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37화 (837/956)

평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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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도 아침을 잘 먹지 않거니와 먹어도 체중 관리를 위해서 소식을 하는 편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허기가 져서 도저히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만약 지금 뭔갈 먹는다면 분명 체하거나 혹은 배탈이 나서 하루 종일 고생할 것 같다는 예감에 선뜻 수저에 손이 가지 않는다.

“미숫가루라도 타 줄까?”

보다 못한 어머니의 타협안에 아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긴장하면 배고픈 줄도 모른다던데, 자신은 왜 이럴까, 라는 생각을 되뇌며 어머니가 건넨 잔을 받았다. 바로 앞에 서서 딸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하고. 다치지 말고.”

“네.”

딸이 평소보다 예민하다는 것을 눈치챈 탓인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딸을 배웅하는 어머니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아름은 집을 나섰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회사로 가는 중에 아름은 오늘 평가받을 연기에 대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반복했다. 며칠 전, 강사와 김단유 이사가 함께 동석한 자리에서 평가받을 때, 표정이 너무 굳어있고 표현력도 단순하다는 모진 평을 들어야 했기에 아름은 계속 얼굴 근육을 풀어주며 이런저런 표정을 짓는 연습을 했다. 문득 건너편 마주 앉은 자리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푹 숙이긴 했지만.

“내일 있을 월말 평가 결과,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연습생에 한해 광고 모델로 데뷔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

청천벽력같은 포상 소식에 연습생들은 다들 발등에 불 떨어진 것 마냥 놀랐다. 왜 하필 그 이야기를 평가 전날 알려주는 거냐는 질문에 강사는 만약 이런 이야기가 없었으면 열심히 하지 않을 작정이었냐고 되물었다.

‘과연 미리 알았다면 더 열심히 했을까?’

당연한 소리다. 하지만 더 열심히 한다고 해서 더 나아졌을까 묻는다면 글쎄,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실력이었다. 결국 강사가 말한 건 평소에도 마지막이라 생각할 정도의 각오로 연습에 임하란 소리였겠지만, 아름에겐 또다시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자신의 것이 안 될 거란 소리처럼 들렸다.

‘해보지 않고선 모르는 거야.’

지난 평가 때, 그를 비웃겠노라 해놓고선 오히려 어설픈 연기를 선보여 창피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기억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애써 누르며, 아름은 들고 있던 가방을 추슬러 지하철에서 내렸다.

저도 모르게 바빠진 걸음에 숨이 가빠진다.

****

“일찍 왔네요?”

“안녕하세요, 팀장님.”

“오늘도 우리 김이사님은 신수가 훤하시네요. 날이 갈수록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요.”

“이럴 때는 제가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건가요?”

팀장 곁에서 미소 짓고 있던 대훈에게 물었더니, 대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말하긴 뭘 말해요. 그냥 적당히 맞장구쳐주면 되지.”

“제 얼굴에 금칠하는 데 맞장구를요?”

“뭐 어때? 단유씨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칭찬인지 험담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어지네요.”

단유의 반응에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웃던 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들어보니, 요 며칠 전에 우리 연습생들 기를 팍팍 죽여놓았다면서요?”

“그냥 느낀 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직언직설이 우리 김이사의 특기 아닌가요? 그러니 잘난 얼굴보고 잘났다 말하는 게 뭐 어떠냐 이 말이지요.”

“말조심 하란 소리로 듣겠습니다.”

단유의 여전히 심심한 반응에 팀장이 턱을 긁으며 물었다.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말 자주 듣죠?”

“네.”

“다행이네요. 혹시 이사님께서 절 싫어하거나 부담스러워서 그러시는 건 아닌지 걱정했거든요.”

“제가 팀장님을 싫어할 이유가 있나요?”

“그러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사님이 절 싫어할 이유가 없길래, 혹시 제가 못생겨서 가까이하기 싫으신 건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할 뻔했네요.”

단유는 팀장과 대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게 직장 개그라는 겁니까?”

“우리 애들은 좋아하던데.”

“저도 빠른 시간 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군요.”

“무슨 노력까지. 아무튼 인사는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대훈은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마무리시키고 화제를 돌렸다.

