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igh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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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디 마셔도 돼요?”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상관없어요.”
“감사합니다!”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 있기 때문인지 자못 어른스러운 티를 내려 하는 아름이었지만, 그녀 역시 이제 겨우 24살이 된, 아직은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하지 않은 여자아이였다.
순수하게 기뻐하며 동생들과 함께 카운터 앞에 섰던 아름은 마침, 바로 옆에서 커피를 받아가는 대학 동기 친구를 발견했다.
“너희 계속 쇼핑하는 줄 알았는데, 여기 왔어?”
“지아가 기분이 별로인 거 같아서. 이거라도 먹으면서 기분 전환이나 하려고. 그런데, 누구시니?”
아름이 심사위원이었다며 단유를 소개하니, 친구가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단유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며 손을 젓고는 시선을 피했다. 피해서 바라본 방향에는 떨어져 있음에도 뒷목이 당길 정도로 음울하고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지아가 있었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지아가 먼저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방금 인사를 나눴던 아름의 친구라는 이가 그 테이블로 향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셋이 아는 사이인 건가?’
묘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원도에서 만났던 이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그녀에게 접근하면 그 음울함이 모두 전염이라도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까부터 지아 얼굴이 안 좋아 보이던데 무슨 일 있는 거야?”
라는 아름의 물음에 친구의 답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이었다.
“언니, 뭐 드실 거예요?”
아이들의 부름에 아름이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릴 때, 단유도 지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괜히 얽혀봐야 좋을 게 없을 것이라 여겼다.
****
오픈 전에 청소를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더러운 바닥 타일을 바라보다 울컥 눈물이 솟으려 했다.
‘미친 거야? 왜 갑자기 울려고 그래?’
스스로에게 묻지만 절로 눈시울이 붉어지며 흐려지는 것은 막기 힘들었다.
이런 곳에서, 한참 마음이 복잡한 이 순간에 저 남자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뭐든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아무 신경도 안 쓰고 초라하게 입고 나온 복장이라든가, BB 하나도 제대로 바르지 않고 나온 무신경함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아는 충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화장실로 뛰듯이 달아났다.
“아앗!”
그리고 마침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커피숍을 빠져나가려던 여자와 부딪혔다. 재활용이 가능한 투명 플라스틱 컵 위를 덮고 있던 뚜껑이 용수철처럼 튕겨 벗겨지고, 안에 담겨 있던 갈색 음료와 잘게 부서져 담겨 있던 얼음이 튀어 올랐다.
공중에서 유영하듯 떠 있던 커피의 부유물은 곧 흩어져 뿌려졌고, 커피를 들고 움직이던 이가 놀란 눈을 껌뻑이며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보지만 이미 커피는 그녀의 하얀 블라우스를 잔뜩 물들일 요량으로 힘차게 달려드는 중이었다.
지아는 순간적으로 벌어진 사건을 눈에 담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대와 그리 과격하게 부딪힐 마음도 없었고, 날아가는 커피를 손으로 붙잡지도 못했고, 검은 얼룩을 퍼뜨리며 물들어가는 상대의 블라우스를 멍청하게 바라만 봐야 했다. 당황하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그 위에 분노가 떠오르는 표정을 보면서도 지아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아, 뭐야, 진짜!”
뾰족한 얼음을 갈아 목소리로 바꾼 듯한 상대의 일갈에 지아의 정신이 돌아왔다.
“괜찮아?”
여자의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아마도 연인이 아닐까 싶은 사내가 놀라울(?) 정도의 반응속도로 여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떡해, 이거.”
이미 커피가 블라우스의 반을 적시고 바닥에는 흘러내린 커피로 웅덩이가 만들어질 정도인데 말이다.
다행인 건 여자친구의 분노가 오로지 앞에 선 지아에게만 향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갑자기 그렇게 뛰어나오면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잔뜩 움츠려 어깨만큼이나 작은 목소리. 어쩔 줄 몰라 허공을 방황하는 손과 쉴 틈 없이 흔들리는 동공의 반응에도 커피를 쏟은 여자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지아는 어떡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왜 자신한테만 이런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슬프고 억울하고 답답한데, 그 마음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눈물이 났다.
