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19화 (819/956)

Deligh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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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일단 여기까지 하고, 나머지는 식사하고 계속 합시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회의가 겨우 끝이 났다. 지금 회의 중인 사안은 이번에 새로 영입할 계획인 기성 배우들에 대한 회의였다. 기존 기획사에서의 계약이 만료되면서 새로운 회사를 찾는 이들이 있는데, 대표인 대훈이 순전히 본인의 역량으로 협상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전에 매니저로 활동할 때 자주 마주쳤을 때 서로 좋은 인상을 가졌기에 가능한 기회였다. 비록 신생이라도 자본이 튼튼하고, 매니저 출신으로서 좋은 이미지를 가졌던 대훈의 회사라는 점에서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높게 쳐준 탓도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와 곧장 휴게실로 향한 대훈은 그곳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던 단유를 찾았다.

“아뇨, 전 방금 왔는걸요.”

“회의가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어요.”

“괜찮습니다.”

“이왕 온 김에 우리 연습생들 연습하는 거나 보지 그랬어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알겠습니다. 거 참. 이상한 데서 고집이 세시네.”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린 대훈은 단유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럼 식사는? 안 했으면 같이 할래요?”

“그건 괜찮겠네요. 아, 저기 이왕 식사를 하실 거면 다 같이 하는 게 어떤가요? 제가 살게요.”

마침 지친 얼굴로 휴게실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단유가 제안했다.

“에이, 그건 아니지. 제가 모셔야 하는데···.”

“모신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마세요. 부담스러워서 앞으로 오지 않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받아들이지 마라니까. 전에도 느끼긴 했지만, 단유씨한테는 농담을 잘 못 하겠어요.”

“전 대표님의 농담이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농담을 하는 척 하면서 진담을 섞어 던지시니 말이죠.”

“그게 다 요령이라는 겁니다. 그저 진지하게만 말하면 듣는 사람이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거든. 그래도 밥 먹자는 건 진심이니까 같이 나가죠.”

결국 단유의 고집대로 회의에 참석했던 인원들과 함께 회사 근처의 식당으로 향했다.

“잘 먹겠습니다!”

메뉴를 고르기도 전인데 벌써 인사부터 건네는 직원들의 모습에 대훈이 민망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잘 먹고 오후에 다시 열심히 회의하자고. 오케이?”

“예!”

그 모습을 보던 단유는 보기 좋다며 칭찬하는 말을 건넸다. 어느 직장엘 가도 밥 사준다고 하면 분위기가 좋아지는 법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식사 시간에 따로 앉는 게 좋습니다. 같이 앉으면 부담스러워 하거든요. 단유 씨가 안계셨으면 불편했을 법 했습니다.”

“대표님이 불편한가요, 직원들이 불편한가요?”

“둘 다죠.”

어깨를 으쓱거리며 사회생활 팁이니까 알아두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글쎄. 비록 지금은 묘하게도 단유가 대표와 자리를 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라면 단유는 저 직원들 틈에 껴 있어야 할 나이와 위치일 것이니, 사회생활의 팁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대훈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역시 단유가 앞으로도 회사의 중역이 되길 바란다는 마음일까?

식사를 마치고 회사에 돌아오니 발빠른 직원이 미리 커피를 뽑아서는 대훈과 단유에게 건넸다.

“명재 씨 마셔요.”

“괜찮습니다. 대표님 먼저 드시죠.”

“고마워요, 명재 씨.”

대훈은 웃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사회 생활 팁인가요?”

돌아서며 대훈에게 물었더니, 대훈이 웃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사랑받는 법 정도? 하지만 과도하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정도? 사실 요즘은 상사라고 먼저 챙겨주고 그러는 거 과하게 보일 수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일부러 탕비실도 없앤 건데. 그래도 이렇게 챙겨주면 고맙긴 하죠.”

대훈은 아무리 회사라도 회사의 성격상 위아래가 너무 경직되면 오히려 업무를 보는 데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여겼다.

“우리 회사는 스타를 다루는 회사니까, 때로는 스타가 회사보다 우선할 때도 있거든요. 그러니 회사 내부의 서열화가 너무 강해져 버리면 자칫 소속 연기자들에 대한 케어가 역으로 소홀해지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경우를 많이 겪어서 알거든요. 그래서 이 회사에서는 내가 대표니까 이렇게라도 실험을 해보고 싶었어요. 매니저 생활하면서 생각했던 것들,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했던 것들, 꼭 해봐야지 했던 것들을 마음껏 해보려고요.”

역시나 별 내용 아닌 것처럼, 그냥 농담을 이어나가는 듯한 말투로 툭 진심을 드러내는 대훈의 이야기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애들 보고 갈래요?”

