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ight(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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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말씀하시는 게 그렇잖아요. 제가 막 잘못한 사람처럼 몰아세우고 있잖아요?”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지아의 모습에 단유는 난감했다. 도와줬더니 오히려 보자기 내놓으라는 게 바로 이런 건가 싶었다. 아름과 아이들이 좋지 않은 상황에 말려드는 걸 우려해 미리 움직였더니, 되레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한복판에 서게 하는 꼴이다.
“지아야, 너 왜 이래?”
친구가 말려도 이미 폭주한 지아를 말리기는 어려워 보였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왜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그래요!”
미친 사람 같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앞뒤 사정 모르는, 아니 알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지아의 폭주에 가장 이성적으로 대응한 사람은 역시 단유.
“아름씨는 아이들과 함께 먼저 회사로 가세요.”
“그래도···.”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네요.”
이미 시간이 1시 반을 넘어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음을 주지시켰더니, 아름도 더는 머뭇거릴 수 없었다.
“···네. 회사로 오실 건가요?”
“나중에 뵐게요.”
단유의 단호한 대답에 아름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인사를 한 후 자리를 피했다. 지아의 시선은 이미 단유에게로 고정되어 있어서 그들이 자리를 떠나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한편 지아의 옆에 서 있던 친구에게로 시선을 옮기니, 그녀도 몹시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당장 지아를 두고는 떠날 수 없어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만약 이대로 단유가 냉정하게 등을 돌리면, 그녀만 더욱 곤란해지리라.
단유는 한숨을 쉬며 지아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붉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단유를 노려보는 지아. 그러나 단유는 개의치 않았다.
“정신 차려요. 피해망상환자처럼 굴지 말고.”
지아는 곧바로 받아치지 못하고, 그저 놀란 얼굴이 되어 단유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당장은 당신 잘못이 아닐지 몰라도, 계속 그렇게 피해망상에 젖은 것처럼 행동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당신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날이 올 겁니다. 그때는 정말 당신의 잘못이 되겠죠. 그 날이 오기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신 차려요.”
단유의 차가운 말투에 지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피해망상이라고요?”
“눈감고 귀 닫고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서 착각하며 자학하는 모습이니, 설령 사소한 오해라 할지라도 피해망상이라 여기기엔 충분해 보이네요.”
“당신, 지난번에도 이러쿵저러쿵 그렇게 잘난 척 떠들었죠? 뭐? 내 길을 찾으라고? 뭐라도 된 듯 그렇게 잘난 척 굴었죠? 아, 그러니까 당신 돈 많다고? 돈 있으면 그렇게 잘난 척 해도 되는 거야? 사람 무시하고 그래도 되는 거냐고?”
정당한 반론 따윈 없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발아한 증오의 명제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을 뿐이었다. 분노한 사람의 억지를 논리로 이기기란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더는 못 들어 주겠군요. 마음대로 생각해요.”
길거리 광대가 되고 싶지 않은 단유였다. 단유의 태도에 더 당황한 친구가 황급히 지아를 말렸다.
“지아야, 너 왜 그래? 너 생각해서 도와주신 분한테.”
“누가 도와 달랬어?”
표독스럽다 느껴질 정도로, 지아의 날카로운 반응에 친구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너도 똑같애. 무슨 속셈으로 날 데리고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난 네 장신구 노릇 할 생각 없거든?”
“···지아야.”
“됐어, 그만해.”
어깨를 붙잡는 친구의 손을 뿌리치고, 지아는 단유와 친구를 번갈아 노려보다 홱 몸을 돌렸다. 괜히 또 울컥해져서 눈물이 나려는데, 참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고,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걸어가면 두 번 다시 친구는 볼 수 없겠지.
친구에 대한 감정과 별개로 입에서 흘러나온 거친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상처 입은 강아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친구의 모습이 망막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후회투성이다.