사과를 하던 상대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면 마주하던 이는 어떤 마음일까?
“뭐예요? 지금. 지금 이게 운다고 해결될 일이에요?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요?”
상대의 마음보다 내 가슴에 흐르는 커피 얼룩이 더 상처가 깊다는 것인지, 여자는 쉽게 화를 누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얼만데요?”
그리고 단유가 다가와 물었다.
****
사실 어지간하면 얽히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얽힐 이유가 전혀 없었다. 우연히 한번 본 얼굴일 뿐, 둘 사이에 특별히 관계성을 돈독히 할 만한 일은 전혀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자신을 보자마자 시선을 피하기까지 했다. 즉, 서로 아는 체 하지 말자는 뜻이나 다름없으니, 지아라는 여자가 음울하든 말든,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것같은 모습이든 말든, 단유가 신경 쓸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먼저 사고를 쳤다. 그 역시 단유와는 상관이 없었다. 커피숍 내에 있는 모두가 그렇듯,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쳐다보면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하는 것처럼, 아니, 그 정도까지 호기심도 생기지 않았지만, 단유는 아이들이 고른 음료수의 계산만 끝나면 곧장 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름이 그 광경을 보고 당황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라고 했었지?’
아름은 지금 무언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달려가서 괜찮냐고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들이 떠올라 아름의 걸음을 막고 있었다.
하나는 주위에서 들어 올린 핸드폰의 존재였다. 어떤 상황으로 연결될지 모르나 혹시라도 ‘좋아요’ 버튼을 연타시킬 정도의 주목도를 이끌만한 영상이 포착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핸드폰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누르고 상황을 촬영하는 이들 때문에 쉽게 개입하기 어려웠다. 데뷔를 목표로 하는 연습생의 입장에서 괜한 말이 나올지도 모를 영상에 노출되는 것은 피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물론 아름 역시 지금의 갈등이 어떤 상황으로 전개될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가정이었지만 말이다.
두 번째는 지아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정말 솔직히 속내를 털어놓자면, 굳이 자신이 나서서 상황을 중재시켜야 할 정도로 지아와 친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면식도 있고, 수업 중에 종종 말도 걸었고, 얼마 전 술자리에서 만나 이야기도 나눴고, 조금 전에 쇼핑몰 안에서 인사도 나눴지만 친하다는 범주에 들기는 조금 어렵지 않나 싶은, 그런 관계였다. 괜히 주제넘게 나섰다가 좋은 소리 못 듣고 오히려―첫 번째로 고려했던 바와 같이―영상에 꼬투리나 잡힐 일이 벌어지면 자신만 손해였다.
세 번째는 역시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자기 말고도 지아를 도와줄 친구가 옆에 있으니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라는 머뭇거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사람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는데’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뒤에 선 동생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운 마음이 크고, 왜 하필 이 시간에, 이 쇼핑몰에서, 저 두 사람을 만났던 것이며, 왜 하필 지금, 이 장소에서, 조심성 없이 행동했을까 탓하는 마음과, 분명 자신이 본 바로는 뒤에 선 남자친구를 돌아보느라고 잠시 시선을 돌렸기에 벌어진, 소위 전방주시의무를 태만한 결과이지 않나, 라는 둥의 각종 생각들이 뒤엉켜 나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는데.
그런 고민까지 읽지는 못해도 갈등하는 모습을 바라본 단유의 입장에선 아름이든 혹은 옆에서 눈치를 살피는 아이들이든 나서지 않도록 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매니저가 있었다면 분명 매니저가 먼저 나서서 눈앞의 상황과 소속 연기자들을 분리시키려 했을 것이다. 이들과 아무 상관없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한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말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세계이고 보니, 괜한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여지를 아예 남겨두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고,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가게를 나서지 않음에야 가장 좋은 방법은 반대로 적극 개입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한쪽으로 쏠리게 하는 것이 좋다.
