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17화 (817/956)

Deligh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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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단유씨의 의견도 참고는 하겠습니다. 완전 공개는 어려울지 몰라도 비전문가들에게 평가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쨌든 대중들은 비전문가에 속하니까 그들의 감성을 고려해야 하는 입장에선 그런 평가가 더 솔직할 지도 모르겠고요.”

모처럼 먼저 제안을 꺼낸 단유를 위로하기 위함인지 대훈은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

“확실히 처음엔 그런 쪽으로 접근하려 했습니다만, 대표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도 문제가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요? 제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네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더니 대훈은 그렇지 않다고 손을 저으며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오히려 의견 주셔서 고마운 걸요. 그러고보면 이 회사를 세우기로 했을 때, 나름대로 생각하길 지난 회사에서 보고 겪었던 폐단은 없애자고 마음먹고 시작했는데, 저도 모르게 다른 회사들이 늘상 하는 방식대로 따라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단유씨 덕분에 반성하게 되네요.”

확실히 사회생활을 많이 해 본 사람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대가 무안해하지 않게끔 대화를 이끄는 솜씨가 좋다.

“빈말이 아니에요. 요즘 오디션 전성시대라잖습니까? 경쟁이라는 구도 속에서 여러 사람의 감정이 부딪히는 생생한 현장을 중계함으로서 사람들의 호기심과 재미를 자극하기 위한 이유도 있겠지만, 어떤 취향의 사람들이 대중에게 어필하는 지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볼 수도 있죠. 말만 데뷔 전이지 사실 TV에 나온 순간 데뷔나 마찬가진데, 그런 사람들 중에서 스타성을 지닌 사람들을 대중 스스로가 뽑도록 유도하는 작전은 확실히 효과적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기획사에서 연습하는 연습생들의 트레이닝 과정 일부를 공개하는 것은 데뷔조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동시에 대중의 취향에 맞도록 조절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겠죠. 장단점이 있지만 지금 당장은 어디가 맞다고 할 수 없으니 마케팅 팀이나 신인개발부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겠지만 단유씨의 의견은 꼭 참고하겠습니다.”

단유는 괜히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볼을 긁적였다.

“제가 확실히 이쪽 분야에 대한 식견이 모자라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 그렇게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거든요.”

“혹시 다른 의견도 있으신가요?”

“다른 의견이라기보다는, 단지 트레이닝 평가를 공개한다는 건 좀 더 정확한 통계 수치를 얻을 수 있다는 이점을 고려한 의견이었거든요. 소수의 사람들, 그들이 전문가라 할지라도, 결국 소수의 평가이니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로서 보긴 어려운 것이 아닐까. 그러니 평가를 위해서라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다양한 의견을 종합해야 객관적이고 평균적인 점수 통계가 나오지 않을까 했던 거죠.”

모름지기 평가란 다양한 데이터에 대한 분석이다. 비록 한 연습생에 대한 평가의 항목을 특정 몇몇 분야에 제한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이자 직접 연습생들을 가리킨 트레이너나 소수의 사람들이 평가를 하지만, 역시 소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편중된 평가가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는 연습생들을 모집하던 오디션 평가 때 느낀 부분이기도 했다. 단유도 참석했었지만, 심사를 위해 앉은 심사위원들은 다수의 참가자들에 대해서는 유사한 평가를 했으나, 몇몇 사람들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나뉘는 것인지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럴 때 이를 중재하는 것은 주로 대훈의 역할이었는데, 단유는 이런 방식이 한 대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에 부족하다고 느꼈다.

아니, 객관이라는 표현보다는, 어쩌면 대훈의 표현대로 ‘대중적’인, 혹은 ‘보편적’인, 이라는 말로 바꿔야겠다. 대중의 호감을 끌어낼 스타로 키우기 위해 뽑는 연습생인데, 그들에 대한 평가를 단순히 경력에 의존한 소수 사람들의 판단에만 의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는 게 단유의 입장이었다.

“뭔가···결론적으로는 동의하는 바이지만, 거기에 다다르기까지···그러니까 생각하는 방식이 참···생소하달까요? 아마 제 주위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단유씨가 유일할 것 같네요.”

그래도 일리있는 이야기라며, 대훈은 답했다. 그리고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자주 이야기를 하자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단유도 더 이상은 간섭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할 이야기도 없고.’

