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18화 (818/956)

Deligh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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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차 가보지 않겠냐는 친구의 제안에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을 보며 자칫 졸렬해질 게 뻔한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친구도 건성으로 던졌던 말인지―아니면 지아가 정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임을 알아챘던지―더 강하게 고집하지 않았고, 처음 이야기한 것처럼 쇼핑이나 하러 가자며 지아를 이끌었다. 하얗고 고르게 난 이를 드러내며 웃는 친구의 능청스러움을 지아는 잠시 부러워했다.

고층 쇼핑몰 여럿이 눈부시게 자리한 이곳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했다. 멋있는 사람과 멋없는 사람이 서로 지나쳐가고, 다양한 표정의 사람들이 서로의 안부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서로의 길을 바삐 걸어 다닐 뿐인, 그런데도 언제나 사람으로 가득한 거리를, 지아는 힘겹게 헤쳐나갔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어깨를 좁히고 조심스럽게 피해 다니느라 바쁜 지아와 달리, 친구는 잘도 유쾌한 걸음을 이어나갔다. 잠시 둘러보면 이 거리에서 가장 들뜬 얼굴로, 경쾌한 걸음을 내딛는 이가 친구이지 싶을 정도였다. 가까이 다가가면 너무 뜨거울 것 같고, 멀리 떨어지면 오히려 차갑게 굳어버릴 것 같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친구의 뒤를 따라갔다.

같이 가자, 부르지는 못하고 그저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서둘러 따라붙지만 워낙에 많은 인파로 인해 쉽지가 않았다. 금방 이마에 땀방울이 솟고 등이 축축해지는 기분이었다.

쇼핑몰 안에 들어서면 괜찮을까. 그러나 쇼핑몰 안은 바깥보다 더 북적거렸다. 대낮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으니 장사는 잘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만약 마땅한 일을 찾지 못하면 여기서 장사를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이어졌다. 물론 1평 남짓한 점포를 여는데도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진 않지만 말이다.

“야, 저거 봐. 예쁘지?”

수면바지를 보고도 이쁘다며 손뼉을 치는 친구의 호들갑에도 지아는 그저 단답형으로 대답할 따름이었다.

“응.”

친구의 컨디션은 시간이 갈수록 지치긴커녕 점점 더 유쾌해져만 가는 것처럼 보였다. 지아의 걸음이 점차 느려지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저런 옷을 입어야 한 패션 한다고 소문 날 텐데. 그치?”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친구의 배려를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나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너 보고 싶은 거나 봐.”

라고 매몰차게 거절해야 할지.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했다간 겨우 남은 친구와도 사이가 틀어져 정말 외톨이가 될까 두려운 마음이 든 지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1, 2년 전이었다면 친구처럼 호들갑을 떨며 전시된 옷들 하나하나 눈으로 보고 손으로 즐기며 감상했을 터지만, 지금은 시원한 폴리소재의 얇고 하늘하늘한 체크원피스도, 가슴라인 절개를 중심으로 셔링이 들어간 브이넥 블라우스도, 백라인 트임으로 늘씬한 목선을 뽐내기 좋을 셔츠와 박시한 스타일의 점프 수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거 어때요?”

점원이 요즘 유행이라며 들어 올린 옷에도 전혀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쳐버린 탓인지, 그 무엇도 지아의 굳어버린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하고 있었다.

“와, 괜찮은데? 너한테 어울릴 것 같은데. 어때?”

친구가 점원의 말을 거들며 옷을 받아 지아에게 들이밀었다. 그 순간, 지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굳히며 친구의 손을 쳐냈다.

―탁.

“······.”

“······.”

지아도, 친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지아의 주위만 온도가 급하강하는 듯했다. 주변의 열기를 모두 끌어안아 발산하는 듯했던 친구의 열정도 스위치가 내려진 듯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아, 미안.”

먼저 사과한 것은 지아였다.

“딴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미안해.”

“응. 괜찮아. 내가 갑자기 들이대서 놀랐지?”

“아냐, 정말···.”

친구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당황? 분노? 경멸?

친구가 다시 옷을 점원에게 건네자, 점원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옷을 받아 정리하는 시늉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마 두 사람이 가고 나면 방금 본 일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않을까? 입이 근질근질하겠지?

“어? 너희들 여기서 뭐 해?”