“오늘 평가는 지난 번과 조금 다르게 해볼까 하고.”

“어떻게요?”

“지난번에 김 이사가 충고해준 방식을 있잖아요? 그걸 한번 적용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네?”

물론 대훈이 말하는 게 지난번 단유 본인이 했던 평가단의 확대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후 일언반구도 없었기에 그냥 그렇게 지나가나보다 했었다.

“역시 회사 외부의 사람들을 평가단으로 초빙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으니, 회사 내부에서 해결하기로 했는데, 기왕에 하기로 한 건 조금 판을 크게 벌려보려고.”

“어떻게요?”

단유의 물음에 대훈의 장난기 가득한 눈이 빛났다.

본래 단유의 이야기를 듣고도 대훈은 현실적인 이유로 실행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연습생이지만, 그래도 나름 고르고 고른 인재라 타 기획사의 눈에 띄었을 때 ‘영 좋지 못한’ 방법으로 뺏길 위험도 없지 않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기껏 좋은 인재를 뽑아 잘 키우고 있는 와중에 다른 곳에 뺏기면 그간 들인 비용은 둘째치고 그 연습생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회사 전체의 분위기가 흐트러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게다가 같은 동기가 빠지게 되면 연습생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그러니 이런저런 사정들을 고려하면 단유가 말한 외부 평가는 어렵다는 결론이다.

하지만 며칠 전 회식을 하던 자리에서 우연히 월말평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중에 한 직원이 가볍게 한 이야기가 힌트가 되었다.

****

시은의 영입을 무사히 완료한 성과를 기념하기 위해 나름 맛집으로 소문난 고깃집에서 회식을 하던 와중이었다. 모두 얼큰해진 얼굴로 건배하며 웃고 떠들 때 한 직원이 입을 열었다.

“근데 지금 광고 건이요, 지금 연습생들에게 너무 무리가 아닐까요? 이런 이야기 좀 그렇지만, 우리 회사 연습생들은 전부 초짜만 뽑았잖아요?”

“태준씨, 말 조심해. 취한 거야?”

직원의 말은 자칫 오디션 심사위원이었던 트레이너 뿐 아니라 고위층들을 싸잡아 비난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얼큰하게 취해있던 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혹은 그저 관대한 대표의 이미지를 고수하기 위해서 그저 너털웃음으로 아무렇지 않다고 손을 저었다.

“저도 걱정이 되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억지로 기회를 줬다가 자칫 회사 이미지만 망치는 건 아닐까 해서 말입니다. 실력도 없는 애들만 데리고 있다거나. 실은 전에 있던 회사에서 그런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그때 은근히 그 회사 소속 연예인들을 꺼린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거든요.”

회사의 네임밸류란 꽤 중요했다. 요즘은 회사의 간판이 소속 연기자들의 이미지를 좌우할 정도가 되었으니, 처음부터 제대로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다.

대훈도 그 점을 결코 소홀히 하진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그 점에 있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최고의 실력을 가진 트레이너들이 고르고 고른 멤버들입니다. 특히 발전 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두고 뽑은 애들이니 여러분들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서포팅을 한다는 생각으로 애정을 가져주시면 됩니다. 걔들이 혼자 클 수 없다는 건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우리가 더 열심히 할수록 그 아이들의 성장도 더 빨라질 겁니다. 우리가 그 아이들의 엄마 아빠가 되었다는 심정으로요.”

“자식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엄마 아빠도 있습니까?”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뱉은 말에 다들 왁,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말의 요지는 일이 워낙 많아서 자리에서 벗어날 시간도 부족한 데다, 연습생들도 연습실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드물어 얼굴 보기가 힘든 탓이다. 어느 부서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실제로 어떤 경우엔 데뷔를 앞두고 프로필 촬영을 한 뒤에야 이런 애가 우리 회사에 있었구나,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대훈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잠시 혼자 떠오른 생각을 짚어가던 대훈은 곁에 앉은 팀장을 붙잡고 말했다.

“혹시 말입니다.”

“네.”

“이번 월말 평가 때, 전 직원들 앞에서 평가를 보도록 하는 건 어떨까요?”

“네? 그게 무슨···.”

