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16화 (816/956)

Fall off(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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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마치니 취기가 반쯤 가신 기분이었으나, 우울함은 2배로 늘어난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와 창을 열었더니 서늘한 바람이 제멋대로 들어와 덜 마른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지나갔다. 덜 마른 어깨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차가운 주사 바늘이 되어 콕콕 쑤시는 느낌에 지아는 다시 창을 닫았다.

오늘은 많은 생각을 하면 안 될 것 같다. 하면 할수록 더 끔찍한 상상과 암울한 미래와, 그 미래의 끝을 보고 싶지 않아 도망치려고만 드는 불쌍한 자신을 상상하게 되니까.

‘나쁜 년.’

지아는 마치 주위 사람들의 모든 불행을 다 떠맡는 역할이 아닐까 싶었다. 모두의 불행을 떠맡는 덕에 누구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기회를 받고 희망을 꿈꾸고, 누구는 불행의 무게에 허덕이며 고개를 들지도 못한다. 무거워진 머리를 베개에 박고 쓰러졌다.

이대로 잠이 들면 좋으련만.

그런데 머리가 너무 어지럽다.

****

“점점 날이 더워지는 것 같네. 오는 데 힘들진 않았어요? 저기 가서 시원한 커피라도 마실래요?”

단유는 새삼스럽게 친근한 인사를 건네는 대훈을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그러마, 하고 따라간 곳은 사내에 마련된 작은 간이 카페였다.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작게 마련한 이곳은, 부르기는 ‘카페’라고 하지만 실상은 작은 커피머신 몇 개와 주스 디스펜서를 가져다 놓고 누구나 와서 음료를 마실 수 있게 마련한, 탕비실 대체 공간이었다. 재료는 주기적으로 채우도록 하여 누구나 부담 없이 와서 마실 수 있게 해놓았는데 벌써 직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커피든 음료든 뽑은 뒤 바로 앞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공간을 마련해 놓으니 과히 ‘카페’라 불러도 손색은 없다.

개인 컵을 사용해야 한다는 룰이 있어 자칫 번거롭게 여길 수도 있을지 모르나, 남자 직원들이 워낙 좋은 반응을 보여 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훈은 커피 머신 뒤쪽 찬장에서 컵 두 개를 꺼냈다. 회사 대표기에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능숙하게 아이스 커피 두 잔을 뽑아 단유에게 한 잔을 건네고는 비어 있는 테이블로 단유를 안내했다.

“이제 회사로 출근하는 게 꽤 익숙해 보이네요.”

“덕분에요.”

“그럼 이사 자리라도 하나 마련해 드릴까요?”

단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그건 안 되죠. 아는 게 없으니 회사에 도움이 될 리가 없는데 뭐하러 직책을 맡나요.”

“누군 처음부터 잘 하겠어요? 하나씩 하나씩 배우면서 일하는 거죠.”

사실 이 이야기는 지금이 처음이 아니었다. 최초 회사 투자를 결정하고 택윤과 만난 자리에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던 중에도 회사 내부 경영 상태를 감독하는 사외 이사 자리가 제안되기도 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 자리는 단유 대신 택윤이 들어갔다.

“아뇨. 전 지금이 딱 적당할 것 같네요. 전 투자자로, 경영은 대표님이. 이 관계로 만족하죠.”

요즘―이런저런 이유로―편의를 봐주기 위한 명목상의 이사 자리를 두는 회사가 많다 하더라도, 단유가 투자한 회사는 그런 편법을 사용하길 원치 않았다. 더군다나 제 몫도 못하고 그저 거수기 역할만 할 게 뻔한 그런 자리는 미래의 회사를 위해서도 만들지 않는 게 좋다.

또 만약 제 역할을 하기 위해 이사 자리를 준다손 치더라도, 경영 전반에 대해 아는 바가 적은 단유기에 경영에 간섭할 수 있는 이사 자리는 스스로 거절하고 싶었다. 그래야 옳은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 이라는 나름의 이유를 설명했더니 당시에는 납득한다는 듯 넘어갔던 대훈이 또 다시 제의를 해 온 마당이라 단유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뭐, 본인이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아, 저희 연습생들 지금 밑에서 연습하고 있을 텐데 한 번 보고 가시겠어요?”

자신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듯 대수롭게 대꾸하며 금방 화제를 돌리는 대훈이었다. 물론 그 마저도 단유는 정중히 거절했다.