하지 말아야 했던 말들, 하지 말아야 했던 몸짓, 하지 말아야 했던 눈빛과 표정. 그러나 이미 쏟아낸 것들은 되돌릴 수 없고, 남은 것은 후회와 절망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조여드는 불쾌감, 절망감. 폐가 쪼그라드는 듯한 기분. 아니, 그냥 기분이 아니라 정말 폐가 움직이지 않는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숨을 쉬려고 억지로 호흡을 해보는데도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뜨거워지는 가슴, 점차 희미해져 가는 의식. 귓가에 이명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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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드나 봅니다.”
낯선 목소리, 그 전에, 흔들리는 세계. 세상이 흔들리는 것인지 아니면 몸이 흔들리는 것인지 구분이 잘되지 않는데, 손을 붙잡는 온기가 느껴졌다.
“괜찮니?”
힘겹게 고개를 움직여 돌아보니 친구였다. 왜 울고 있지?
“보라야.”
그러나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지아의 목소리는 언제 씌었는지 모를 마스크에 막혔다. 그러나 친구는 용케도 그걸 들었는지 재차 말을 걸었다.
“정신이 들어?”
“여기, 어디?”
“구급차야. 응급실에 가는 중이야.”
“응급실?”
“너 쓰러진 거 기억 안 나?”
지아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힘겹게 대답했다. 주위를 살피니 친구와 구급대원으로 추정되는 이가 전부.
“보라야, 그 남자는···?”
“구급차만 불러주고 갔어. 내가 가시라고 그랬어.”
“고마워.”
더 못난 꼴을 안 보여줘도 된다는, 그리고 그의 차가운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쥐어 짜내듯 힘겹게 입술을 비집고 나온 그 단어를 제대로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친구는 대답 대신 지아의 손을 좀 더 세게 쥐었다.
한참 후, 응급실 구석 침대에 겨우 둘만 남게 되었다. 과호흡으로 실신까지 갔다가, 휴식을 취하며 겨우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한 지아는 조용히 곁을 지키는 친구에게 나직이 물었다. 자신이 밉지 않았냐고. 친구는 엄지와 검지를 작게 펼치며, 이만큼, 이라고 대답했다.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는 모습에 본 지아가 되물었다.
“왜 이렇게, 왜···”
왜 잘해주냐고 묻고 싶은데, 막상 친구의 표정을 보며 말하려니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웃는지 우는지 알기 힘든, 그런 묘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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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어느 날부터 조금씩 말수가 줄더니 얼굴이 어두워지더란다. 그땐 그 친구뿐 아니라도 많은 아이들이 성적에 대한 압박 때문에, 혹은 사춘기의 감성적인 문제로 인해 때때로 이유 없이 슬픈 표정을 짓거나 시답지 않은 이유로 화를 내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니 콕 집어 언제부터라고 하기도 어렵게, 갑자기 말수가 준다거나 어둠의 존재를 왼팔에 가둔 듯 행동한다 해도 특별히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본인도 이따금씩 그런 감정의 기복을 느끼곤 했으니까. 교과서에서 말하듯, 질풍노도의 시기라니까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그 친한 친구는 다른 여타의 친구들보다 조금 더 특별했던 모양이었다.
“나나 친구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지 않았던 모양이야. 잘 웃지 않을 뿐 아니라, 돌연 화를 내거나 우는 일도 종종 있었고, 때로는 친하다고 할 만한 애들한테도 신경질을 부리거나 상처를 주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더라. 그러다 보니까 점점 친구들이 떠나기 시작한 거지. 그런데 좁은 교실 안에서 떠나봐야 그 자리잖아? 전혀 화해할 생각도 하지 않고 스스로 혼자가 되길 선택한 그 친구는 결국 따돌림을 받기 시작했어. 난, 솔직히 말하면, 끝까지 그 친구를 비호해 주지 못했어. 나도 걔한테서, 걔 말 때문에 상처받은 일이 있었거든. 알아, 좋은 핑계는 아니지. 하지만 그때는 그 친구도, 나도, 우리 모두가 어렸으니까.”
