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ll off(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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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어딘가 아련한 느낌을 주는 곡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고 그 외 특별한 정보 없이, 오직 악보에만 의존하여 연주하다 보니 연주가 딱딱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잖아 있을 것이다, 라고 지아는 항변하고 싶었다. 태원의 연주는 마치 3, 40년 전의 블루지한 연주 스타일이 아니냐고 되묻고 싶기도 했지만, 차마 그러기엔 자신이 아는 바가 너무 없었다.
“잠깐 쉬었다 갈게요.”
다시 연주가 멈추었을 때, 지아는 혹시라도 태원이 말을 걸까 싶어 건반에서 손을 내린 채로 기다렸다. 하지만 태원은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녹음 부스를 빠져나갔다. 부스 문이 덜컥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아보고 그가 나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지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네. 한두 번만 더 맞춰보고 끝내도 되겠어.”
자신의 연주가 어땠냐고 묻기가 겁이 났는데 다행히 마스터링을 하던 엔지니어가 먼저 이야기를 해주어 지아는 내심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너무, 건조한 느낌은 아니었나요?”
“아니, 그 정도만 해도 괜찮아. 혹시 태원씨 이야기 때문에 신경 쓰였다면 너무 마음에 두지 마. 태원씨가 완벽주의자적인 성향이 있어서 그런데 믹싱 하면 별 차이도 안 나니까.”
엔지니어는 조금 더 손 볼 게 있다면 다시 연주를 재개하기 전까지 쉬고 있으라는 말을 건넸다. 이곳에 도착한 후 계속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던 터라 엔지니어가 건넨 말 한 마디가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하은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물러났다.
녹음 부스 바깥쪽에 냉온 정수기가 보이길래 냉큼 다가간 지아는 종이컵에 냉수를 담아 단숨에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을 만끽하며 두 세 잔을 더 마셨고, 그제야 갈증과 긴장이 다소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많이 힘들었어?”
언제 왔는지 스튜디오 실장이 바로 등 뒤에 서 있었다. 놀란 지아는 얼른 뒤로 몇 걸음 물러섰고, 실장은 고맙다며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손에 들었다.
“곡 괜찮은 거 같아?”
“···네.”
“별로였나 보네?”
“아니요. 괜찮았어요.”
“지아씨가 보기엔 어때? 잘 어울릴 거 같애?”
“네? 뭐가요?”
“곡 말이야. 설마 이 곡 어디에 쓸 건지 모르는 거야? 정말?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이거 그 친구 못 쓰겠네. 그럼 아무런 이야기도 못 듣고 여길 온 거야? 이 친구, 보기보다 용감하네?”
놀리는 것인지, 진심으로 용감하다는 것인지 의미가 명확하진 않았으나 지아가 듣기엔 둘 다가 아닐까 싶었다. 선배가 주선한 일이라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온 자신의 부주의함이 문제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이거 드라마 OST용인데, 전혀 몰랐어?”
“네.”
“태원이가 직접 작곡한 거야. 어, 설마 태원이가 누군지 모르는 건 아니지?”
“······.”
“어쩐지 반응이 심심하더라. 이야, 우리 태원이 불쌍해서 어떡하냐?”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게 뭐 있어? 사과하려면 저 친구한테 해야지.”
실장의 손가락이 지아의 뒤를 가리키고 있어 지아는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태원을 보며 지아가 죄송하다며 허리를 숙이는데, 실장의 익살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고 또 사과할 필요가 있나? 모를 수도 있지. 모르는 게 죄도 아니고. 그치, 태원아?”
“형도 그만해요. 어린 애를 놀리면 재밌나?”
“놀리긴 누가 놀렸다고 그래? 그래도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인물인데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알려준 거지.”
“이 바닥 사람이 아니잖아요.”
아까도 그랬지만 돌려서 선을 긋는 태도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민망해진 지아는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쭈뼛대는데, 태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지아를 지나쳤고, 그가 지나갈 때 매운 담배 향이 코를 찔렀다.
“만종아, 녹음 어때? 한 번 더 가야 하냐?”
키보드와 마우스를 현란하게 움직이며 믹싱을 하던 엔지니어가 태원의 물음에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전 이 정도로도 충분하죠. 문제는 형이지. 와서 들어봐요.”
“틀어봐.”
