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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815화 (815/956)

Fall off(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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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돌아오니 주말이라 쉬고 있던 하은이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얼굴 보기 힘들다, 단유야.”

과자를 집어 먹는 모습을 보니 입에 침이 고이는 여유로움이었다.

“선생님이 바쁘셔서 그렇죠.”

옆에 앉으라며 비켜주기에 단유는 거절하지 않고 옆자리에 앉아 과자 하나를 집었다. 바스락거리는 식감을 즐기는데 하은이 물었다.

“너도 만만치 않은 거 같은데? 일이 재밌어?”

“일은요. 그냥 옆에서 구경하는 건데.”

몇 개 집어먹지도 않았는데 금방 입안이 텁텁해졌다.

“그냥 구경하는 사람치고 꽤 바쁜 것 같은데.”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 단유는 냉장고를 열고 음료수를 찾았다. 마침 오렌지 주스가 있어, 잔에 따르면서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생각보다 재밌어요. 시스템이 구축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그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흐름을 만드는지를 지켜보는 게 꽤 재밌어요. 텍스트로 읽은 것 이상으로 역동적이라는 느낌? 뭐, 아무튼 지금은 옆에서 이렇게 지켜보는 것도 공부란 생각에 즐겁게 즐기고 있어요.”

하은에게도 한 잔 마시겠냐고 물었더니, 하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넌 즐기면 그만이겠지, 난 아주 죽을 맛이다.”

“선생님은 맨날 엄살이시네요.”

“엄살이라니!”

하은에게 잔을 건네며 대답하는 단유.

“그렇잖아요? 힘들어 죽을 것 같은 표정은 지으면서도 늘 재밌어하시니까. 역설적이게도 말이죠.”

“즐거움이 없으면 여태까지 버티지도 못했겠지.”

목을 축이며 너스레를 떠는 하은이었다.

“요즘은 어떠세요?”

“일단 작년부터 추진하던 프로젝트는 마무리했더니 조금 쉴 틈이 생겼어.”

경기도권에 분점을 내는 사업 확장을 추진했던 게 작년이었는데 얼마 전 마침내 결실을 볼 수 있었다. 본원에서 효과를 본 다양한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하여,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 향상과 강사들의 효율적인 배정을 통해 학생과 강사들이 모두 만족할 수 있기를 꾀했다. 완전히 자리잡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고 분원 원장이 고민할 문제였다.

“난 다 했어. 이제 좀 쉬어야지.”

“잘 됐네요.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시죠?”

“여행은 무슨. 말이 그렇다는 거지 쉴 순 없잖아. 본원 운영은 계속해야 하는데.”

“아, 그러고 보니 선생님한테도 도움을 받으면 좋겠네요.”

“뭘?”

“학생들의 성취도 평가를 어떤 식으로 하는지에 대해서요. 지금 회사에서 연습생들을 뽑고 있는데, 이 연습생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에 대해 트레이너분마다 생각이 다르더라고요. 다른 기획사에서 하는 것처럼 주간 평가, 월말 평가를 시행해서 점수를 매기고 그에 따라 차등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분도 계시고, 연습생들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에서 차등 교육보다 상향 평준화를 목표로 새로운 커리큘럼을 만들어야 한다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양쪽 다 그럴 듯한데 어느 쪽이 좋을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요.”

“그건 내 분야가 아닌데?”

“아니니까 여쭤보는 거예요. 제3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교육업에 종사하시는 분이니까.”

“교육업이라고 하니 이상하네. 그냥 학원인데.”

“학원이야말로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이해관계에 맞게 제공하는 업종이잖아요. 어떤 의미에서는 학생이라는 수요자의 입장을 더 신중하게 고려하는 측면이 있겠죠.”

“그건 그렇지. 당장 학생의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학원의 평가는 떨어지고 원생도 줄어들 테니까.”

“그러니까요. 분야가 다르다고 해도 결국 교육이라는 큰 카테고리 속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겠죠.”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건데? 그냥 그 사람들한테 맡겨도 되는 거 아냐?”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이것도 공부라고 생각하니까,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려는 거죠. 만약 저한테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있고, 그게 100% 효과를 볼 수 있는 기획이라면 회사에 어드바이스를 할 생각도 있지만, 지금은 그냥 저 혼자 생각해보는 거예요. 그리고 마침 집에 훈육계의 전문가가 계시니 조언을 얻고자 하는 거구요.”

“전문가는 무슨.”

“고아 2명을 데려다가 한 사람은 해외 유명 클럽에서 뛰는 축구선수로 키워냈고, 또 한 사람은···돈 많은 백수를 만들어내셨으니 나름 전문가 아니십니까?”