“···그러죠.”

“잘 생각했어요. 그 말 알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투자자가 자신이 투자하는 대상이 사랑스럽고 예뻐보여야 더 마음을 쓰고, 하는 김에 돈도 쓰고 하는 법이거든요.”

“그렇게 안 하셔도 투자가 필요하면 더 낼 용의가 있습니다만.”

“에이, 그래도 이 가슴 밑바닥에서 우러나와서 팍 하고 꽂히는 게 있어야죠. 그렇죠?”

그러나 두 사람이 연습실에 도착했을 땐, 연습실은 텅 비어있었다.

“어, 어디 갔지? 얘들이?”

단유는 연습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물었다.

“점심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밥 먹고 오는 거 아닌가요?”

“그래도 지금이면 식사를 끝내고 돌아올 시간이니까요. 어디 딴 데로 빠진 건가?”

대훈은 신인개발팀의 임시 매니저를 찾았다. 연습생들은 데뷔를 하지 않은 관계로 아직 정식 매니저가 붙여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관리는 필요하기에 임시로 연습생 대부분을 총괄하는 매니저를 두었다.

“아, 아까 애들이 와서 연습할 때 입을 연습복을 맞추고 싶다면서 이야기를 하길래 허락해줬습니다. 되도록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돌아오라고 일러뒀는데. 지금 바로 전화해 보겠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사정을 알았으니 됐어요. 그런데 연습복을 왜 맞춘다는 거죠? 애들 연습복이 없어요?”

“아, 그게, 애들이 각자 가져온 옷으로 트레이닝을 받긴 하는데, 이게 금방 땀에 젖기도 하고 더러워지니까 몇 벌 더 준비를 해놓지 않으면 힘들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렇다고 연습이 끝나고 가려면 시간이 너무 늦으니까, 점심 때 나가서 빠르게 사 가지고 오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허락했던 거죠.”

뒤에서 얌전히 듣고만 있던 단유가 물었다.

“혹시 회사에서 지급하는 연습복이 있나요?”

“아뇨, 그런 건 없죠.”

대훈은 알겠다며 매니저를 돌려보낸 후, 단유를 돌아보았다.

“어쩌죠? 모처럼 내려왔는데 보기 힘들 것 같네요.”

“그건 그렇고, 원래 연습복이란 거 회사에서 지급해주는 건 아닌가 봐요?”

“연습복은 말 그대로 연습할 때 입는 옷이죠. 학교 체육복 같은 개념이 아니라서 그냥 각자 편한 옷을 입고 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연습복도 일종의 개성인데 그것까지 회사에서 제약하면 정말 통제가 되는 거죠.”

“그런가요? 제가 잘 몰라서.”

“생각해 보세요. 회사가 무슨 찜질방도 아니고 연습복 같은 걸 재어놓았다가 출근하는 연습생들에게 지급하는 건 이상하지 않겠어요?”

문득 예전의 일이 떠오른 단유. 볼을 긁적이며 조심스럽게 말을 받았다.

“회사 입장에선 연습생들이 다른 곳에 신경 안 쓰고 연습에만 매진하는 쪽이 훨씬 좋은 편 아닐까요? 그런데 연습생들이 땀에 젖은 옷 때문에 신경 쓰고, 또 연습 후에 옷들을 가져가서 빨래하고 다시 말려서 가져오고 하는 일들이 어쩐지 번거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물론 개인이 그런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연습복을 회사에서 제공하고 연습 후, 일괄적으로 수거해서 세탁을 한 뒤 다시 입을 수 있게 해준다면 연습생이나 회사나 윈윈이 될 것 같은데요.”

어떤 방식을 선택했을 때 가장 효율적인 성과를 볼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둔다면 단유는 언제나 효율 우선의 방식을 택할 것이고, 그런 이유로 최선의 효율이 나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한다. 지금의 문제도 사실 회사가 약간의 경비를 더 들이기만 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 그 정도 경비를 굳이 아까워할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애들이 지금 단유씨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네요. 아, 오해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좋은 의미로 말이에요. 아무튼 투자자님께서 돈 걱정하지 말라는데, 대표가 돈 타령을 하고 있으면 이상하니까, 뭐 그것도 시도는 해보죠. 어쨌든 신생이니까, 이것저것 실험해볼 수 있는 거겠죠?”

“고맙습니다.”