곧 전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잡음 하나 없이 깔끔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녹음실에서 연주하며 듣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태원이 슬쩍 지아를 쳐다보았다. 지아는 심장이 덜컹하는 느낌과 함께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던가 싶어 조마조마해졌다.
그러나 태원은 이내 모니터로 눈을 돌리고 곡이 끝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곡이 끝나고 모두의 시선이 태원에게로 향했을 때, 태원이 입을 열었다.
“가이드는 내일 따지.”
“오늘은 여기까지?”
“그러자. 어차피 가녹음이니까.”
그 말이 또 ‘더 해봐야 좋게 나올 리도 없지’라는 말로 들린다면, 역시 자격지심 때문이려나. 아니라고 부정하려 해도 태원이 간간이 드러내는 눈빛과 심드렁한 표정은 지아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한 공간에 같이 있어도 없는 사람 취급받는 느낌. 혹은 공기 같다는 느낌.
“수고했어요.”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다가 불시에 들이닥친 인사말에 지아는 허둥댔다.
“네, 네.”
그리고 황급히 덧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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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자가··· 260명이요?”
다시 찾은 대훈의 사무실에서 단유는 새로 작성된 문서를 받아보며 대훈의 보고를 들었다.
“많죠?”
“네. 솔직히 이 정도까지 많을 줄은 몰랐는데.”
“오디션 전성시대죠. 아니, 스타를 꿈꾸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소리기도 하고.”
스타. 선망의 대상. 성공만 하면 부와 명예를 한 손에 쥘 수 있다. 게다가 한류 컨텐츠의 세계적 인기로 인해 국내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주목받을 수 있다 보니 더욱 ‘스타’의 명성이 올라간 상황.
아무리 그래도 아무런 실적도 없는 신생 기획사의 첫 오디션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훈은 대형 기획사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이라고 덧붙였다. 어떤 대형 기획사는 매주 정기 오디션을 보는데 약 500여명이 지원한다고도 하고, 연 2회 공개오디션을 여는 중대형 기획사들의 경우에는 1천 명을 훌쩍 넘어버린다고 하니 규모 자체가 다르다는 말도 이어졌다.
수요와 공급의 문제랄까? 현재 대한민국에 수많은 기획사들이 난립할 수 있는 이유는 엔터 산업의 훌륭한 수익구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수익구조를 뒷받침해줄 원천 소스, 즉 공급이 거의 무한하다 할 정도로 충족되기 때문이란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이렇게나 재능이 넘치는 이들이 많다니.
어쩐지 진로에 대한 고민에 싸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대훈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런 고민이 하등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력적인 부분은 트레이닝으로 얼마든지 채울 수 있습니다. 진짜 재능은 의지와 끈기죠.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의지와 데뷔 이후에도 자기 관리를 포기하지 않는 끈기. 이 두 개만 가지면 중박은 친다고들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릴 때부터 이 두 개를 열심히 교육받잖아요? 몸에 배어있어요.”
“재능은요?”
타고난 발성, 타고난 음색, 타고난 연기력.
“예전에는 이걸 많이 따지긴 했어요.”
대훈의 손이 얼굴을 훑어내렸다.
“하지만 요즘은 그거보다 끼가 중요하죠. 끼만 있으면 기본은 되죠.”
듣다 보니 궁금증이 생겼다.
“대표님의 말씀을 들으니, 목표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어중간하단 느낌이 드는데요? 소위 말하는 대박까지는 바라지 않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요.”
“자기 분수를 알아야죠. 아직 저희 회사 수준으로는 대형 기획사를 극복하기 힘드니까요. 목표를 크게 가지란 말도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죠. 자신이 낼 수 있는 역량의 최대치도 가늠하지 못하고 대박만 노리다간 이도 저도 아니게 되거든요.”
“못할 건 또 뭔가요?”
“단순히 소속 연기자들의 실력만 가지고서는 성공하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만약 그 연기자가 압도적인 실력과 재능을 가져서 도저히 눈을 돌릴 수 없을 지경이라면 모를까, 최근 상향 평준화 된 시장에선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비벼볼 수도 없어요. 남은 건 회사가 어느 정도로 푸시해 줄 수 있냐는 문제인데, 아무래도 회사의 역량이란 게 대형 기획사에게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요. 하지만 이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줍니다. 꾸준히 신뢰를 쌓고 좋은 공급처란 인식을 수요자들이 인식하게 되면 그때부터 조금씩 사정이 나아지거든요. 그러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훌륭한 연기자를 뽑는 것과, 신뢰를 얻기에 필요한 시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느냐는 거죠.”