밑도 끝도 없이 나온 대훈의 제안에 들어 올리던 잔이 손끝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기왕에 내부의 일체감을 독려할 겸, 연습생들에 대한 평가도 받을 겸 해서 말이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문가가 아니라 평가가 어려울 텐데요. 아니, 그전에 여기 있는 사람들만 말하는 건 아니시죠?”

“물론입니다. 회사 내 전 직원을 말하는 겁니다.”

전 직원이라고 하면 대략 40여 명에 달하는 직원들을 일컫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연습실에 다 들어가기 힘들 겁니다.”

“장소는 다른 곳으로 해야죠.”

“하아, 대표님. 왜 일을 크게 벌리시려는 겁니까?”

“아까 팀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직원들은 전문가가 아니잖아요. 전문가가 아닌 이들의 시선에서 연습생들은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혹시 지난 번 김이사님이 제안하셨다는 그것입니까?”

눈치 빠른 팀장의 물음에 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팀장의 입에서 또 한 번 한숨이 나왔다.

****

“그럼 오늘 직원들은 일 안 합니까?”

단유의 물음에 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특별 휴가, 라고 하기도 힘든 게 업무의 연장선이니까. 그렇죠?”

“네. 특별 업무라고 해두죠.”

팀장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여전히 골이 아프다는 투로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대훈의 말에 대꾸했다.

“그럼 어디서 평가를 보기로 한 겁니까?”

“그것 때문에 몇몇 직원들이 고생 좀 했습니다. 장소 섭외하려고.”

장소를 섭외까지 했다는 이야기에 단유도 놀랐다. 생각보다 더 큰 규모의 일을 벌인 대훈의 추진력에도 놀랐고, 그렇게까지 자신의 제안을 고려해주었다는 생각에 고맙기도 했다.

“다 우리가 신생이라 가능한 거 아니겠습니까?”

‘신생’이기에 뭐든 할 수 있다는 논리는 대훈에게 만능인 모양이었다.

“예? 회사에서 하는 게 아니라고요?”

월말 평가를 앞두고 잔뜩 긴장하고 있던 연습생들 역시 회사 밖으로 나간다는 소식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위에서 하라는데 못 하겠다 말할 수도 없었고, 게다가 이번 평가가 비록 작은 광고라도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이 걸렸다는데 포기할 수도 없는 일.

그리하여 부랴부랴 옷과 소지품을 챙긴 연습생들을 임시 매니저가 챙겨 데리고 나왔다.

“어디서 하는데요?”

“가보면 알아.”

그리고 다행히 가기로 한 장소는 멀지 않아 도보로 이동해도 충분했다. 몇 개의 건널목을 건너 20여 분 정도 걸어가니―누구는 있는 줄도 몰랐던―중학교의 입구가 보였다. 주말이라 학생은 없고 대신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조기축구회 선수들과 다른 한쪽에서 뭔갈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만이 전부였다. 간단한 입간판을 세우고 있었는데, ‘D&D 엔터테인먼트 사내 행사 중’이라는 간단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괜히 창피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아름을 비롯한 연습생들은 강당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마이크 앞에 선 대훈이 간단하게 마이크 테스트를 한 후, 강당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직원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음, 주말에도 이렇게 나와주신 임직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일전에 알려드린 바와 같이 오늘은 우리 회사 연습생들의 월말 평가가 있을 예정입니다.”

대훈은 간단하게 오늘 행사에 대한 취지를 설명했다.

“연습생들에겐 자신들이 갈고 닦은 실력을 다른 누구보다 먼저 자신들을 서포팅해주는 여러분들에게 선보일 시간이 될 것이며, 여러분은 과연 누가 우리 회사를 대표하는 얼굴이고 목소리일지, 정확히 보고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행사를 통해 이들에게 보다 깊은 애정을 가져주시고 여러분들이 각자 맡은 자리에서 하는 일들이 모두 이들을 위함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박수가 잠시 잦아들 때쯤 한마디를 덧붙였다.

“비록 지금은 이런 강당에서 허술하게 진행하지만, 나중에는 좀 더 멋진 곳에서 제대로 준비해서 이런 행사를 이어나가고 싶네요.”

이번엔 좀 더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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