그때 뒤에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무심코 돌아보니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이가 서 있었다.

“어? 아름아?”

친구가 아는 체를 하자 아름이 미소를 지었다. 아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만으로 주위가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지아의 존재감마저 밝은 빛에 사그라지는 어둠처럼 약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달아나고 싶은 충동마저 들 즈음.

“네가 어쩐 일이야? 회사 간 거 아녔어?”

친구는 반갑다는 듯 총총 걸어가 인사를 나눴다.

“회사 갔다가, 여기 동생들이랑 잠깐 나왔어.”

“동생들?”

“응, 나랑 같이 연습하는 애들.”

“안녕하세요.”

아름의 소개로 그제야 눈에 들어온, 예쁘고 귀엽고 어린 여자 아이들이 지아와 친구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친구는 역시나 밝은 성격답게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데, 지아는 조금 전 일도 있고 해서 조금 쭈뼛대며 고개를 까닥거리는 정도로 인사를 했다. 그러다 아름과 시선이 마주쳤다.

‘봤나?’

혹시, 하는 생각과 함께 지아는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어디서부터 봤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친구는 밝은 목소리로 아름에게 물었다.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거야? 계속 연습하고 그러는 거 아녔어?”

“무슨 감옥도 아니고, 어떻게 하루 종일 그러니? 잠깐잠깐 쉴 때도 있는 거지. 점심시간이라 밥 먹을 겸 잠깐 나왔다가 마침 연습복으로 쓸만한 옷 좀 찾자고 해서 나와 본 거야. 금방 들어갈 거야.”

“니가 제일 큰 언니네?”

“제일은 아니고,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도 있는데, 그 언니는 다른 볼 일이 있다고 해서 우리만 나온 거야.”

“그렇구나. 난 또. 사실 아까 지아랑 너한테 가볼까 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까 되게 신기하다?”

“나한테 오려고 했다고?”

지아는 잠시 자신을 훑었다가 금방 떨어져 나가는 시선을 느꼈다.

“너네 연습하는 거 혹시 구경할 수 있나 해서 말이야. 밥 사준다는 핑계로 잠시 볼까 했지. 이상한가? 아무튼 거기 가면 연예인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더라고. 근데 지아가··· 민폐라고 가지 말자고 해서 안 간 건데, 여기서 이렇게 볼 줄을 상상도 못 했네.”

“다행이네. 내가 조금 더 연차가 쌓이면 모를까, 나도 이제 막 들어간 신입인데 니들 와도 회사 구경 시켜주긴 어렵지.”

“그렇구나.”

“그래도 나중에 내가 어떻게 부탁해 볼게.”

“정말?”

“그럼. 친군데.”

“어머, 어떡해. 그럼 거기 갈 때 입을 옷이라도 미리 사놓을까? 화장품이랑?”

“호들갑은.”

“호들갑이라니! 연예인 만날 수도 있는데 꾀죄죄하게 하고 갈 순 없잖아?”

“연예인 없어, 우리 회사.”

“없어? 왜?”

“신생이라서.”

“그럼 너희들 뿐이야?”

“잘은 모르지만, 영입 준비는 하고 있대. 그런데 언제 영입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아무튼, 지금은 와도 연예인 볼 일 없으니까 너무 기대 마.”

“에이, 그럼 난 안 갈란다.”

“나 밥 사주러 온다며?”

“그거야 핑계지.”

저 두 사람, 원래 저렇게 친했던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서로 하하 호호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는다.

아름의 뒤에서 멀뚱멀뚱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아이들과 시선이 마주쳤는데, 지아는 ‘아이돌’이란 저런 아이들을 말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절로 가지게 되었다. 주먹만한 얼굴에 눈코입이 조밀하게 들어가는 데다, 그 와중에 눈은 크고 동글동글하며 커다래서 마치 인형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당분간은 거울도 못 볼 거 같았다.

“너희는 여기 왜 온 거야?”

이제 화제는 지아와 친구의 일정으로 옮겨졌다. 친구는 역시나 기운찬 목소리로 기분 전환할 겸 와봤다며 넉살을 떨었다. 아름은 이제 자기들도 옷 사러 가겠다며 각자 볼일 보자며, 다음에 만나자는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작고 야리야리한, 인형 같은 외모의 아이들이 졸졸 따르는 아름의 뒷모습을 보며 지아는 한기를 느꼈다. 세상과 차단된 얼음성에 홀로 갇힌 사람처럼, 들리는 것은 삭풍이 살을 에는 소리고, 보이는 건 그저 흐릿한 눈바람에 가려진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지아야.”