비록 매니저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이 투자한 회사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나선 단유였다.
“얼만데요?”
단유가 다가가 물었더니, 열이 올라 얼굴이 붉었던 여자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누가 끼어드나 싶어 바라봤는데, 생각지 못한 외모(?)에 세미 정장 스타일을 한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어 깜짝 놀랐다.
“남자 친구···예요?”
“아닙니다. 그냥 곤란해진 상황이신 것 같아 중재를 해드리려고요.”
“그럼 신경 끄세요.”
“소란이 커져 봐야 서로 곤란할 뿐이지 않습니까? 이 분···도 사과를 하고 있고, 여기 카페 점원 분도 곤란해하고 있으니까요. 뒤에 계신 남자분도 난처해 하시기는 마찬가지고. 여러모로 다들 곤란해 하시는데, 기왕이면 좋은 방향으로 해결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쪽···분이 왜 상관이시냐고요?”
“개인적인 이유라 말씀드려봐야 별로 이해하시긴 어려우실 것 같고, 다만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는다면 그것으로 서로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그쪽 분은 옷 때문에 많이 당황하신 거 같은데, 괜찮다면 제가 대신 배상해드리죠.”
“나, 참. 무슨 오지랖이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돈 쓸 정도로 그렇게 돈이 많아요?”
“네, 많아요.”
“네?”
“그래서 얼만데요?”
“······.”
잠시 후, 왜 오빤 가만있었냐, 무슨 남자가 그렇게 소심하냐, 오빠랑 같이 있고 싶지 않다, 는 둥 투닥투닥거리던 커플이 씩씩거리며―그 와중에 여자는 손에 쥔 수표를 호주머니에 챙겨 넣고 있었다―카페를 나가고, 카페 점원은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단유는 괜찮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좀 더 극적인 상황을 기대하며 카메라를 들었던 이들은 대신 단유를 찍다가, 단유가 다가가 영상을 지워줄 것을 요청하자, 당신이 무슨 자격이냐, 내 카메라로 내가 찍는데 왜 지워라 마라냐, 지워주면 뭐 해줄 거냐, 고 묻는데, 그들에게 변호사를 불러주겠다 하니 다들 눈앞에서 영상을 지우고 확인을 받는, 그런 소동이 있었다.
그리고, 단유는 카운터에서 카드를 건네 받고 아름과 아이들과 함께 카페를 나서려는데, 지아의 친구가 다가와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친구의 한쪽 손에는 끌려온 지아가 여전히 시선을 피하다 친구의 힘에 억지로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신경쓰지 마세요. 그쪽 때문은 아니니까.”
라고 단유가 말하니, 그게 마치 관심이 있는데 시크한 척하는 거라고 착각했는지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단유를 바라보지만, 지아는 여전히 시선을 피하고, 그런 지아를 한 번 바라본 후 몸을 돌리려는 단유에게, 지아가 고개를 숙인 채로 불러 세웠다.
“저기요.”
단유가 멈춰 돌아보았다.
“왜 계속, 절 도와주시는 거예요?”
친구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데, 단유의 대답이 뒤를 이었다.
“그러는 그쪽은 왜 매번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상황을 연출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앞뒤 상황을 모른다 해도, 두 사람이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음은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지아의 친구는 물론이고 아름까지 두 눈을 끔뻑거리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고, 지아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그냥 모른 척하면 되잖아요?”
“저 혼자였으면 그러려고 했는데, 상황이 그럴 수 없었네요.”
단유의 대답이 더 얄밉게 들렸다. 그리고 더욱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도와줄 가치도 없는 사람인데, 주변 사람들 때문에 억지로 널 도왔다, 라는 말로 들렸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뜬금없는 지아의 폭발에 다들 당황할 때, 단유만 대수롭지 않게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잘못했다 한 적 없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