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ll off(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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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고 가방 속을 뒤져보니 화장솜 뭉치가 손에 잡혔다. 그걸로 대충 눈꼬리를 찍어 누르며 화장을 고치는 척, 눈물을 감췄다. 언뜻 앞에 운전하는 기사분이 룸미러를 통해 자신을 본 것도 같지만 착각이리라.
‘안 돼, 이러지 말자.’
머리로는 이해한다. 이렇게 계속 자신을 몰아세우면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가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무언가가 계속 머릿속을 헤집으며 긍정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게 막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나가시고 아직 들어오시지 않은 듯했다. 조용한 집안의 썰렁한 공기가 차라리 다행이다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또 마냥 조용하니 괜히 우울해지는 기분이라 지아는 거실 소파에 앉아 TV 리모컨을 쥐었다.
채널을 돌려보지만 딱히 관심이 끌리는 프로는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눈에 익은데 이름은 잘 모르는 연예인이 나와서 뭔갈 잔뜩 집어먹고 있거나 저런 걸 굳이 왜 살까 싶은 것들만 모아서 마치 사지 않으면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는 듯 강조하는 쇼호스트의 과장된 표정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규칙도 모르는 야구 경기는 물론이고, 맥락을 모르니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드라마는 저절로 건너뛰게 된다.
그러다 음악전문채널이 나왔는데 잠시 리모컨을 누르는 손가락에서 힘이 풀렸다.
‘이 바닥 사람이 아니잖아.’
피아노 전공이라고 해서 매일 클래식 음악만 듣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요즘 유행하는 가요를 즐겨 듣는 편도 아니었다. 굳이 찾아 듣는다면 가요보다는 팝 쪽이 지아의 취향이었지만, 가요도 가끔씩 듣긴 했다. 그러나 요 몇 년 동안 가요를 거의 듣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까닭인지 TV에 나오는 숱한 아이돌들의 노래가 모두 생소했다. 핀마이크를 입에 붙이고 격한 안무를 추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아이돌들을 보니,
‘잘 생겼네.’
그뿐이었다. 늘상 듣던 화음과 반주에서 벗어나 미디 음원으로 범벅이 된 가요를 들으니 생소하고 이질감마저 느껴진다. 딱히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좋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 정도?
오디션에 도전한다는 자신의 친구도 저런 음악을 하기 위해 오디션을 본다는 걸까? 춤추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런 애가 저런 아이돌을 한다는 걸까? 평상시엔 감히 입어보겠다는 엄두도 나지 않는,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고 발랄하게 춤추는 피아노 전공의 아이돌을 상상하니, 도저히 그 속에 친구의 얼굴을 끼워 넣기가 쉽지 않았다. 못생겼다는 건 아니지만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 정도?
‘확 떨어져서 울어버려라.’
그러면 다음에 SNS엔 눈물을 흘리는 사진이 올라올까?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그녀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함께 울어주는 척 멘트를 남기겠지.
팩트는, 어쨌든 그녀는 설령 오디션에 떨어져도 외롭지 않을 것이고, 반면 지아는 오디션을 하건 말건 지금처럼 이렇게 홀로 거실에 앉아 궁상을 떨고 있을 거란 사실이었다.
“당신의 길을 찾아요.”
문득 이상한 남자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는지, 방법까지 알려주지 그랬어요.”
지아의 중얼거림은 곧 TV 속 아이돌의 미소에 묻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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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경우 지원자가 아무리 많아도 우선 서류에서 적당히 거른 후 남은 지원자들을 회사로 불러 면접을 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면접에 들이는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그게 효율적이다. 하지만 대훈은 260명을 모두 대면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이는 향후 회사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어떤 인재들과 함께 할 것인지를 모두가 함께 생각하기 위함이었다. 트레이너와 A&R, 마케팅과 같은 부서의 팀장들은 물론이고 투자자인 단유까지 심사위원으로 끼워넣은 이유이기도 했다. 대훈은 회사의 첫 시작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그리고 모두가 동의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방향을 잡고자 했고, 그 의도는 모든 이에게 환영받았다.
대신 몸은 조금 피곤하겠지만 말이다.