어쨌든 뜻은 전달된 듯 하니 남은 건 대훈과 회사 내 주요 임원들의 결정에 달려있었다. 물론 단유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되든, 되지 않든 상관없었다.

****

“저 언니, 무슨 일 있나?”

“지난 학기까지만 해도 저렇지 않았지?”

“내 말이. 혹시 실연당한건가?”

“남자 친구가 있었어? 몰랐네.”

“나야 모르지. 그냥 저렇게 변할 정도면 그 정도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거지.”

“에이 난 또.”

지나간 선배를 돌아보며 후배 두 사람이 수근거렸지만, 지아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햇빛을 받으며 걷는 것 자체가 괜히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사람들의 시선을 덜 받는 곳으로 숨고 싶을 따름이었다.

아예 학교를 나오지 않는 방법도 생각은 했지만, 졸업은 해야 할테니 수업을 빠질 순 없었다.

이론 수업이든, 실기 수업이든 지아는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누구 말대로, 이 전공을 살려 미래를 꾸리기엔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어디든 경쟁을 하지 않는 곳이 없겠지만, 대학 내, 같은 학과 내에서도 경쟁에 밀려 교수의 눈에도 띄지 않을 정도가 되어버린 지아는, 이대로 졸업을 해도 변변한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제대로 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때문에 처음 생각했던 대로 전산회계학원이라도 몰래 다니며 자격증을 취득하고 그길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느라, 수업은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아야.”

“응.”

“너 요즘 무슨 일 있니?”

“일은 무슨. 없어.”

“그런데 왜 이렇게 침울해 있어? 혹시 그 날이야?”

“아니, 그런 거 아냐.”

“그럼 기운 내. 원래도 잘 웃지 않는 애라 무거운 분위긴데, 지금은 완전히 죽을 날 받아 놓은 애처럼 군다?”

“고마워.”

뜬금없는 지아의 말에 친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그냥.”

말이라도 걸어주는 게.

“싱겁긴. 야, 그럼 기분 좀 내게 어디 놀러나 갈래?”

지금은 어디든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친구라고 말이라도 붙여주니 고맙긴 하지만, 지금 같아선 그마저도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속내를 대놓고 드러낼 성격도 아니었다.

“아니, 오늘은 그냥 좀.”

“빼지 말고 같이 가자.”

“···어딜?”

“기운 내려면 역시 쇼핑?”

쇼핑할 돈도 없는데. 혹시 자기가 산 물건을 들어줄 시녀가 필요한 걸까? 아니다. 친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지아는 서둘러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계속 부정적인 생각만 하다보니 이런 친구의 배려마저 흑심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려 한다. 그럴 친구가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부정하려 들면 들수록 어둠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

“가자, 너 수업 끝났지?”

“응.”

“오케이. 고고!”

몰래 지갑 속에 넣어둔 돈이 얼마였던가를 생각하며 걷던 지아는 문득, 이 아이가 왜 이렇게 자신에게 친절하게 구는 것일까를 생각해보았다. 물론 동기라는 이유도 있지만, 워낙 성격 좋은 친구였던 탓에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기도 하고, 그런 접근을 딱히 거절하지 않았던 탓에 1학년 때부터 별다른 이유 없이 친하게 지냈다.

성격적으로 따지면 정반대인 친구였다. 지아가 지금처럼 극도의 우울감에 젖어 들기 전에도 다소 소극적인 면이 많았던 반면, 친구는 굉장히 적극적이고 쾌활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아 대충 중상위권 정도인 데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실력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소리를 낸다고 교수님께 칭찬을 받기도 했던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어쩌면 지아의 착각일수도 있지만―유독 지아에게만 친절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껏 한 번도 그 점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다 보니 이유가 궁금해졌다. 결코 지금 그녀가 보이는 친절이 의심스럽다거나, 그녀의 미소가 위선적으로 느껴지는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불쌍한가?’

동정?

“있잖아.”

“응?”

한참 자기가 빠져있던 웹툰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친구는 지아가 부르자 동그란 눈을 돌려 지아를 바라보았다.

지아는 잠깐 머뭇거렸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넌 걱정이 없어?”

“걱정? 무슨 걱정?”

이걸 물으려던 게 아닌데, 입 밖으로 나온 단어는 계속 고민하고 있던 문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진로 말이야.”

지갑 걱정에, 친구에 대한 생각에, 의심에, 우울에, 질투에, 짜증이 겹쳐지며 머리가 뒤죽박죽되었던 것인지.