예전의 경험을 떠올리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이를테면 산업논리가 포함되었다고 해야 할까? 일단은 전문가인 대훈의 의견을 수긍하며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처음의 무관심했던 단유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택윤에게 따로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배우 부분과 가수 부분을 나눠서 지원받는 건가요?”
“우선은 평가 항목을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진행하지만 크게 의미는 없습니다. 향후 크로스 트레이닝 결과에 따라 포지션은 재조정될 수 있으니까요.”
“가수 지망생이 배우 쪽으로도 갈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지금 단계에서는 어느 한쪽을 고집하기 힘들어요. 트레이닝을 받다가 전혀 다른 소질을 계발해내는 케이스도 있으니까요.”
대훈은 계속 질문을 던지는 단유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관심이 있으시면 같이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어딜요? 오디션에요?”
“네.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심사위원석을 채우면 좋으니까요. 구색맞추기라고 불려도 할 말은 없지만, 신생이라 얕보이는 건 줄어드는 효과가 있겠죠. 게다가 예전에 연예계로 올 뻔도 했다면서요?”
“어떻게 아셨죠?”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얘기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알았죠.”
입꼬리를 늘리는 대훈을 보며 단유는 미간을 좁혔다.
“유진이군요.”
“하하. 좋은 친구라고 자랑하고 다녔죠.”
“근데 그거랑 심사를 보는 거랑은 다른 것 같은데요. 솔직히 제가 연기나 노래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요.”
“앉아서 평소 보여주시는 눈빛만 보여줘도 됩니다.”
“평소 제 눈빛이 어떤데요?”
“음, 셜록 홈즈 같은 눈빛?”
“네?”
“속을 꿰뚫는 듯한 눈빛이라 강심장이 아니라면 단유 씨 앞에서 뭔가를 숨기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단유의 심사위원 참가가 그렇게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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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운 이유는 단순히 발목에 깁스를 둘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미리 준비해둔 봉투를 받아 스튜디오를 나서자 텁텁한 공기가 밀려 들어와 숨을 막히게 하고, 택시를 잡으러 큰길까지 걸어나가는 동안 익숙하지 않은 목발을 지켜보는 낯선 시선들의 주목이 숨을 막히게 했다.
택시에 올라타고 택시기사분이 ‘어디로 갈까요’라고 물을 때, 하마터면 ‘아무 데나요’라고 말할 뻔했다. 아무 데나, 라는 말의 의미는 어디로도 갈 곳이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오늘 받은 돈으로 술이나 사 먹을까? 술을 즐겨 마시는 스타일도 아니거니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기도 싫다 보니 마땅히 부를만한 친구도 없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불쌍하고 비참하고 굴욕적인 인생, 이란 자기비하만 남는다.
집으로 향하는 동안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아는 핸드폰을 꺼냈다. 모두가 나처럼 살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과 동시에 호기심이 생겨 지아는 SNS를 열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담 너머로 엿보았다. 언제 나갔는지 모르게 해외 여행을 떠난 친구의 해변 셀카 사진을 스크롤하고, 독주회 준비를 하는 선배의 작위적인 연습 장면을 넘기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남자 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한 후배의 사진을 액정에서 지워냈다.
그러다 우연히도 한 게시글을 보게 되었다. 연주와 동시에 노래를 부르는 동영상을 올린 친구의 게시글이었는데, 지아와는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뛰어난 외모로 학교에서 유명한 친구였다.
‘오디션 도전!’
해쉬태그 옆에 내일의 스타, 오디션, 청춘에 도전하라, 같은 낯간지러운 말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아래로 여러 사람들의 응원 댓글이 주르륵 이어지고 있는데 몇 번을 손으로 훑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오디션에 붙은 것도 아니고 고작 도전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는 심리도 궁금하지만, 마치 붙을 게 당연하다는 듯이 찬양하는 어조의 댓글들이 줄을 잇는 것도 우스웠다. 우스운데 어쩐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누구는 너무나 손쉽게 앞을 향해 나가는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는데, 누구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다리를 끌고 비참함을 속으로 삼키며 남의 인생을 부러워하고 있으니 왈칵 눈앞이 흐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