대훈과는 그렇게 헤어졌다. 돌아서서 회사를 나오다보니 단유가 제시한 의견 중 처음으로 받아들여진 의견이었다. 이전의 의견은 아직 결정이 나지 않은 상태라 보류라 치면, 이번 연습복 일은 최초의 것이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어쩐지 단유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단순히 돈을 투자하는 것 말고도―물론 대표나 회사의 입장에서 투자금이 더 좋은 선물이겠지만―회사를 위해 기여한 첫 번째 제안이었으니 좀 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만약 그가 제안한 것처럼 모두가 회사에서 지급된 연습복을 입고 연습을 하는 장면을 보면 더 뿌듯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그 장면을 눈에 담기 위해 대표가 원하던 대로 연습생들의 연습 과정을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갈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이래서 다들 기획서를 쓰는 걸까?’

전혀 다른 의미겠지만, 단유는 그런 좋은 기분을 가슴에 담고 회사를 나오다 걸음을 옮겼다.

이왕이면 요즘 어떤 옷들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옷이 편할지를 미리 사전 조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회사 내부에서 단유보다 훨씬 자세하고 꼼꼼하게 조사해서 옷을 구매하겠지만, 그래도 첫 기안(起案)자로서 그 정도까지는 미리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성격은 아니지만, 괜히 콧노래를 부르고 싶을 정도로 들뜬 단유였다.

옅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 하늘 아래 우뚝 솟은 쇼핑몰을 보니 아주 오래전의 일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지금처럼 여유롭지 않던 시절, 하은이 단유와 명수를 데리고 옷을 사주겠다며 끌고 왔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괜찮다고 거부를 해도 하은이 고집을 부려 두꺼운 스웨터를 입혀보고 사주었는데, 그 스웨터를 무려 3년간 입고 다녔다. 그 3년간 단유의 몸이 쑥쑥 자라 가만히 있어도 팔목이 훤히 드러나는데도 단유는 하은에게 옷이 작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교복으로 가리고 다니거나, 위에 큰 자켓을 걸치고 다니기도 했었다.

또 이 쇼핑몰과 엮인 기억은, 데이트 장소로서 와봤다는 것이었다. 그걸 데이트라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단유로서도 첫사랑이었던 그녀와 이곳에 와서 옷을 골라보던 기억이 있었다.

‘옷을 샀던가?’

다른 건 잘도 기억하면서 어떻게 그 기억은 흐릿한지. 어쩌면 그녀와 관계를 끊으면서 그녀와의 기억까지 모두 잊으려 했던 노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눈에서 멀어지고, 기억에서 지우려 했던 덕분에 감정도 빠르게 옅어졌던 것 같다.

잠시 쇼핑몰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있을 때였다.

“어, 안녕하세요?”

하이톤의 경쾌한 목소리에 단유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낯익은 여자애들이 우르르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심사위원 자격으로 오디션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때 봤었던, 그때와는 사뭇 다른 인상과 헤어스타일이지만 알아보기에 어렵지 않은, 대훈이 그토록 ‘우리 애들’이라고 부르던 바로 연습생 무리였다.

“여기 어쩐 일이세요? 혹시 저희 때문에 오신 거예요?”

김칫국, 아니 그냥 조그만 오해를 시작하려는 듯한 찰나에 단유는 빠르게 손을 저어 부정하려 했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 보니 아주 연관이 없지는 않았다. 크게 보면 저들 때문이기도 하니까.

“꼭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알아볼 게 있어서 왔어요. 그런데 여기 계셨네요. 매니저님께 들었는데, 연습복 사러 나가셨다고.”

“아, 네. 저희 이거 사러 왔어요.”

다들 한 손에 작은 비닐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점심시간 안에 들어가시기로 하셨다고 들었는데?”

단유의 물음에 가장 앞에 서서 말을 걸던 아름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네. 그래서 저희도 이제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래요? 그럼 수고들 하세요.”

“저기, 근데요.”

“네?”

“여기서 이렇게 뵀는데 저희랑 음료수 한 잔 안 하실래요?”

그 말에 단유가 잠시 살피니, 아름의 뒤에 선 다른 어린아이들이 모두 목마르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참 연기들을 잘한다 싶기도 하고, 정말 서두르느라 목이 마른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마침 바로 옆에 카페가 눈에 보이기도 하니 그냥 지나가기가 어려웠다. 어차피 이들을 위한 기안(起案)도 한 마당에 음료수 한잔 못 사줄 일은 아니었다.

“저기로 가죠. 제가 살게요.”

“정말요?”

아름은 해냈다, 는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고 아이들도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들 했다. 사심이 있었다면 모를까, 단유는 그저 주변에서 돌아보는 시선이 늘어나는 게 부담스러워 얼른 걸음을 옮겼다.

―딸랑.

문을 열고 카페로 들어가 아이들에게 메뉴를 고르게 한 뒤 잠시 주위를 살피던 와중에 낯설지 않은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음?’

심각하게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지아라는 이름의 피아니스트, 로 기억하는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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