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y with m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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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생각나 사무실 한쪽의 전면 유리창으로 된 창가로 향하니 하얀 창틀 위에 올려 둔 적갈색 토분 안에 담긴 손바닥 크기의 아비스가 넓고 가냘프면서도 곧은 잎을 세운 채로 햇볕 아래에서 싱그러운 녹빛을 뽐내고 있었다. 공기정화용으로 사무실 같은 곳에서 많이 쓰이기도 하고 보기에도 무난해서 사무실이나 좁은 공간에 인테리어 장식용으로 활용이 되는 식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햇볕이 내리쬐는 창가 곁에 두는 것은 좋지 않다. 왜냐하면 아비스는 본래 음지식물이라 직사광선을 받으면 금방 잎 전체가 황색으로 변해버리며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도록 직사광선이 닿지 않는 곳에 두어야 오래도록 그 녹빛을 유지하며 살 수 있다.
사람도 그러하지 않을까? 모두가 환한 태양 아래에서 빛을 받으며 살 수는 없고, 꼭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법도 없다. 어떤 경우엔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삶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빛나지 못하고 음지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순 없지 않은가. 다른 사람과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그의 삶을 그르다고 평가할 순 없는 법이다.
결국,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자신이 만족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타인의 평가가 삶의 지표가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되고, 세간의 기준에 따라 자신의 삶이 흔들려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어쩌면 단유는 지아에게 친절만 베푼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단지 그늘진 모퉁이에 있는 듯 없는 듯 있어야 할 아비스를 미관상 좋다는 개인적인 사유로, 억지로 창틀에다 옮겨 놓는 짓과 비슷한 행동을 단유가 자행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아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라고
‘글쎄.’
딱히 감사 인사를 받기 위한 행동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호기심에 벌인 일이었으니 지아로부터 그런 감사 인사를 받는 건 부담스러울 따름이라 단유는 그저 고개만 짧게 까닥여 보인 후 곧바로 돌아섰다.
다만 이제는 다른 이유로 지아를 지켜볼 일이다. 과연 그녀가 어떤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그리고 그녀는 과거의 그들, 단유에게 고맙다고 말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어떻게 다를지, 혹은 같을지.
상념에 빠져 있던 사이 투명한 창 아래로 지아와 그녀의 친구가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아래에서는 아름이 그녀들을 배웅하며 손을 흔들고 있고, 지아의 친구가 마주 손을 흔들며 인사를 받고 있었다. 지아는 여전히 감격인지, 흥분인지 모를 감정에 흠뻑 젖은 것처럼 보였고, 단유는 화분을 집어 들어 가까운 책상 위 비어 있는 공간으로 옮겨 두었다. 그리고 곁에 있던 포스트잇을 한 장 뜯어 펜으로 ‘햇빛이 없는 곳에 두세요’라고 적은 후 화분에 붙여두었다.
****
저녁에 대훈에게서 연락이 왔다.
―하하하.
일이 잘 풀렸던 모양이다. 다짜고짜 웃음부터 터뜨리는 대훈의 통화에 단유는 그저 멋쩍게 따라 웃을 뿐이었다.
사전에 곡이 유출되었다는 점 때문에 불쾌해하던 태원이었다.
“저희가 일부러 이런 일을 만든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이 연출된 것에 대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쪽이 왜 사과를 하십니까?”
“우선 제가 이 일이 벌어진 곳에서 가장 책임이 큰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것보다는 사실 태원씨께 부탁드리고픈 일이 있는데 어물쩍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일단 사과부터 하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고, 사과를 해야 한다면 역시 제가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작 그 곡을 유출한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군요.”
“이지아씨 말이죠? 그 아이는 다음에 제대로 자리를 마련해서 사과를 시키도록 하겠습니다만, 일단 오늘은 제가 대표로 사과드립니다.”
“왜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데요?”
“실은 그 이지아씨를 오늘 저희가 채용했거든요.”
“그 정도면 산업스파이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겠는데요?”
“그렇게 오해를 하실 수도 있겠지만, 실은 오늘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대훈은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이해를 부탁했다.