“뭐하러요. 그냥 구경만 하는 거면 오히려 그분들 연습하는 데 방해만 될 거예요. 게다가 지난번에 오디션장에서 얼굴은 다 봤잖아요? 그리고 만약 나중에 그분들을 보아야 할 일이 생기는 경우라면, 가능하면 데뷔 쇼케이스 무대에서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 아이들 얼굴을 보란 이야기가 아닙니다. 연습생들이 어떻게 연습을 받는지, 그리고 트레이너들이 어떻게 트레이닝을 시키는지를 보라는 이야기죠. 그것도 나름 공부가 되지 않겠어요?”

단유는 컵을 입에 물고 가만히 대훈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 괜히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시선을 옆으로 피하는 대훈이었다.

“수상하네요.”

“뭐가요?”

“전부터 느끼긴 했지만, 너무 노골적이시네요. 마치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은 것처럼.”

깜짝 놀랐지만 놀라지 않았다, 를 가장하려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사주라뇨?”

커피를 내려놓고 가만히 생각을 정리한 단유가 말을 이었다.

“어쩐지 제가 계속 이 회사를 다녀야만 하는 것처럼 뭔가를 계속 제시하시니까, 그렇게 느껴지네요.”

“그런 거 없습니다.”

“공 이사님을 만나보면 알겠죠. 공 이사님 자리에 계시겠죠?”

난데없이 공택윤 이사를 지목하는 단유의 발언에 순간 당황했는지 대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다시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애를 태우는 대훈에게 잠깐의 여유를 준 뒤 말했다.

“그냥 말씀하세요.”

“실은···네, 공 이사님이 부탁하신 게 맞긴 합니다.”

“역시. 그리고 어쩌면 공 이사님도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았을 거예요.”

대훈은 최근 단유가 ‘나름’ 적극적으로, 회사 일에 흥미를 보이는 것에 마음을 놓고 너무 노골적으로 몰아붙였던 것인지 반성하며 대답했다.

“그것도···맞을 겁니다.”

“저희 선생님, 따로 만나신 적 있으세요?”

“전에 공 이사님이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도대체 우리 선생님은 무슨 생각이신지···.”

단유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암약하는 ‘수다쟁이’를 떠올리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 원장님께서는 단유씨가 좀 더 사회적인 활동을 하시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택윤의 사무실에서 독대하고 이야기를 청하니,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달리 둘러대지 않고 대답하는 택윤이었다.

“사회적인?”

“뭐, 제 개인적인 의견은 배제하고 말씀드리자면, 단유씨처럼 젊은 나이에 돈을 번 또 다른 자산가들의 경우 넘쳐나는 돈을 주체못해 흥청망청 시간을 보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잖아요? 단유씨가 그런 케이스가 아니란 건, 저는 잘 알지만, 어쨌든 단유씨는 젊고 여유가 많다는 건 똑같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정 원장님께서는 단유 씨가 직장 생활도 하지 않고 너무 많은 시간을 자유롭게 보내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투자를 하게 되고 기회가 생기다 보니 혹시 이쪽으로 단유 씨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보면 어떨까, 라는 의견을 주신 겁니다. 원장님께서 단유 씨에 대해 걱정과 사랑이 있으셔서 하신 말씀이시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오해는 하지 않아요. 무슨 뜻인지도 알겠고요.”

확실히 단유는 경제력에 있어서는 또래에서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추측컨대 상위 1%에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달리 단유의 경제력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노동과 생산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기에 다른 주변인들이 보기에 불안할 수 있겠다. 하은도 택윤을 만나기 전까지는 단유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물론 정확하게는 모른다. 택윤도 단유의 종자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니까―,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를 몰랐다.

그리고 단유의 경제력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뒤, 하은의 단유에 대한 걱정은 불안정한 경제력이 아니라 불안정한 사회적 지위로 관심을 쏟게 되었다.

반듯한 직장과 고정된 수입을 기반으로 여타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그대로 따르길 바라는 마음은 아니었다. 하은 자신도 그렇지만,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듯이, ‘그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기준은 없었다. 각자 자기만의 길이 있고, 하은이 하은만의 길을 찾아 가듯, 단유도 단유 나름의 길을 가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유에게 바라는 작은 소망은 좀 더 멀리, 넓게 영역을 늘렸으면 하는 것이다. 어느 길을 가더라도 기왕 걷는 길이라면 넓고 평탄한 길이 좋지 않겠는가.

험할 수도 있고 때로는 없는 길을 개척해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다. 하지만 단유가 걷는 길은 너무 좁다. 극히 제한된 인간 관계 속에서 ‘공부’를 이유로 너무 한 가지 방향만 몰두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걱정이 드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이렇지 않았을까?

