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23화 (823/956)

Delight(7)-수정(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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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단유는 뭔가 많이 헷갈리는 기분이었다. 최초 투자를 결정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되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투자를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처음엔 그저 투자만 하고 신경을 끊으려 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개인적인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픈 마음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마법은 이제 단순히 개인적 호기심만으로 연구하는 분야가 아니게 되었다. 이 세계에 자신 외에도 마법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이상, 만약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도 방심한 상태로 맞닥뜨리지 않으려면 자신의 마법 실력을 키우는 것은 필수나 마찬가지.

더구나 그 일이 벌어졌을 당시, 단순히 단유만 위험한 게 아니라 단유 주위의 사람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음을 고려하면 결코 방심하며 지낼 순 없었다.

그런 이유로 단유는, 어차피 학교도 졸업했고 남들처럼 경제력 유지를 위해 취업을 해야 하는 경우도 아니니까 부쩍 늘어난 여유 시간을 마법 연구에 투자하며 지내고픈 마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단유는 매일 회사로 출근을 하고 있었다. 취업을 한 것도 아니면서, ‘이사님’ 소리 들으며 하루의 많은 시간을 회사 건물에서 보내고 있었다.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던 회사 일을 직간접적으로 배우면서 말이다.

그런데 또 우습게도, 거기서 재미를 찾아낸 단유였다. 뭐든 배우는 입장이 되어 새로운 것을 깨우쳐가는 과정이 즐겁다고 여기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처음의 계획은 의도치 않게 많이 미뤄진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고민이다. 과연 어느 쪽으로 집중을 해야 하고 시간 분배를 해야 효율적인지. 마법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당장에 위협은 없고, 시간을 많이 투자한다고 해서 성과를 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더구나 살상을 목적으로 한 마법의 개발이 목적도 아닐뿐더러, 마법이라는 영역 전체의 향상이 목표인 연구과제였다. 다급하게 다룰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솔직히 회사 업무를 배우는 쪽에 약간 더 비중을 두고 있지만, 당연히 그게 정답은 아니라는 고민은 늘 하고 있다. 가장 좋은 건, 역시 두 분야 모두를 섭렵하는 것이고, 이를 조정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시간 분배를 고민하는 것이다.

쉽게 결정하기 힘든 그 문제를 두고 고민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회사 근처로 이동한 단유는 뚜벅뚜벅 걸어 건물 1층의 넓은 로비로 들어섰는데,

“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과 맞닥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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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어쩐 일이세요?”

단유가 다른 인사 없이 대뜸 물으니, 지아는 쭈뼛대며 말을 더듬었다.

“그게, 그러니까···.”

보다 못한 친구가 지아를 대신해서 나섰다.

“사과하고 싶어서 왔어요.”

“그쪽이요?”

“아뇨, 저 말고요.”

뭘 모른 척하냐는 듯 힐난하는 듯한 눈빛을 쏘아내는 그녀의 받아내던 단유는, 이윽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지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과를 한다고요?”

“···네.”

“무슨 사과요?”

딱히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높낮이 없이 평이한 어조로 묻는 물음이었으나, 이번에도 상대의 의지와 무관하게 마치 자신을 낮춰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버린 지아는 스스로 위축되어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는 지아가 답답해서 친구가 다시 나섰다.

“기껏 사람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러 왔다는데 그게 무슨 태도예요?”

어찌 보면 당돌하다고까지 여겨지는 말이었지만, 단유는 이성적으로 자신의 반응을 이해시켰다.

“사과를 하라고 종용한 바도 없는데,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와서는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기나 하면서, 거기다 저보고 어떤 태도를 갖추라는 겁니까?”

“저기요, 지금 얘 얼굴 안 보여요? 그쪽이 곤란한 것보다 얘가 더 곤란해 하고 있잖아요? 왜 사람을 앞에 두고 무안하게 만들어요? 그런 태도가 더 무례한 거 아닌가요?”

그렇게 쏘아붙인 친구는 지아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됐어, 지아야. 그냥 가자. 잘못 생각했어. 이런 못된 사람한테 사과나 하려고 오는 게 아니었어. 가자.”

