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29화 (829/956)

Stay with m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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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이지아라고 합니다.”

나이는 몇 살이며, 어느 대학교 무슨 전공이며, 어디에 산다는 둥의 정보가 띄엄띄엄 흘러나오는데 인내심 부족한 사람은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갈 정도라, 대훈의 눈치를 살피던 A&R팀장이 소개를 막았다.

“그런 거 말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다라는 걸 한 문장으로 요약해서 표현할 수 없나요?”

“한 문장으로요?”

“임팩트 있게요.”

지아는 슬픈 고양이 눈을 하고 심사위원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겨우 용기 내어 입을 뗐다.

“저는···살아있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삶을 살고 있는 여자입니다.”

조용해진 연습실. 심사위원들 중 한 명이 고쳐 앉으며 내는 부스럭대는 소리가 전부였다. 어색함에 한 사람이 기침을 하고, 고개를 틀어 옆 사람을 보느라 눈동자 돌아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의 어색한 침묵 속에서 대훈이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저는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남들이 이렇게 살아가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고 따라갈 뿐이지, 저 스스로가 제대로 생각해서 내렸던 결정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미래가 없는 인생인데다 현재의 삶도 딱히 행복할 건 없고, 앞으로의 미래에도 지금의 모습에서 크게 변할 것 같진 않으니, 죽은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기분이 어때요?”

창모가 물었다.

“슬퍼요.”

“그럼 혹시 지금의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네?”

“코드 배웠죠?”

“네, 화성학 시간에···.”

“그럼 대충 코드 진행도 알 테니까, 지금의 감정을 담은 음악을 한 번 연주해 보겠어요? 오리지날로.”

기성곡을 따라 연주하지 말고, 즉석에서 곡을 만들어 연주하란 이야긴데, 그게 가능할까?

“짧아도 좋으니까, 제대로 자신의 감정을 담아서 연주해봐요.”

지아는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가 한숨을 내쉬며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당장에 생각나는 건 마이너 코드로 연주해야겠다는 것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건반을 짚는 손가락마저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창모는 괜찮다고 그냥 손이 움직이는 대로 연주해보라고만 했다.

‘내 감정.’

앞서 말할 때야 단순히 ‘슬프다’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복잡했다. 슬픔, 짜증, 분노, 실망, 좌절, 미움이란 감정이 죄다 섞여 있는 감정이라 과연 어떻게 그것을 음악으로, 그것도 익숙하지 않은 즉흥 연주로 풀어낼 수 있을 것인지.

“못하겠어요?”

지아의 머뭇거림에 대훈이 묻자, 지아는 속시원히 답은 못하고 그저 눈물만 글썽이다 무심코 대훈의 곁에 앉은 단유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다가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 같은 검은 동공이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봐준다는 사실에 괜히 용기가 났다. 티끌보다 더 작은 용기지만 그것만으로도 지아에겐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해 볼까’라는 마음으로 바뀐다. 건반을 눌렀을 때 나는 첫 음이 두렵고, 그 첫 음 뒤에 어떤 음을 내야 할지 막막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란 생각도 든다.

여전히 자신을 믿지 못하지만, 그래도 수년간 힘들여 배운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 않겠냐는 불확실한 희망에 기대어, 결국 건반을 눌렀다.

1분여 정도는 누가 들어도 어색하다 싶을 정도의 사운드가 연습실을 메웠다. 자신감 없는 연주는 물론이고 달리 특색이 없다 싶은 멜로디에 심사위원들은 처음의 호기심이 무색하게 점점 심드렁해졌다. 그러나 조금씩 템포를 찾기 시작하나 싶더니 생각 외로 나쁘지 않다는 정도의 멜로디로 진행이 되고, 무엇보다 멜로디 속에 담겨져 있는 ‘진심’이 심사위원들에게 조금씩 전달되기 시작했다.

안개가 낀 듯, 혹은 너무 어두운 나머지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해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미숙한 아이처럼,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주위만 두리번 거리다, 이대로 있다가는 영원히 떠나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느낀 것인지 한 발을 내딛었다.

