤을 때보다 훨씬 목소리도 가늘어지고 동작에 힘이 많이 들어가 딱딱해 보였다. 딱히 그녀가 더 잘나 보이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그녀를 비롯한 연습생들이 그간 준비했던 것들을 제대로 선보일 수 있는 무대만큼은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단유는 미동도 없이 앉아 무대를 바라보던 와중에 마법을 사용했다.

연습한 대로 대사를 읊던 소영은 어느 순간 공기가 미묘하게 바뀐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는 조금 전까지 어디선가 불어오던 차가운 외풍에 방해가 된다 싶을 정도로 몸이 떨렸는데, 지금은 갑자기 아무런 바람도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공기마저 따뜻해진 느낌이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매니저가 히터를 틀어놨지만 따뜻해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라고 하더니 그게 지금인가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지금은 연기에 집중할 때.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소영은 무대를 이어나갔다.

연습생들의 무대가 끝나면 사람들은 박수로 격려했다. 그리고 다음 무대 전까지 각자에게 주어진 평가지를 작성했다. 모든 평가지는 무기명으로 작성되며, 대훈도 다른 직원과 마찬가지로 평가지를 기록했다.

“아직 어설프지만 나쁘지 않아요. 그쵸?”

저들이 모두 D&D 엔터테인먼트의 얼굴이 될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흐뭇해지는 걸까? 냉정하게 평가를 해야 함에도 1기생이기에 각별한 애정이 가는 것인지 대훈의 입가에서 미소가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너무 높이지만 않는다면 나쁘지 않다고 할 수 있겠죠.”

반면 곁에 앉은 팀장들은 냉정한 시선으로 평가지 항목들을 체크해 나갔다.

“그런데 이렇게 비교해보니까, 역시 연습 때 충실했던 아이들의 실력이 바로 드러나네요. 연습이 잘 된 친구들은 잘 떨지도 않고 자기가 준비한 것들을 잘 소화해 내는 모습이에요.”

“그런가 하면 무대 체질이라고 느껴지는 친구들도 있어요. 누구라고 말하면 안 되겠지만, 아까 보는 데 연습실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눈빛이 나오더라니까요?”

“아, 누구 말하는지 알 거 같네요. 아마 비슷한 느낌을 받았나 봐요.”

연습생들의 무대가 이어질수록 그들을 가르쳤던 트레이너들의 긴장도 조금씩 낮아졌다. 생각보다 실수하는 연습생들도 적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나은 모습이라 체면치레는 하겠다는 판단인지 처음과 달리 말문이 트여 한 사람 한 사람이 끝날 때마다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그러나 반대로, 무대 뒤편 대기실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긴장도가 올라갔다. 무대를 마치고 나온 연습생들은 겨우 마쳤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고, 눈물을 흘리는 연습생들을 달래는 연습생과 스태프들의 분주함 속에 다음 무대를 준비하는 연습생들의 긴장감은 배로 올라갔다.

“허억, 허억.”

“숨 크게 쉬어.”

“숨이, 안 쉬어져요.”

더러 과호흡증상을 보이는 연습생도 있었다. 매니저는 당황하지 않고―그것까지 미리 준비해뒀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기에 깜짝 놀라게 만든―호흡기를 들고 와 입에 붙이고 호흡을 도왔다.

“이런 경우가 있어서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하는 거야.”

카페인이 든 음료가 과호흡을 촉진시키는 경우도 있다며, 연습생들에게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지시해뒀던 매니저였다.

“다음 누구니?”

“저요.”

잔뜩 긴장하여 새된 목소리가 나와버리니 지레 놀라 입을 틀어막는 연습생을 보며 매니저가 다독였다.

“긴장하지 마. 다른 사람들 봤지? 그냥 침착하게 하면 돼. 그리고 팩은 떼도 괜찮을 거 같아. 아까 다른 애들 말 들어보니까, 오히려 이 팩 때문에 신경 쓰인다고 하더라.”

“네.”

“설령 실수해도 머뭇거리지 말고, 멘탈 꽉 붙잡아. 연습한 대로 하면 돼. 알겠지?”

연습생은 고개를 끄덕이고 무대로 나가는 문으로 향했다.

“잘해.”

“네, 언니.”

촉촉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동생을 격려한 아름은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보지만 입 주위의 근육이 떨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여서 관뒀다. 옆을 돌아보니 거울 속에 평소 보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 전 격려한 동생의 무대가 끝나면 바로 자신의 차례다. 아름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대본을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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