그러나 지아는 걸음을 떼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친구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낸 후, 단유를 힐끗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허리를 깊이 숙인 지아는 용기를 쥐어 짜냈다.

“죄송합니다. 그때는···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단유는 묵묵히 지아를 쳐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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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자리를 옮기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안내 데스크의 직원 뿐만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던 직원들은 금맥을 찾은 광부마냥 모여서는 금맥을 온전히 캐내려는 것처럼 서로의 추측들을 교환하며 조금 전 벌어진 사건(?)의 서사를 추리해나갔다.

“단순한 연인관계는 아닌 거 같지?”

“여자가 바람을 피운 걸까?”

“바람을 피웠다고 해서 남자가 일하는 회사까지 와서 저렇게 허리를 굽힌다고? 말이 돼?”

“안 될 건 또 뭐야? 내가 여자라면 그러고도 남았지.”

“그건 좀 억지다.”

“억지는? 김 이사 정도면 차고도 넘치지. 저 나이에 이사직인 데다가 들리는 소문에는 이 회사 투자금의 대부분을 김 이사가 댔다던데?”

“소문은 소문이야.”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니까? 인사과에 있는 이 대리 말로는 등재가 안 된 이사라는데?”

“등재도 안 됐는데, 왜 이사라고 불러?”

“그게 미스터리지. 대표님부터 전부 다 ‘이사’라고 부르니까, 으레 이사라고 생각한 거지만, 사실은 이사가 아니었던 거지.”

“그게 지금 일이랑 관계가 있는 이야기야?”

“그러니까 내 말은, 김 이사가 미스테리한 인물이란 이야기고, 그러니까 소문이 단순히 소문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고, 소문이 소문이 아니라면 김 이사란 사람은 여자들이 뻑 갈 정도의 남자란 이야기인거고, 그런 남자를 두고 무슨 배짱으로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여자 입장에서는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이렇게 회사까지 달려와서 매달리는 거라고 볼 수 있다는 이야기지. 오케이?”

“마케팅 쪽은 너 같은 사람들만 뽑는 거냐?”

“넌, 이쪽 일을 하려는 사람이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서 어디 써먹겠냐? 아무리 이 바닥이 알고도 속아야 하고, 모르고도 속아야 하는 곳이라지만, 모른다고 모른 채로만 있으면 절대 살아남지 못하는 곳이야. 알면서 모른 척해야 일 잘한다는 소리 듣고 올라갈 수 있는 곳이라고, 이 멍청아.”

“누구보고 멍청이래.”

“너처럼 순진해서야 앞으로 어떻게 될지 참 걱정이다.”

“내 걱정은 말고, 네 걱정이나 해라. 너네 팀 오후 미팅 있다고 안 했냐?”

“어어?”

그제야 허둥지둥 서두르는 동갑의 동기를 보며 혀를 차보지만, 그 역시도 서두르지 않으면 상사로부터 한 소리를 들어야 할 판국이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조금 전 본 장면과 동기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얽히면서 계속 흥미로운 시나리오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중에 은근히 주변을 살피니 그와 같은 이들이 한둘이 아닌 것 같아 왠지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식사 후에 씹는 껌, 정도의 스캔들이면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즐거울 것 같다고 여기며 엘리베이터의 층수가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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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두 사람을 빈 회의실로 데려갔다.

“의외로군요.”

“네?”

“이렇게 사과를 하러 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아, 그게···.”

“보통 그런 경우가 벌어져도 서로 안 보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고 말지 않나요? 특히나 서로 딱히 만날 일도 없는 사이니까.”

물론 그런 면도 있겠지만,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얘가 어찌나 마음이 착한지 꼭 찾아가서 사과를 하고 싶다고 해서요.”

설마. 단유는 마치 퇴행기 꼬마애들처럼 고개를 숙인 채 드문드문 눈동자를 들어 단유를 훔쳐보는 지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에 봤을 때는 그런 분이신 줄 몰랐네요.”

“아, 그때는 얘가 많이 아파서 그랬던 거예요. 남자라서 잘 모르실지도 모르겠지만, 여자는 가끔 호르몬 문제로 그럴 때가 있거든요? 쉽게 말하면, 생리적인 현상이었던 거죠.”

