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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822화 (822/956)

Delight(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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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에서 나오던 길에 친구는 지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제대로 사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어보는 친구의 제안에 지아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도의적인 차원에서는 분명 사내에게 사과를 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만약 그의 전화번호라도 알고 있다면, 문자로 사과의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고, 좀 더 용기를 낸다면 전화를 걸어 육성으로 사과의 말을 전할 수도 있을 테지만, 불행히도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이름과 그가 일하는 곳뿐이었다. 결국 사과를 하기 위해선 발품을 팔아야 한다는 소리인데, 굳이 거기까지 가서 대면하고 사과를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지나치게 오버하는 거 아냐?’

라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고 지아는 생각했다.

평범하게 생각해도 굳이 ‘사과’하기 위해서 상대가 일하는 직장을 찾아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여겨졌고, 또 굳이 찾아가 ‘실언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한들, 그것이 진짜 사과의 의미로 받아들여질지도 의문이었다. 차가운 시선이 두려웠고, 의도치 않은 오해를 받을까 무서웠다.

“혼자 가기 힘들면 같이 가줄까?”

순수한 의미로 받아들이면, 지아를 돕기 위한 선의의 발언이지만, 혹시 그 남자, 단유를 다시 만나기 위한 명목으로 자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사내는 확실히 잘생겼고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이였으니까.

하지만 곧 고개를 털어 생각을 지웠다. 설령, 정말로 사내와 재회를 하기 위한 핑계라 할지라도 지아는 친구의 제안에 콧방귀를 뀌거나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사과와 별개로 지아 본인도 단유라는 남자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과 따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고, 어쩌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사과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사내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다음엔 어떤 이야기가 나오게 될지 궁금하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고작 2번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그는 마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듯 잘난 척···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아라는 여자에 대해 냉정하게 지적하고 충고했다. 그 차갑고 거침없는 발언이 내장이 요동치도록 울컥하게 만든 건 사실이지만, 또 마음 한켠으로는 좀처럼 드러내지 못해 답답하기까지 했던 오물을 긁어낸 듯 후련해진 기분도 들었으니까.

돌이켜보면 누구도 지아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 준 이가 없었다.

‘···없었나?’

줄곧 비난을 위한 비난만을 거듭하던 어머니와, 공포 영화 주인공 같은 표정의 가면을 쓰고 위장된 웃음만 짓는 친구들과, 그도 아니면 이름 없는 비석의 묘지 같은 무관심만이 전부였다.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던, 단조롭던 세상에 메이저코드를 두드리며 존재감을 알린 사내에게 의지와 무관하게 호기심이 생기는 건 당연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아는 속으로 다짐했다. 다시 그를 만나게 될 때는, 그래도 이렇게 볼품없는 꼴은 보이지 말자고. 적어도 눈썹과 입술 정도는 손을 본 뒤에 대면하자고, 다짐했다.

****

“알겠습니다.”

지아에 대한 아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단유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혹시···더 궁금하신 건 없으시고요?”

“네, 없습니다. 바쁘실 텐데 붙잡아둬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사님께서 여쭈시는데 당연히 대답해드려야죠.”

단유는 이사직에 있지 않았지만, 달리 부를 호칭이 없었기에 회사 직원들은 단유에게 편의상 ‘이사’라는 직함을 붙여 불렀다. 그리고 단유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연습생들도 다들 ‘이사’라고 부르니 ‘이사’인 줄 알고 ‘이사’라 불렀다. 처음에는 마냥 어색해했지만, 이제는 단유도 그게 편의성을 감안한 호칭이라는 사실에 적응하려 노력 중이었다.

그래도 들을 때마다 부담스러운 건,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를 때마다 택윤이나 대훈이 ‘그만 포기하고 맡아보지 그래요’라는 눈빛을 보내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현재, 전혀 다른 의미에서 부담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아름의 시선을 빗겨내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수고하세요.”

“이사님도요.”

단유의 무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밝고 싱그런 미소를 지어 보이는 아름이었다. 만약 지금의 저 표정을 언제 어느 때라도 보일 수 있다면, 가령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카메라 앞에서 지을 수 있다면, 그녀는 연예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게 그녀의 실력과 별개로 그녀가 오디션에서 뽑힌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뒤, 회사에서 연습복을 제공하기로 했다는 공지가 내려갔다. 반드시 입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연습복은 상시 깨끗한 상태로 제공되며 입었던 연습복은 그날그날 세탁업체에 맡겨진다는 이야기에 연습생들은 회사의 결정을 반겼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케이터링 서비스도 제공되는 거 아냐?”