“이건 칭찬인지 멕이는 건지 모르겠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시고, 의견 한 번 내주시죠?”

“아까도 말했지만 내 분야가 아니야. 그래서 잘 모르겠는걸? 만약 학원이라면 나름 학원 시스템을 운영해 본 입장에서 충고라도 하겠지만, 그런 교습업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 아니잖아?”

“기획사라도 자체적으로 트레이닝 커리큘럼을 운영할 생각이고, 지금보다 더 발전된 실력을 갖게끔 키워 데뷔를 시키는 게 목적입니다. 학문 분야만 다르다 뿐이지 학생들의 실력을 키워 좋은 대학에 입학시킨다는 구조는 같지 않나요?”

“구조만 같지, 내용은 전혀 다르잖아?”

“구조가 비슷하면, 그 구조를 운영하는 시스템에도 유사점이 있을 겁니다. 그 유사점 속에서 응용이 가능한 부분을 찾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점이라면 너희 트레이너들한테 물어보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경력이 많은 트레이너들이라며? 그 사람들이 이전에 경험했던 것들 속에서 좋은 점만을 취합해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겠니?”

“그분들의 경험을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그분들은 전적으로 경험을 토대로 한 트레이닝 시스템을 고수하는 편이에요. 아니, 그렇게 보입니다. 그분들이 결코 고집스럽거나 아집에 사로잡혀 바뀌려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과거의 경험했던 사례만을 토대로만 한다면 아무래도 제약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경험하지 못한 사례에 대한 접근성도 떨어지고, 또는 자신의 경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융통성이 떨어질 수도 있잖아요. 차라리 이럴 때는 비(非)경력자라도 참신한 발상이 나와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선생님처럼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한 이의 경험에서 힌트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판단에서 선생님께 조언을 부탁드린 건데요.”

“하지만 나 역시 이쪽 분야에서는 그런 경험자에 속하고,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다만.”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도 다른 학원의 운영 시스템을 공부하고 그 시스템과 비교하며 더 나은 시스템을 연구하신 덕에 이 자리에 오신 거잖아요? 그러니 경험의 폭을 강제로 넓힐 수 없을 바에야 다른 경험자의 경험담을 취합해, 보다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는 게 답을 찾기에 효율적이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특히 저라면 경험이란 게 전무하니 오히려 편견이나 아집 없이 다양한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를 토대로 더 나은 방안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했던 거고요.”

단유의 설명에 눈을 새초롬하게 뜬 하은이 넌지시 대꾸했다.

“골치 아픈 이야기로 넘어가려는 분위기다만.”

“전혀요. 지금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토의로 넘어가려는 건 절대 아닙니다.”

“내가 뭘 생각하는데?”

“경험주의와 합리적 사고의 비교와 대조, 같은 거요.”

단유는 자칫 자신의 말이 경험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 같은 늬앙스로 들렸을까 봐 미리 선수 쳤다. 그러자 하은은 옳거니, 손가락을 튕기며 대답했다.

“그래! 그거네. 그걸 계속 염두에 두고 말하던 거였네.”

마치 단유가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켰다고 의혹을 제시하는 하은의 말에 단유는 오해임을 밝혔다.

“제가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선생님이 생각하고 계셨으리라고 추측한 걸 말씀드린 겁니다.”

“부처의 눈에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엔 돼지가 보인다고 했다.”

“돈안지유돈(豚眼只有豚) 불안지유불(佛眼只有佛).”

“그래, 뭐 그거.”

“그래서 선생님은 전혀 그런 생각이 없으셨는데, 제가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거라, 추측했다는 말씀이신가요?”

“뭐, 이를테면.”

어쩐지 능청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보며 단유는 이마를 쓱쓱 문질렀다.

“하아. 그건 그냥 넘어가죠. 그러니까···.”

단유는 말을 하다 말고 하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괜히 거슬린다.

“···응? 왜?”

능청을 떠는 하은을 보며 단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그만하죠. 보니까 선생님이 되게 심심하신 거 같은데 그냥 다음에 이야기하죠.”

“···반대로 되어야 하는 거 아냐?”

“아뇨. 선생님은 바쁠 때 이야기해야 제대로 된 대화가 되는 거 같아요. 심심할 때 이야기를 하면 이상하게 말이 길어지고 맺음 없이 중구난방이 돼버리니까요. 저 일어날게요.”

“야, 하던 이야기 계속해.”

“다음에요.”

“너 진짜 나쁘다. 이제 선생님이랑 놀아줄···아니 어울려 줄 마음이 전혀 없니? 야, 단유야! 제대로 상담해 줄게! 어딜 가? 단유야? 단유야!”