주변과의 교류를 스스로 제약하고 서책과 씨름하며 평생을 바친 유학자들의 삶을 단유가 따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으려니.”

하은은 혀를 찼다.

“어처구니는 제가 더 없지 않을까요?”

“사람들, 그렇게 안 봤는데 왜 그렇게 입이 가볍대?”

“제가 아는 이들 중 가장 입이 가벼운 사람은···.”

“거기까지. 오케이. 알았어. 내가 부탁했어. 됐지? 근데 내가 잘못한 거니?”

“아뇨. 선생님은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오히려 선생님이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절 신경 써주신다는 사실이 고맙죠.”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요.”

“그럼 말 나온 김에 말이야···.”

“거기까지 하죠.”

“야!”

****

단유는 하은과의 대화에서 깨달았던 바를 상기했다. 불안지유불(佛眼只有佛)이라 하였는데, 단유는 우선 스스로에 대해 명확히 깨달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말이 거창해 깨달음이라 했지만, 사실 깨닫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단유의 세계관, 가치관의 근간은 ‘수학’과 ‘논리’다. 수학과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며 답을 구한다. 그러니 그가 바라보는 문제들도 그렇게 해석하면 되리라. 자신이 전혀 모르는 분야라고 마냥 ‘모른다’고 치부해버리고 단순하게 생각하려 했던 게 잘못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생각을 해 봤는데요.”

단유는 한 호흡을 정리한 후 말을 이었다.

“일단 근본적으로 트레이닝의 평가가 폐쇄적인 면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네요.”

“정확히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대훈에게 단유는 좀 더 풀어서 설명했다.

“트레이닝이라는 과정을 굳이 연습생과 트레이너에 구속할 게 아니라 사외로 공개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견입니다.”

“공개한다고 어떻게요?”

“결국에는 데뷔가 목표인 친구들이니 이들의 실력을 평가할 대상은 트레이너가 아닌 일반 대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데뷔 전에 미리 그들을 대중에게 보이고 그들에 대한 평가를 대중에게 받는 겁니다. 그 평가가 오히려 트레이너들이 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흠, 그건 좀 곤란한 문제네요.”

“왜요?”

“기본적으로 연습생들은 데뷔 전까지 공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비유가 와닿을지 모르겠지만, 연습생들은 일종의 상품입니다. 그것도 비밀리에 개발 중인 상품이죠. 만약 일반 산업 현장에서 그런 개발 상품의 기술이 타사에 넘어가게 되면 원천 기술을 가진 회사는 심각한 손해를 입겠죠? 연예 기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연습생들은 그냥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고, 계약에 의해 회사에 종속된 이들입니다. 만약 뛰어난 연습생이라는 소문이 나고 그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면 타 회사에서 그 연습생을 빼갈 수도 있는 일이거든요. 실제로도 그런 일이 왕왕 벌어지고요. 연습생이니 계약을 해지하더라도 위약금이 그리 크지 않다보니 위약금을 감수하고 빼가는 일도 허다합니다. 그런 상황인데 연습생을 공개하고 그들에 대한 평가를 맡긴다? 특허도 내지 않은 원천 기술을 공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회사로선 막심한 손해죠.”

“계약서가 의미가 없는 건가요?”

“계약서가 의미가 없는 게 아니라, 계약서를 무시할 정도의 돈이 의미 있는 것이죠. 그런 돈을 지불할 만큼의 가치있는 연습생이 있다는 가정하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연습생을 공개하면 어떻게 될까요? 저희는 높은 가치를 지닌 연습생을 보유하지 못하게 되고 말겠죠. 다른 기획사에서 넘보지 않을 수준의 연습생들만 말입니다.”

“그런가요?”

계약과 신뢰, 가 돈에 의해 간단히 무너질 수 있다는 가정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게 현실이라니 어쩌겠는가?

“저들이 비록 우리 회사에 오디션을 보고 들어왔지만, 꼭 우리 회사일 필요는 없으니까, 라는 게 현실이죠. 어쨌든 각자의 목표는 같은 듯 다르니까요. 데뷔, 라는 게 목표인 연습생들이니 지금보다 더 큰 회사, 더 좋은 조건에서 데뷔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옮길 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그걸 탓할 순 없어요. 하지만 우리도 회사인지라 그들을 붙잡아야만 하는 거고요.”

“의외의 곳에서 명암이 갈린다는 느낌이네요.”

“그렇죠. 어쩌면 그게 이 연예계, 아니 이 사회의 현실인지도 몰라요. 누군가의 명(明)이 누군가에겐 암(暗)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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