“이 회사에 들어오길 잘했어.”

연습생들은 물론이고 트레이너들도 이런 사소한 복지 서비스에 대해 반가움을 표시하고, 이 결정을 추진한 대표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다 단유 씨 덕분이에요. 좋은 아이디어를 줘서.”

“쑥스럽네요.”

“앞으로도 이런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런 아이디어들을 얻어 적용해 보는 건 회사를 직접 운영하는 입장에서 즐거운 일이라며 대훈이 말했다.

“역시 이 맛에 대표를 하나 봅니다.”

“그런가요?”

“예. 역시 회사니까 수익을 내야 하고, 소속 연기자들을 성공시켜야 하는 게 본업이지만, 기왕이면 회사 내의 사람들이 모두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찾아 함께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 길을 찾아 제시하고 이끈다는 게 대표로서의 보람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기회를 준 우리 ‘투자자’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해야겠네요.”

“왜 또 그러세요? 이렇게 부담 주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이제는 이런 부담도 즐길 때가 되지 않았어요?”

“전혀요.”

“그럼 즐길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야겠군요.”

“점점 제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시는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있나요? 그런데 말로는 싫다고 하지만, 단유씨도 슬슬 적응이 되시나 봅니다.”

“제가요?”

“웃으시잖아요?”

단유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입 주위로 이완된 근육을 손끝으로 느끼며 대답했다.

“어이가 없어서 웃는 겁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웃다 보면, 웃는 게 습관이 되는 겁니다. 좋은 습관인 거죠.”

“아무래도 대표님이 연예계로 진출하셔야겠어요. 코미디 쪽에 관심이 없으신가요?”

“관심은 많지만, 제가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기보단 제 연기자가 성공하는 게 더 좋아서요. 아쉽지만 제 데뷔는 다음 생으로 미루도록 하죠.”

대훈은 눈가에 주름을 깊게 만들며 웃음을 지었다. 잘 웃는 사람이 보기도 좋은 법이리라.

****

“이렇게 들어와도 되는 걸까?”

“못 보면 마는 거지, 뭘. 근데 여기 건물 되게 좋다? 새로 지은 건가?”

두리번거리며 여기저기 구경하기 바쁜 친구의 얼굴에는 긴장이란 것을 찾기 어려웠다. 역시 자기 일이 아니라고 편안한 것일까?

“저기 데스크에 가서 물어봐야 하려나?”

지아의 물음에 친구는 턱짓을 하며 대답했다.

“네가 가서 물어봐봐.”

“내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친구를 바라보니, 당연하지 않냐며 지아의 등을 밀어 보낸다.

“그분한테 사과할 사람은 너잖아? 당당하게 말해. 사과할 말이 있어서 왔다고. 아니면 고맙다는 말을 한다거나.”

“너 되게 신나 보인다?”

조금 얄밉다는 생각에 또 날이 선 말이 툭 튀어나왔지만,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착각이야, 착각. 그냥 이런 곳에 다니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여기 직원 새로 안 뽑을까? 사무도 보고, 가끔 세션 필요한 일 있으면 도와줄 수도 있고, 그러면 좋아라하지 않을까? 너무 나갔나?”

그리고 재차 가서 물어보라며 지아의 등을 떠밀었다. 떠밀림에 쉬이 떼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안내 데스크로 향한 지아는 쭈뼛대며 물었다.

“저기요.”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기, 여기···그, 단유라는 이름 쓰시는 분 안 계신가요?”

“어느 부서에서 일하시는 분이신데요?”

“그것까진 잘 모르겠고요. 그냥 여기서 일하시는 것만 아는데, 꽤 높은 분이신 거 같은데···.”

“어떤 용무로 오신 건가요?”

“저기 개인적으로 드릴 말이 있어서···.”

“잠시만요.”

지아를 빠르게 훑은 여직원은 어딘가로 전화해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간간이 지아를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지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건강검진결과를 기다리는 환자처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여직원의 콜을 기다렸다.