“···우여곡절이 있었다, 는 정도의 이야기를 꽤 장황하게 하십니다?”
“하하, 그런가요? 그래도 일단 상황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를 정확히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뭐든 숨기는 건 좋지 않지 않습니까?”
“좋아요, 아무튼. ···사실 대표님이 뭘 원하시는지 대충 짐작은 갑니다만, 말씀하시기 좋아하시는 분 같으니 기회를 드리죠. 뭘 원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태원씨가 작곡한 그 OST의 보컬을 저희 회사 소속 가수가 부를 수 있게 부탁드리려고 찾아온 것이죠.”
“오시기 전에 잠깐 알아봤지만, 실례일지 몰라도 대표님의 회사는 이제 갓 만들어진 기획사 아닙니까? 홈페이지는 있어도 아직 소속된 가수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물론 지금까지는, 아니 어제까지는 없었지만, 오늘, 지금부터는 있을 예정입니다.”
“오늘이요?”
“태원씨가 조금 도와주신다면 말입니다.”
“제가 도울 일이 생각보다 많군요. 제 곡이 미리 유출된 것을 너그럽게 이해해야 하는 것도 제 몫이고, 그쪽 회사의 가수 문제에도 도움을 줘야 하고요.”
“그런가요? 하하, 만약 성공한다면 제가 태원씨를 은인으로 모시도록 하죠.”
“됐고, 그래서 대표님이 생각하는 가수는 누굽니까?”
“시은씨입니다.”
“시은? 시은? 제가 생각하는 그 시은이요?”
“네, 맞습니다. 그 이름으로 활동하는 가수가 하나 뿐이라는 게 참 다행이죠? 헷갈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시은씨가 그쪽 회사 소속이라고요?”
“음, 그게 조금 복잡한 상황이긴 합니다만, 이왕 솔직해진 거 다 말씀드리자면···.”
대훈이 그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추려 이야기했다. 그런 사정이야 별 관심이 가지 않던 태원이었지만, 일단은 대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만약 제가 대표님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시은씨도 그쪽 회사와 계약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가요?”
“표면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령 태원씨의 곡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시은씨는 반드시 영입할 테니까요. 물론 태원씨 허락도 받으면 금상첨화겠지만.”
“정말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저 혼자라면 허세겠지만, 다행히도 제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있으니까요. 그들이 뒤에 있으니 자신만만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할 정돕니다.”
“대단한 빽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하하, 관심있으시면 태원씨도 이참에 저희 회사로 오시겠습니까? 그 대단한 빽들이 태원씨를 대환영할 겁니다.”
지금도 회사에서 연락을 기다리는 직원들을 거론하며 웃음을 지으니 태원은 대훈의 회사가 어쩌면 나쁘지 않은, 어쩌면 앞으로가 기대되는 회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울러 꽤 성격 좋은 대표가 있으니 성공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하며.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눈앞의 사내는 지금도 충분히 자신감에 차 있으니까.
“전 지금 회사에 만족하니까 사양하겠습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죠. 시은씨 어떻습니까?”
“대표님이 솔직하게 말씀하셨으니,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네, 나쁘진 않습니다. 확실히 시은씨의 목소리라면 이 노래에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물론 제대로 들어봐야 확신할 수 있는 문제지만.”
“그럼 제대로 들어보시도록 하죠.”
“어떻게요?”
“시은씨를 여기로 부르면 되지 않습니까?”
“하하, 대표님. 시은씨가 여기 오면 아무리 저라도 쉽게 싫은 소리 하기 힘들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부르자는 거지요. 만약 태원씨가 허락을 하신다면 같이 작업을 해야 하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미리 얼굴 보고 인사하고 이야기도 나누면 좋지 않습니까?”
“부르면 올 수 있답니까?”
“다행히도 내일 오후까지 스케줄이 비어있다는군요.”
“공교롭게도 말이죠?”
“네. 공교롭게도.”
“이래서 호기심이란 게 무서운 것 같네요. 호기심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을 지금 실감하고 있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저도 궁금해지네요. 과연 호기심이 살인까지 가능한지 말이죠.”