“몸보다 여기가 더 피곤할 겁니다.”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대훈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여기 오는 이들이 단순히 실력이 떨어져서 우리 같은 신생 기획사로 왔다, 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들 역시 스타라는 꿈을 갖고 절박한 마음으로 오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절실함과 노력을 편견없이 보도록 우리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일치했을 때, 우리는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유는 대훈의 이상과 가치관이 마음에 들었다. 그저 좋고 싫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노력과 마음가짐을 이해해주고, 안에 숨겨진 재능을 찾아내기 위해 심사위원도 노력해야 한다니, 이런 회사라면 소속된 연기자와 스태프들이 모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당장 단유만 해도 만약 대훈이 금전적으로 힘에 겨워 하는 일이 생기면 적극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니까.
‘나도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는걸.’
우습게도 돈을 벌기 위해 투자를 한 건데, 투자대상을 위해 더 열심히 돈을 벌어놔야겠다니. 만약 이 모든 과정이 단유에게 보여주기 위한 대훈의 작전이라면, 그 작전은 대성공을 거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준비를 끝낸 신생 엔터테인먼트사(社) ‘D&D Ent.’의 첫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23살 부산에서 올라온···.”
“안녕하세요. 광주 출신 16살, 귀엽고 깜찍한···.”
멀리 지방에서 온 이들부터,
“오들 극단 소속 배우···.”
“하이노트 실용음악학원에서 보컬을 전공한···.”
오랜 시간 실력을 쌓은 지원자들까지, 백인백색의 다양한 지원자들이 문을 두드렸다.
대체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고, 더러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의 지원자들도 섞여 있었다.
“유재하 씨?”
“네.”
“이름이 인상적이네요?”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름만 보면 딱 가수 쪽인데, 배우 지원이시네요?”
“네! 어렸을 때부터 배우의 꿈을 가졌고, 중고등학교 때부터 연극반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극단에 들어가 지금까지 2년간 실력을 쌓았습니다. 비록 경력은 짧지만 작은 무대에도 여러 번 올라간 경험이 있고, 자신감은 항상 넘칩니다!”
긴장한 탓인지 조리 있게 말하기보단 그저 기합이 가득 들어간 채로 씩씩하게 말하려 노력하는 지원자가 가상해서 채점표에 좋은 인상이라고 메모를 하던 단유는, 슬쩍 시선을 틀어 바라보니 옆에 앉은 연기 클래스 담당 트레이너의 채점표에 X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의아하게 여긴 단유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트레이너가 단유를 쳐다보더니 말없이 펜으로 사선 방향에 놓인 모니터를 가리켰다. 모니터에는 지원자의 바스트샷이 떠 있었는데, 이를 보고도 모르겠다는 듯 단유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트레이너가 자신의 채점표에 뭔가를 기입한 뒤 단유에게 밀어 보여주었다.
―무대 경험 부족, 발성 X, 거짓말?
요컨대 지원자가 말한 경력이라는 게 믿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연극을 했다면서, 게다가 고교 졸업 후 2년간 극단에서 생활했고, 무대에도 오른 적이 있다는 이의 발성으로 보기 힘들다는 트레이너의 판단이었다.
“연극을 하면 특유의 발성을 배우거든요. 그런데 자유연기를 하는 동안에 전혀 그런 발성이 보이지 않아요. 그건 저 사람이 거짓을 말했거나 혹은 그동안 전혀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죠.”
지원자의 면접이 끝난 후 잠시 시간이 빈 틈에 트레이너가 단유에게 알려준 이야기였다.
“제대로 된 트레이너에게 배우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잖아요?”
“극단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게 발성이에요. 배우의 발성은 기본 중의 기본이죠. 발성이 되지 못하면 무대에 오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 친구는 발성도 문제지만, 발음도 꽤 좋지 않았어요. 한마디로 배우로서의 기본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죠. 아마 그 때문에 기존에 속해있던 극단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어요. 마스크만 보면 꽤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겠지만, 배우가 꿈이었다는 사람이 그 시간이 지나도록 저런 발성과 발음을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면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저희 회사에 들어오더라도 노력보다는 요행을 노릴 가능성이 높은 것이죠.”
“그런데 TV나 영화에서는 그런 발성을 잘 안 쓰지 않나요?”
“그런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이 전혀 되지 않은 친구를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요. 만약 저 친구가 다른 기획사에 붙어 배우가 된다 하더라도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란 걸 장담할 수 있어요.”