‘모처럼 큰맘 먹고’ 단유를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는데, 지금은 과연 그게 옳은 결정이었던지 의심스러웠다. 혼자 오기는 힘들 것 같아, 친구와 같이 왔고, 보이는 대로 보자면 그 친구는 이곳까지 온 목적과 상관없이 신나 보이긴 하지만, 과연 진짜 신나서 들뜬 얼굴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아를 배려해서 일부러 신나는 척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친구의 표정도 표정이지만, 곧 마주치게 될 사내의 표정도 걱정이다. 그에게서는 친구와 같은 가식적인 표정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그가 줄곧 보여줬던 모습대로라면 말이다. 그리고 이제 그 가식 없는 표정을 마주하게 될 일이 두려워 다시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저기···.”

대리석으로 꾸며진 안내 데스크 넘어, 하얀 제복 같은 정장을 입고 커다란 눈동자로 지아를 바라보는 여직원의 입술이 열리자, 지아는 숨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선 찾으시는 분은 저희 회사에서 일하시는 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런 이름을 쓰시는 분은 안 계시다고 합니다.”

직원의 대답에 반응한 것은 지아의 등 뒤에서 로비 구경을 한다고 두리번거리던 친구였다.

“네? 아니 여기 일하신다고 하던데요?”

지아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내밀며 대답하니, 자연히 여직원의 시선이 친구에게로 향했다. 슬쩍 비켜간 시선에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고 여기는 지아. 그와 상관없이 여직원의 대답이 이어졌다.

“저희 직원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지신 분은 안 계신 걸로 확인이 되거든요? 혹시 회사를 착각하신 건 아닌가요?”

“아뇨, 여기라고 들었는데. 그러면요, 혹시 여기 연습생 중에요, 강아름이라고 있어요?”

“연습생이요?”

계속 누군가의 이름만 들먹이는 두 사람이 의심스러운지 데스크 직원의 표정도 조금씩 굳어갔다.

“네, 여기 오디션 합격해서 연습생으로 있는 강아름이요.”

“잠시만요.”

다시 전화를 드는 데스크 직원을 보다가 친구가 손뼉을 쳤다.

“아, 그냥 전화하면 되겠네. 내가 아름이한테 전화해볼게.”

“연습 중이면 전화 안 받을 텐데.”

“일단 걸어보고. 잠시만.”

마음 같아선 하지 말라고 말리고 싶었다. 솔직히 아름에게는 자신이 여기 온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니 차마 친구를 말리기도 어려웠다.

친구는 마치 대단한 미션에라도 도전하는 듯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아는 조금 질린 얼굴로 친구와 여직원의 눈치를 살폈고, 그 사이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친구였다.

“어, 아름아! 나야, 보라. 응. 우리, 너희 회사에 있는데, 너 혹시 회사에 있어? 응, 응. 로비. 여기? 그거야···너, 보러 왔지.”

말하던 중간에 잠깐 지아의 눈치를 본 친구는 센스 좋게 말을 바꿨다.

“아, 연습 중이야? 나오기 힘들구나. 그래? 아니, 그게 마침 우리 볼일이 있어서 여기 지나다가 네 생각이 나서···. 응, 지아도 같이.”

지아는 들키면 안 될 것을 들킨 십대 어린애가 된 기분으로 얼굴을 붉혔다. 고개를 떨군 지아를 본 친구는, 역시 자신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직원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아냐, 바쁘면 안 나와도 돼. 응, 응. 그냥 지나다가 혹시나 하고 불러본 거야. 아, 저녁 시간 되기 전까진 나오기 힘들어? 응, 그렇구나. 알았어. 미안해, 연습하는 데 방해해서.”

친구는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직원을 바라보니, 직원도 마침 들고 있던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강아름씨는 연습실에 계신다고 하던데···.”

“괜찮아요. 저희, 이만 가볼게요.”

친구는 수고하세요, 라고 꾸벅 인사를 건네고는 지아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로비를 빠져나가려 했다.

“작전상 후퇴야. 알지?”

그러나 그 말의 울림이 채 끊어지기도 전에, 두 사람 앞에 그들이 만나려 했던 사내, 단유가 나타났다.

“어?”

친구의 손가락이 단유를 향하고, 그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지아의 눈동자가 요동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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