스타카토로 처리된 톡톡 튀는 멜로디는 흥겨움보다 긴장된 마음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표현하고, 마이너 코드로 진행되는 비장한 음률은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주변에 위축된 아이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결코 빛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두려움과 걷고 있는 길에 대한 불확실이 옥타브를 오르락 내리락거리는 멜로디로 구축되어 듣는 이마저 암울하다 느끼게 만든다.

지아는 건반만 바라보며 그저 느낌대로,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만을 따라가느라 어느새 심사위원들의 시선마저 잊어버렸다.

그래도 첫 즉흥곡이어서인지 오래 이어지진 못했다.

“마무리도 어설펐어요.”

창모가 펜을 굴려 뭔가를 끄적이면서 설명했다.

“하지만 전에 쳤던 두 곡과 비교하면 확실히 와닿는 게 있는 연주였습니다. 그렇죠?”

창모의 물음에 다른 심사위원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곡의 연주는 현대적이라기보다는 조금 변형된 클래식을 듣는 기분이었습니다만, 아무리 음악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연주가 앞서의 것들보다 훨씬 듣기 좋은 곡이었음은 여기 계신 분들 모두가 동의할 겁니다. 스스로는 어땠나요? 만족하시나요?”

지아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조금 후련한 것 같기는 해요.”

소심한 지아의 답변에 창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마음을 담아 연주한 탓일 겁니다. 저희도 그렇거든요. 온 진심을 다해 곡을 쓰고 연주하면 한 곡만 연주해도 온몸에 힘이 다 빠지고 탈력감에 쓰러질 것 같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보여줬다는 만족감 때문에 후련해지기도 하거든요. 아마 지아씨도 지금 그런 기분이리라 생각되네요.”

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이 탈력감이 바로 후련하다는 것이구나, 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는 듯.

창모는 손바닥으로 책상을 두어 번 두드렸다. 대훈이 왜 그러냐고 돌아보자, 창모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 욕심이 나는 부분이 있네요. 첫 즉흥곡도 나쁘지 않고, 클래식만 했다는 사람치고 리드미컬한 부분도 좋습니다. 아마 기본이 잘 다듬어진 탓이겠지만,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클래식 쪽으로만 단련된 탓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어쩌면 그게 더 장점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너무 획일화라고 해야 할까, 정형화된 전개방식을 많이 따르는데, 가장 전통이라 할 클래식적 구성을 첨가하면 오히려 신선함이 살아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요지가 뭡니까?”

“같이 작업해 보고 싶다는 거죠.”

지아가 놀란 눈으로 창모를 바라보았다.

“물론 지금 실력으로는 한참 부족하지만, 이것저것 가르치면서 저도 아이디어를 얻다 보면 꽤 괜찮은 작업물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되네요.”

“그래요? 잘됐네요.”

“물론 대표님 허락이 있어야겠지만요.”

대훈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반대편에 앉은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괜찮습니까?”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게 물을 이유가 있나요? 대표님 뜻대로 하시죠.”

“뭐, 그렇다면. 지아씨?”

“네.”

“지금 이야기 들으셨죠?”

“···네.”

“그 전에 개인적인 소감부터 말하자면, 지아씨의 연주는 잘 모르는 제가 듣기에도 좋았습니다. 조금 우울한 느낌이 강하지만,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좋았어요. 아무튼, 저는 충분히 지아씨의 장점을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되는 건 아니에요. 만약 여기가 진짜 오디션장이고, 작곡가를 뽑기 위한 자리였다면 전 지아씨에게 불합격을 줬을 겁니다. 지아씨보다 훨씬 능력도 좋고, 우수한 인력이 있을 거란 믿음이 있으니까요.”

지아도 대훈의 설명에 납득했다. 대학에서 숱하게 봤던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 중에 질투가 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열거하면 끝도 없을 테니까. 지금은 그저 좋게 봐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게 진심이었다.

“그래도 창모씨가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대표로서 모른 척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고, 무엇보다···.”

대훈은 단유를 바라보며 코를 씰룩거렸다.

“우리 김이사님께서 이런 자리까지 마련하셔서 보라 하신 데는 다 이유가 있겠거니, 라는 생각에 당분간 지아 씨를 채용해보도록 하죠.”