너스레를 떨며 대훈은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넉살에 태원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
―그렇게 됐어요.
“그렇군요. 잘 됐습니다.”
―다 단유 씨 덕분입니다.
“그런 소린 마시죠. 전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말이죠.”
―전 지금까지 모든 일이 모두 단유 씨가 뒤에서 조종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회사를 만든 일부터, 오늘 계약 건까지. 단유 씨가 개입하는 일이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잘 풀리니까요. 행운의 신이 단유 씨의 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될 정돕니다.
“오글거리네요, 방금 그 말은.”
―아, 지금 제가 술을 한 잔 먹어서 괜히 감성적인 된 탓도 있습니다. 기분이 좋거든요. 아, 혹시 괜찮으면 잠깐 나오실 수 있습니까? 일도 잘됐는데 같이 한 잔 하시죠? 여기 태원씨도 계시는데, 인사도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제가 낄 자리는 아닌 거 같은데요.”
―아니긴요. 1대 투자자인 단유씨가 함께 한다면 태원씨도 싫어하지 않을 겁니다. 이게 다 인맥이라는 거니까요. 아마 원장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오늘은 두 분이서 즐기시길 바라고, 만약 다음에 우연히 자리가 된다면 그때는 참석토록 하겠습니다.”
―어쩐지 ‘우연’이라는 단어가 심히 강조된 듯 하지만, 뭐 좋습니다. ‘우연’도 노력해서 만들어내야죠. 기대하십시오.
마지막까지도 웃음을 흘리는 대훈과의 통화를 마친 후, 단유는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즐겨라.’
회사에 다니면서부터 단유는 색다른 즐거움을 얻고 있다. 매일 책상에 앉아 공부하며 얻던 즐거움은 지금도 포기하고 싶지 않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사람들과 부딪히고 무언가를 함께 이루어내면서 얻는 희열이란게 꽤 신선하고 즐겁다. 비록 대훈처럼 앞장서서 뭔갈 주도적으로 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대훈처럼 하라고 하면 절대 사양하고 싶다는 마음이 크지만, 이렇게 뭔갈 이루어낸다는 게 처음의 기대 이상으로 즐거운 기분이다.
혼자서 공부하고 혼자서 프로그래밍을 짜고 혼자서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던 단유와 달리, 단체로 모여서 목표를 설정하고 토론을 하고 분담된 자신의 몫을 최대한 충실히 이행하여 마침내 결실을 거두는 그 과정들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다만 그런 과정들을 지켜만 보다 보니 괜한 생각도 든다. 뭐랄까.
‘소외된 느낌?’
사실 누구도 단유를 소외시키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 반대다. 다들 단유를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 난 모습이니까. 계속 거부한 건 오히려 단유다.
하지만 단유는 그게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 생각해서 계속 거절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오늘과 같은 자리에서 단유는 대놓고 기분 좋은 티를 내기가 어렵다. 모두가 기뻐해도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생각하니까.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배정받고 움직이지만, 단유는 그 속에 어떤 역할도 맡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단유는 스스로 격리된 기분이었다.
어쩌면 하얀 창틀에 어울리지 않게 놓여있던 아비스는 자신이 아니었을까? 공기정화니, 인테리어니 하며 갖은 수사를 붙여도 결국 빛을 거부하는 음지식물이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에 심사가 복잡해지자 단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컴퓨터를 켜고 며칠 동안 짬짬이 틈 내어 만들던 프로그래밍을 완성시키려 코드를 작성해나갔다.
밤이 깊어, 검은 하늘에 긴 꼬리를 번뜩이며 사라지는 별똥별이 등장하는 흥미로운 일도 있었지만 단유는 오직 작은 모니터 속의 수십 수백 줄의 코드에만 집중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를 때, 마침내 단유는 마지막 코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예전처럼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집중력을 발휘했다면 며칠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회사 일이다 뭐다 하면서 여러 가지로 시간을 빼다 보니 완성이 늦었다.
일단 시험 삼아 프로그램을 작동시켜 보기로 마음 먹고 단유는 실행 명령어를 입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