불안지유불이라, 사람은 자신이 인식하는 것만큼 보이고 들리는 것이니 무릇 자신이 인식하는 바를 넓히면 더 많이 보이고 더 많이 들린다. 결국 하은은 단유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를 한 마디로 축약시킨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단유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도 가르쳐준 셈이라.

“역시 좋은 선생님이야.”

하은의 진짜 의도야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단유는 짧은 대화로 많은 것을 얻었노라 위안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도 모르게 휘청거리며 돌아온 지아는 문을 열자마자 자신을 반기는 어머니를 만났다.

“어이구, 이 계집애야. 요새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이리 술을 처먹고 돌아다녀, 돌아다니길. 쯧쯧, 세상 아무리 철없어도 너만큼 철없고 모지란 년도 없겠다. 이 모지리야. 세상 사람 다 욕하는 모지리가 내 딸이네, 내 딸이었어. 동네 부끄러워서 돌아다니지 못하겠어.”

“돌아다니지 마. 누가 돌아다니래?”

“뭐라는 거야? 안 들려, 이년아. 나이를 그렇게 쳐먹고도 애들처럼 술이 떡이 되게 마시고 다니니?”

“아니라고, 안 취했다고.”

지아는 나름 열심히 대꾸를 하는데 전부 입안에서 우물우물거리는 소리로만 맴돌다가 역한 트림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딸의 뒷덜미를 잡고 방으로 끌어준 어머니 덕에 지아는 무사히 침대를 찾아갔다.

“씻고 자!”

“······.”

“뭐라는 거야. 아이고 속이야.”

결국 문을 쾅 닫고 떠나는 어머니. 그리고 어둠 속에서 뜨거운 숨을 내뱉고 들이쉬길 반복하는 지아만 남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아름의 어머니는 자신처럼 취한 아름을 어떻게 대할까? 그녀의 어머니도 자신의 경우처럼 술 취해서 늦게 들어온 딸의 등짝을 열나게 때리며 한탄할까? 아니면 왜 이리 많이 마셨냐며 걱정하며 꿀물을 타서 입에 넣어줄까? 꿀물이라니. 유치하게.

집에 올 때까지는 이렇게 취하지 않았는데, 집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취기가 확 치솟아 오른 이유는 뭘까? 그리고 지금은 그 취기를 넘어 불쾌감이 치밀어 오른다. 침대에 술 냄새가 고스란히 배는 게 싫은 탓일까, 괜히 자신의 어머니와 남의 집 어머니를 비교한 자신이 싫은 탓일까, 비교할 수 밖에 없는 어머니의 무자비함이 싫은 탓일까.

문을 벌컥 열고 나가니, 어느새 거실은 불이 꺼져 어두웠다. 벽을 더듬어 욕실을 찾아 들어간 지아는 변기를 붙잡았다.

―우웩.

안방에서부터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 그러나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변기 물을 내리고 그대로 옷을 벗었다.

샤워기를 틀고 그 아래 서니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차갑고 뜨거웠다. 더듬거려 샤워 타올을 집은 뒤 대충 바디클렌저를 붓고 거품을 냈다.

미끈.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결국 한 손으로 벽을 짚고 한 손으로 대충 몸을 씻었다. 다리에 힘을 주었더니 절로 발가락이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못생긴 발가락. 그중에서 가작 작고 볼품없는 새끼발가락.

비교하려 들면 하나부터 열까지 비교가 된다. 굳이 어머니가 세상의 모든 딸들과 비교하려 들지 않아도, 오늘 함께 마주 보고 앉아서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던 ‘그년’과 비교를 하면 자신은 어디 하나 잘난 곳이 없어 보인다.

여름이면 배꼽을 훤히 드러내고 다니는 누구와 달리, 사시사철 가리기에 급급한 못생긴 허리와 아래로 처진 엉덩이. 종아리는 가는데 허벅지는 지 혼자 몰래 돼지 삼겹살을 처먹었는지 살이 뒤룩뒤룩 쪘다.

그년은 오디션이라는 곳에서 볼록 솟은 가슴을 자랑스럽게 쭉 내밀며 어필했을 것이다. 나 섹시하지? 반면에 자신의 것은, 그냥 거품으로 가리는 게 좋다. 잔뜩 거품을 만들어 아예 보이지 않게 가리는 게 좋다. 나도 좋고 남도 좋다. 그런 가슴이다. 볼품없는 가슴. 매력 없는 가슴. 매력 없는 나.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언제까지 씻고 있을 거냐고 구박하는 게 아닐까 싶지만, 정확하진 않다. 그래도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지아는 샤워기에서 쏟아져나오는 물줄기에 얼굴을 집어 넣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눈꺼풀을 때리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차갑고 아파서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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