“아니, 잠시만요. 거기서 제가 왜 나오죠? 무엇보다 전 딱히 다른 의도는 없었는데요?”

“글쎄요. 그래도 김이사님의 안목을 생각하면 허투루 보내기가 아까워서요.”

“제 안목이라뇨?”

여기서 대훈은 단유에게만 고개를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무려 저를 이 회사의 대표로 만드신 분 아닙니까.”

이런. 절대 그런 안목 따위 없었는데, 뭔갈 오해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대훈은 단유의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 단유의 어깨의 툭툭 두드리며 다 안다는 표정으로 웃은 뒤 다시 지아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지아씨께 제안을 하는 건데, 지아씨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지아씨가 싫다면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면 그만이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절대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자신도 없다. 하지만 자신 없다고, 마냥 거절할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 말처럼 기회였고, 기회가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냈다. 만약 이를 거절하면 바보 소리밖에 더 들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당장 어떤 미래가 앞에 있을지, 자신이 연주했던 것 이상으로 쓸쓸하고 암울할 수도 있지만, 당장의 선택은 그런 것들을 전혀 염두할 수 없었다.

무려 자신을 선택해준다지 않는가?

그리하여 지아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회사에 출근하기로 했다. 일단은 작곡팀에서 수습으로 일하다가 이후 평가에 따라 정식 채용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잘 됐다, 지아야!”

친구의 호들갑스러운 칭찬에도 지아의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기쁘고 좋은 일이지만, 마냥 기쁘다고 할 수도 없는 게 우선은 자신의 역량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이 한 원인이고,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곁에 있는 친구 때문이었다.

“미안해.”

“뭐가 미안해? 얘는 또 이상한 소리하네. 내가 언제 이 회사에 들어오고 싶댔니? 일이 이상하게 풀리긴 했지만, 너한테 잘된 일이니까, 다른 건 다 잊고 열심히 하도록 해봐. 혹시 알아? 나중에 유명한 작곡가가 되어서 돈 엄청 벌지? 만약 그렇게 되면 그때 가서 나한테 보답을 하던지 하면 되는 거 아냐? 기대해도 되지?”

지아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곁에 서 있던 아름도 지아의 입사(?)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속이 그렇게 편하진 않았다. 뭔가 설명할 수 없지만, 많은 상념을 떠오르게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

“단유 씨, 죄송해요.”

“아뇨, 대표님 바쁘신 건 제가 잘 아는데요. 오늘은 공 이사님이랑 같이 공부나 하죠.”

“그러실래요? 어쨌든 나중에 단유씨께는 꼭 보답하겠습니다.”

“보답이라뇨, 계속 그런 말씀 마세요. 한 것도 없이.”

“세상에, 이런 좋은 건수를 물고 와주신 분이 누구신데요? 다 단유씨, 아니 김이사님 덕분입니다. 이참에 진짜 이사직으로···.”

“다녀오세요, 대표님.”

“하하, 그럼.”

대훈은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단유에게 인사를 한 뒤, 지원팀장과 함께 외근을 나갔다. 이제 시은이란 가수와 만나 합의를 끝낸 후, 곧바로 태원이라는 작곡가가 있다는 스튜디오로 달려갈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느슨하지 않은 일정이었고, 하나라도 무산이 된다면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지만, 대훈은 스스로 말했듯 자신감 하나로 일을 추진했다.

‘자신감이라.’

대훈은 말 한마디, 표정, 눈빛에서 자신감이 팍팍 드러나는 스타일이었다. 대표가 되기 전에도 그랬지만, 된 후에는 더욱 그런 점이 부각되었다. 확실히 그런 대훈을 보면, 알게 모르게 대훈의 능력과 그가 추진하는 일에 대한 신뢰감이 높아지는 면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단유와는 정반대라고 해도 무방하다. 단유는 어릴 때부터 모종이 이유로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기만 했지, 자신을 부각해 주위의 모두가 자신을 우러러보게끔 하는 일은 한 적이 없었다. 의도치 않게 그런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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