먹먹해지는 가슴을 쥐어잡고 토해내는 친구의 이야기에는 떨쳐내지 못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어느 날, 그 애가 야자를 하던 중에 갑자기 소리를 질렀어. 아니 비명을 질렀어. 어떤 사정 때문인지는 몰라. 난 조금 떨어져 있던 자리였거든. 추측해보면 걔 근처의 다른 아이들이 그앨 괴롭혔던 건가 싶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냥 별일 아니었는데도 걔 혼자 과민하게 반응했던 것인지도 몰라.”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다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친구는 우리 전부를 노려보며 눈물을 흘렸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노려만 보던 그 표정을 난 잊을 수가 없어. 앞으로도 얼마의 시간이 지나든, 평생 잊기 힘들 것 같은 표정이었어. 뭐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살려달란 외침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였을까? 잘 모르겠어. 아마 그 표정의 의미를 이해한 친구는 한 명도 없었을 거야. 반의 친구들 모두 그녀의 외침과 물음에 침묵을 선택했지. 그리고.”
친구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걔는, 이미 눈치챘겠지만, 자살을 선택했어.”
그 친구가 자살이란 선택을 하기 전, 반에서 비명을 지를 때의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친구의 자살이란 건 어떤 이유로든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 이라며 입술을 꽉 깨무는 얼굴을 지아는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친구를 또다시 잃고 싶지 않았어’ 라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지아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얼굴과 행동에서 그 친구의 모습을 엿봤다며, 그래서 지아를 도와주고 싶었다는 데, 이해? 공감? 글쎄.
‘표정? 뭉크의 절규 같은 표정이었다는 걸까?’
그녀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진지해지지 못하고 마는 건, 기본적으로 우정이니 하는 것들을 따지기 전에 주변인들, 아니 인간에 대한 신뢰가 바닥인 탓이다. 어떤 속임이 있는 건 아닌지, 겉과 다른 가면을 쓰고 자신을 비웃는 건 아닌지, 의심을 하고 부정을 한다. 그만큼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뜻일 테고.
머리로야 이해하지만 내심 그렇게 과거의 트라우마를 고백하는 친구를 의심하고 있으니, 정말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게 아닐까, 라는 자기비하가 이어진다. 지아는 그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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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로 돌아온 단유에게 회사 로비에서 기다리던 아름이 달려왔다.
“고맙습니다.”
“아름씨가 왜요?”
“제 친구 일이잖아요. 부끄럽게도 제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해 미안해하던 중이었거든요.”
이런 경우가 있다. 차라리 하지 말았다면 좋았을 말들. 딴에는 그런 식으로 마음을 표현하려 했는지 모르겠지만, 단유에겐 허용되지 않는 비열함이었다.
도움을 주지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고, 미안해하기보단 회피하려 했었다. 그러나 단유는 그 행위 자체를 나쁘다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반드시 도움을 줘야 한다, 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하면, 그러니까 단유가 했던 것과 비슷한 사고를 했다고 가정한다면, 데뷔를 앞둔 연습생으로서 좀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경각심이 들었으리라 유추해볼 수도 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상대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그녀의 선택에 대해 나름의 평가를 할지언정 드러내고 욕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럼에도 기분이 나쁜 건, 그걸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티를 냈다는 사실이고, 그 말이 어떤 의미로 해석될지에 대해 본인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 찝찝함을 넘어 불쾌해지려 했다.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이 다를 수는 있으나 그것을 인정하는 것과 존중하는 것은 다른 문제. 그래서 인정은 하되 존중은 하지 않는다.
해서 단유는 화제를 돌렸다.
“어떤 친구인가요? 지아, 라는 친구.”
“아, 걔요.”
머뭇거림이 보였고,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한 아름의 말에 따르면,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4살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여자라는 평가였다.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조금씩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좋지 못한 쪽으로요.”
그녀의 부정적인 평가 때문일까, 단유는 진심으로 지아라는 여자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