“얘는. 진로 걱정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금수저가 아니고서야 다들 진로 걱정을 하지. 특히나 우리 이제 졸업반이잖아? 설마, 진로 걱정 때문에 그렇게 침울했던 거니?”

자기도 진로 때문에 걱정이라며 한숨을 쉬는 시늉을 하며, 요즘 세상이 참 살기 어렵다더라, 선배들 중에도 취직을 못해서 절절매는 사람 보면 남 이야기 같지 않더라, 대학이라도 좋은 델 들어갔으면 모르겠는데 학연도 실력도 빽도 없다보니 먹고 살 길 막막하다며 하소연하는 애들이 너뿐만이 아니다, 등등 이야기가 쏟아져나왔다.

딱히 티 잡을 만한 답변은 아니었지만, 화제 하나만 던져주면 그게 어떤 주제든 막힘없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풀어낼 능력이 있는 친구의 답이었기에 딱히 와닿지는 않았다.

“그래서 넌 어떡하기로 했어?”

“야, 야. 굳이 이런 이야기를, 응? 이렇게 화창한 날, 응? 거리 위에서 하고 싶니? 솔직히 이런 이야기는 골방 같은 어두침침한 술집 구석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해야 할 이야기 아냐?”

“···미안.”

친구의 타박에 사과했더니, 친구는 또 무슨 사과냐며 지아의 등을 툭툭 때렸다.

“야, 그냥 해 본 말이야. 진짜 널 보니까 무슨 말을 못 하겠다. 한 마디만 해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너 괴롭히는 줄 알겠다.”

친구는 너스레를 떨며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금방 표정을 바꿨다.

“나도 답답하긴 해. 사실 대학원도 나한텐 무리고, 그렇다고 지금 졸업해 봐야 불러줄 데도 없고, 찾아가도 문전박대나 받지 않을까? 콩쿨 입상한 기록도 고등학교 때 뿐이고, 대학 와서는 그저 그런 정도니까. 어디 피아노 과외 선생이나 하며 살면 딱이겠는데, 그런다고 먹고 살기나 하겠니? 입시 학원 선생도 요즘은 학력 안 되면 못 들어가잖아? 나는 뭐 서류에서 쓱, 이지.”

그렇다. 말해 뭣하겠는가. 지아의 처지나, 친구의 처지나 사실 다 거기서 거기다. 누구를 위로할 처지도 안 되고, 누구를 격려할 처지도 못 된다. 그러니 친구는 현명했다. 도움도 안 될 이야기를 나눌 바에야 차라리 입을 열지 않는 게 나으니까.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름이 있잖아? 난 걔가 정말 부럽더라. 걔는 그래도 얼굴이라도 타고 났잖아? 너도 알지? 걔 1학년 겨울에 코 한 거? 근데 코만 살짝 올렸는데 얼굴 인상이 확 바뀌잖아? 그래서 이번에 무슨 기획사도 들어간 거고. 그거 보면 차라리 빚내서 얼굴 좀 만지는 게 성공하는 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런 이상한 마음이 든다? 물론 난 해도 안 될 거야. 본판이 이런데.”

“너 정도면 괜찮지.”

“그렇게 생각해? 고맙다. 흐흐. 근데 나도 내 자신을 잘 알거든? 써먹을 얼굴 정도 되려면 코만 만질 게 아니라 얼굴을 싹 뜯어고쳐야 할 걸? 에휴. 누굴 탓해? 이렇게 낳아준 우리 엄말 탓해야지. 그래서 말야, 내가 맨날 우리 엄마랑 싸운다니까. 우리 엄마가 뭐라는 줄 알아? 내가 아빨 닮아서 그렇대. 탓하려면 아빠한테 가서 하래.”

별로 재밌지는 않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게 매너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실없는 농담에 웃을 수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까지는 자신이 그리 최악까지는 내려가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야, 야. 말 나온 김에 거기 가볼래?”

“어디?”

“아름이 있는데.”

“거길 왜 가?”

“친구 보러 왔다고 하고 가보자. 혹시 알아? 간 김에 연예인이라도 볼지?”

“연예인? 누구 있는데?”

“몰라. 근데 지난번에 아름이가 그러는데, 거기 되게 잘 생긴 남자가 있더래. 오디션 볼 때 심사위원이었는데, 하마터면 오디션 포기하고 고백할 뻔 했대. 한 눈에 반했다고.”

“풋.”

이번엔 조금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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