문득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친구가, 마치 억지로 나뭇가지를 박아 입을 만든 눈사람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나뭇가지가 움직여 안부를 물었다.

“괜찮아.”

“너 오늘 정말 이상하다.”

“기분이 좀 그래.”

“안 되겠다. 그냥 나가자.”

“미안해.”

“미안하긴. 억지로 끌고 온 내 잘못이지.”

1층으로 내려왔을 때, 친구가 쇼핑몰 근처에 있는 카페를 발견했다.

“커피라도 마실래?”

“아니, 괜찮아.”

“내가 살게. 아니다, 뭐 단 거라도 먹자. 어쩌면 기분 전환이 될 수도 있잖아?”

여길 데려온 게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친구는 꽤 적극적으로 지아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 죄책감이 들었다. 괜찮다 거부하려다 말았다. 이마저도 거부하면 친구와는 두 번 다시 함께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조각 케익을 주문하고 창가 쪽에 앉았다. 왠지 모를 서먹함 때문에 지아는 물론이고 친구도 아무 말이 없었다. 미안한데 또 짜증도 나는, 그런 복잡한 마음에 지아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마침 쇼핑몰에서 아름과 구체관절인형 같은 아이들이 주르르 나오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저 무리에 함께 있으니 아름도 구체관절인형의 하나가 된 듯 보였다.

“쟤들 참 예쁘다.”

친구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응.”

긴 머리를 찰랑이며 걷는 아름과 인형 같은 아이들의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도 쉽게 보기 힘든 광경이었던지, 쇼핑몰 앞 광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그들에게 향했다. 창밖인데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도 저기에 끼면 예뻐 보일까?’

그럴 리가 없다, 는 답이 곧장 튀어나와 머릿속 망상들을 두드려 깨뜨렸다.

그때 아름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름은 물론이고 옆에서 뒤에서 함께 걷던 아이들이 함께 몸을 굽혀 인사하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고 그들이 인사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응?”

지아는 어딘지 낯익은 사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지?”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본 친구의 물음이 들렸다.

아름과 인형들이 사내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이 보였다. 손짓도 하고, 고개도 까닥이고, 웃음도 짓고, 자기들끼리 깔깔거리기도 하는 모습이 꽤 친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다 아름이 손가락을 들어 지아를 가리켰다. 바라보던 지아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곧 그녀가 지아를 가리킨 게 아니라 카페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사내의 시선이 이쪽, 지아가 있는 쪽을 향했을 때 긴장으로 인해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했지만 역시나 그들은 카페 쪽으로 몸을 틀어 다가왔고, 지아는 얼른 고개를 떨구고 테이블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친구의 물음에도 지아는 답을 하지 않았다.

카페 문이 열리면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아무거나 먹어도 돼요? 이것도 사주시면 안 돼요? 그런 재잘거림들이 이어지는 와중에 지아는 그냥 이 카페를 나가야 하나, 심각한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부르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진동벨이 울리고, 친구가 잽싸게 진동벨을 붙잡았다.

“내가 가져올게.”

지아는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친구를 붙잡아보려 했다. 그 순간 저기 떨어진 곳에 있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너희 계속 쇼핑하는 줄 알았는데, 여기 왔어?”

“지아가 기분이 별로인 거 같아서. 이거라도 먹으면서 기분전환이나 하려고. 그런데, 누구시니?”

“아, 그러니까, 우리 오디션 때 심사위원이셨던 분?”

사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형식적인 자리였어요. 전 그냥 대표님과 아는 사이, 정도로 해두죠.”

“아, 그러시구나. 정말···듣던 대로 시네요?”

“네?”

사내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밌다는 듯 웃는 친구의 팔뚝을 아름이 장난스럽게 툭 치며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전 이만.”

“네.”

히죽 웃으며 돌아오는 친구는 자리에 앉자마자 몸을 앞으로 숙여 지아를 향해 속삭였다.

“저 사람인가 봐. 아름이 말했던, 잘생긴 남자.”

친구의 속삭임에도 지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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