그 지원자 뿐 아니라도, 의외로 많은 지원자들이 기본기 부족, 이라 쓰고 노력이 보이지 않음이라는 이유로 탈락 되어 돌아갔다. 개중에는 꽤 괜찮은 얼굴, 혹은 목소리를 가진 이들이 있었지만, 트레이너들 혹은 대훈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불합격되었다.
“정말 우수한 인재를 가려 뽑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제가 비록 최선을 다하자고 했지만, 저렇게 눈에 보일 정도로 부족한 사람들을 여럿 마주하다 보면 저들보다 우리가 먼저 지치게 되죠.”
물을 가볍게 머금고 마른 입을 적신 대훈이 다시 시작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다음 들어오세요.”
오디션이 계속 이어지면서 단유는 ‘정신적으로’ 지친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처음에는 하나의 꿈을 목표로 정진하여 온 이들이, 체계적으로 관리해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위치에서 한 계단 더 높이 발돋움할 수 있는 시스템을 찾기 위해 오디션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마치 되면 좋고 안 되면 말자는 식으로 오디션을 준비한 이들이 많이 보였다. 한 두 사람이면 그러려니 하며 넘어갈 일인데, 열 명, 스무 명을 넘어서다 보니 점점 다른 사람들도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고 객관적으로 평가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소위 넘치는 재능, 이라고 표현되는 이들도 없잖아 있었다. 모니터용 TV 속에서 빛이 나는 얼굴을 가진 이들을 보면 도저히 뽑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고작 몇 분이라는 시간 동안 관찰해보면 그들이 지금까지 소속사를 가지지 못했거나,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열 일곱 살, 조은영이라고 합니다.”
지친 와중에 오디션장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키 작은 소녀였다. 160이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소녀는 얼굴에 작은 강아지가 들어 앉아 있었다.
“가수 지원인가요?”
“네!”
“가수만?”
“어···연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요.”
“만약 연기를 제대로 배우면 배우 생각도 있어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뭐든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호기롭게 대답하는 지원자의 모습에 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사위원 석에 앉은 이들의 반응이 이제까지 본 중 가장 긍정적인 모습이었다.
“모니터가 잘 받잖아요.”
옆에 앉은 트레이너의 귓속말에 단유의 시선이 모니터로 향했다. 과연 모니터 속에는 그녀의 키가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작은 얼굴과 순해 보이는 눈매가 TV 속에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지난 몇몇 지원자들의 경우에서도 보았기에 딱히 기대가 가진 않았다.
“보컬 아니면 댄스?”
“둘 다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보니까 딱히 학원을 다닌 적은 없어 보이는데, 평소 어떻게 연습했나요?”
“집에서 동영상을 보면서 연습했습니다.”
처음의 어색했던 말투가 조금씩 사라지고 대신 똑 부러지는 듯한 어투의 대답들이 이어졌다. 그녀의 말솜씨만큼이나 실력도 좋을지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가 오디션장을 나간 뒤, 심사위원들은 잠시 오디션을 멈추고 의논할 시간을 갖자는 대훈의 의견에 동의했다.
“선생님, 어땠어요?”
“제가 말할 필요가 있나요? 쟤는 무조건 잡아야 겠는데요?”
도대체 저 실력으로 여태 대형 기획사를 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보컬 트레이너의 설명이었다.
“저도 동의해요. 집에서 연습했다길래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힘도 좋고, 바디 컨트롤도 좋아요. 춤이 뭔지 본능적으로 안달까? 확실히 재능이 있는 친구네요.”
혹시 학원을 다닌 적이 있는데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라는 댄스 트레이너의 말이었다.
“어떻게 보셨어요?”
갑자기 대훈이 단유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요? 제가 뭘 아나요.”
“그래도 느낀 바가 있으시지 않으세요? 이를테면 비전문가로서의 시선에서 어떻게 봤는지도 궁금하니까.”
대훈의 물음에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목소리 울림이 좋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던데요. 아까 김 선생님 말씀을 들은 탓에 계속 지원자들의 발성에 대해 주의하며 듣고 있었는데, 조금 전 그 아이는 잘 모르는 제가 듣기에도 깔끔하고 발음이 잘 들리는 목소리? 그런 거 같았어요. 처음엔 긴장한 것처럼 보였는데 노래를 부를 때는 집중해서인지 긴장하는 티도 잘 나지 않는 것 같이 보였고요.”
“잘 보시네요.”
대훈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쟤 뽑죠.”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선택된 첫 합격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