“호르몬 문제가 자주 있는 모양입니다? 지난번 설악산에서도 그런 문제였나요?”

“네?”

설악산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던 친구가 어리둥절해 하며 지아를 돌아보았고, 지아의 고개는 추를 매단 듯 더욱 아래로 수그러들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어쨌든 사과를 하러 오셨다고 하니, 사과를 받도록 하죠. 사과는 로비에서 받은 셈으로 치고요.”

“아니, 저기요.”

친구는 또 어이없다는 듯 탄성을 뱉으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왜 이렇게 예의가 없어요?”

“무슨 예의를 말씀하시는 거죠?”

“지금 태도가 그렇잖아요? 이건 뭐,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잘난 척해요? 돈 좀 있다고 이렇게 사람 무시하고 깔봐도 되는 거예요?”

단유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악감정이 있거나 비하의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쪽의 사정은 알아들었으니 여기까지 하자는 이야깁니다. 특별히 이런 식으로 사과를 받을 거라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오신 데다가 이미 로비에서 충분히 사과를 받은 것 같으니 두 번 세 번 사과를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드린 말입니다.”

단유의 대답에 할 말을 잃은 친구는 눈을 껌뻑였다. 그때 구름에 가려있다 나온 것인지 회의실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단유의 얼굴에 드리웠다. 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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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여자를 데리고 회의실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남은 점심시간 동안 회사 내에 회자되었다. 누군가가 그 장면을 떠올리며 콧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딱 그 정도의 유희거리가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점심때 들렀던 식당 반찬에 대한 불만보다 더 생생했고, 인터넷 뉴스 메인에 걸린 연예인 스캔들보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직원들의 얼굴엔 생기가 가득했다.

“예뻐?”

라고 남자 직원들은 관심을 보였고,

“어려?”

라고 여자 직원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곧 위에까지 전달되었다.

역시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대훈과 택윤은 휴게실에 들렀다가 이야기를 들었다.

“김 이사가?”

택윤이 놀라워하며 휴게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회의실로 고개를 돌렸다. 닫혀 있는 문과 반투명 유리 너머의 모습을 뚫어보기라도 하겠다는 건지 눈을 가늘게 뜨고 회의실을 향해 시선을 던져보지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체통 없이 회의실 근처로 가서 귀를 대 볼 수도 없는 일.

“누군지는 모르고요?”

대훈이 휴게실 한쪽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지원팀장에게 물으니, 지원팀장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정체는 모른답니다.”

“예쁘대요?”

대훈의 물음에 지원팀장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히죽 웃었다.

“글쎄요. 직접 보질 못해서. 그런데 본 사람들 이야기로는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군요.”

마침 직원이 뽑아다 준 커피잔을 건네받는 대훈의 얼굴에도 처음에는 잔뜩 호기심이 생기나 싶다가 문득 표정을 고치고 지원팀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팀장님 표정이 근래 보던 중 유난히 밝아 보이십니다?”

“제가요?”

“네.”

“어, 그러니까···.”

대훈의 질문에 당황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던 지원팀장은 겨우 핑곗거리를 찾아 읊었다.

“뭐, 요 며칠 사이에 너무 바쁘게만 지내다가 모처럼 쉬는 느낌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처럼 요 며칠 동안 경영기획지원팀은 ‘굳이’ 야근까지 감행할 정도로 바빴다. 아직 회사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시스템적으로 부족한 면도 많고 특히 HR의 부실함 때문인지, 여러 부서가 다들 힘들어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과도한 업무가 쏠린 지원팀이 부쩍 힘들어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업무 외적인 사항으로서 들려온 고위직(?)의 귀여운 스캔들은 지원팀 내부의 경화된 분위기를 다소 환기해주는 역할을 해 주었다.

이런 설명을 듣던 대훈은, 그러나 지원팀장의 미소를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고작 이런 일로 웃을 수가 있어 좋았다니.’

최근 회사가 바쁘게 돌아가면서 책상에 쌓이는 결재 서류 수만큼이나 정신이 없다 보니 조직 내 직원들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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