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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810화 (810/956)

Fall of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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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는 동안 몸 안에 품었던 열기는 예전에 식어 버렸다. 시계는 없었지만, 점차 밝아오는 하늘을 보니 지금쯤이면 정상이 거의 보일 때쯤이어야 하건만 의도치 않은 일에 엮이며 붙잡혀 있으니 오늘 운동은 말 그대로 ‘날 샜다’.

“평소의 저는 그렇게 조심성이 없다거나 하진 않아요. 오히려 너무 조심성이 많아서 사람들이 저보고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말하거든요. 피아노를 칠 때도, 아, 제가 사실 피아노 전공이에요. 피아노를 칠 때도 너무 조심스럽게 치니까 교수님도 그렇고, 친구들이나 선배들도 제 피아노가 너무 소심하다고 말할 정도거든요. 성격이 조금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지아의 뒤로 피어올랐던 안개가 느린 속도로 걷혀가고 있었다. 아마 시야에서 안개가 거의 걷힐 때쯤에야 구급요원들이 도착할까, 싶었다. 아니면 헬기라도 출동하려나?

“약간의 오기는 있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 뿐이니까, 만약 이걸로 성공할 수 없다면 난 영원히 성공할 수 없을지도 몰라, 같은 절박감도 있고. 그런데 사람이 절실하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잖아요? 주위 사람들을 보면 절실하지 않은 사람은 없거든요.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 적어도 피아노를 전공으로 삼은 사람들은 모두 절실해요. 그런데 그 중에서 피아노를 끝까지 안고 가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아요. 우리의 절실함보다 현실의 중압감이 더 컸던 거겠죠.”

단유는 그녀를 부축해 위로 올라가야 하는 건 아닌지 잠깐 고민했다. 현재 지아와 단유가 있는 위치는 등산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는데 구급대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 만한 위치였다. 그럴 일이 없도록 계속 귀를 기울여 다가오는 이가 없는지를 살피고는 있지만, 그쪽으로 신경을 쏟고 있기보단 차라리 지아를 데리고 위로 올라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역시 현실은 현실이란 생각이 들어요. 시작하기 전엔 목적지까지 무사히 완주한 제 자신을 상상했지만 말이죠. 저 사실은 끝까지 가지도 못했어요. 가다가 돌아오는 중이었죠. 도저히 끝까지 갈 자신이 없었거든요.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까 계속 무리하다간 오도가도 못할 상황이 될까 봐 두려웠어요. 그래서, 결국 다시 돌아가는 중이었어요. 그러다 이 꼴이 된 거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이렇게 돌아갈 수라도 있지, 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인생은 돌아갈 수 없잖아요? 만약 잘못된 선택으로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면 그때는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걸 미리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아 나름 교훈을 얻은 것 같아요.”

주위의 습기가 모두 그녀의 목으로 흡수된 듯한 느낌이었다.

“우습죠? 저도 알아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닌데. 그냥 그렇게 털어놓고 싶었어요. 사실 제 주위 사람들한테는 하기 힘든 말이잖아요?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고. 지레 포기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으니까.”

특히 어머니한테 이 사실이 들킬까 봐 겁이 나는 지아였다. 역시 어머니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잘 아는 분이었다. 아마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 포기하라고 종용하셨던 것이리라. 현실을 보라고 잔소리를 하셨던 것이리라. 이 나이 먹도록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해 괜한 반감을 가지고 어머니와 맞섰지만, 결국 어머니의 말이 맞았던 셈이다.

“사람은 고생해봐야 철이 든다더니 이제 저도 바뀌어야겠죠. 잘 됐어요. 이렇게 다치면서까지 얻은 교훈이니 쉽게 잊진 않겠죠.”

눈에 보일 정도로 퉁퉁 부은 발목을 보며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던 지아는 고개를 돌리고 손가락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죄송해요. 이상한 이야기나 떠들어서.”

“아뇨.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단유는 짧게 대답했다.

“그래도 이렇게 털어놓으니 조금 속이 후련한 느낌도 있네요.”

솔직히 말하면, 감정기복이 저렇게 심한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다는 정도의 감상이 전부였다. 그녀가 말한 바와 같이, 처음 보는 사인데 그녀가 어떤 사연으로 자신의 인생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녀가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에도 단유의 주된 관심사는 과연 응급대원들은 언제 올 것인가 하는 문제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슬금슬금 접근하고 있는 멧돼지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었다.

바람의 방향이 반대여서 지아는 멧돼지의 접근을 모르는 눈치였던 반면, 멧돼지는 그 냄새를 쫓아 이곳까지 온 것으로 보였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격언이 놀랍도록 들어맞는 상황이다.

슬쩍 단유를 돌아보니 단유의 시선은 지아를 빗겨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이야기 들어줘서.”

처연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단유는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처럼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사이였고, 비록 그녀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단유의 침묵에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어색함에 지아는 괜히 부어오른 발목을 건드렸다가 뼈를 관통하는 통증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봐도 쉽게 나을 부상은 아니었다. 뼈를 관통하는 교훈을 얻었다고 좋아해야 할까?

그때, 지아의 뒤쪽 수풀이 슬쩍 흔들렸다. 여전히 지아는 눈치를 채지 못할 만큼 떨어진 곳이었지만, 단유에게는 수풀 속에서 코를 내밀며 모습을 드러내는 멧돼지의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단유는 짧게 숨을 뱉었다. 괜히 지아가 멧돼지의 접근을 눈치채고 놀라면 일이 더 커질 것만 같아서 사전에 차단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기요.”

침묵을 지키던 단유가 입을 열자 지아가 발목에서 눈을 떼고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자기에게로 묶어놓은 틈에 단유는 마법을 사용했다.

냄새를 맡고 슬며시 접근하던 멧돼지의 머리를 겨냥해서 고압의 바람을 쏘아냈더니, 뭣도 모르고 다가오던 멧돼지는 갑자기 뭔가가 자신의 머리를 쿵, 하고 때리는 느낌에 놀라 멱따는 소리를 내며 달아났다.

―꿱!

그 소리에 흠칫 놀란 지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단유가 다시 지아를 불렀다.

“지아씨?”

꽤 타이밍 좋게 지아를 부른 바람에 지아는 고장 난 로봇처럼 고개가 삐걱거렸다. 순간적으로 뒤에서 들려온 동물의 소리와 앞에서 자신을 부르는 단유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와, 행동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판단력에 부하가 걸린 탓이다.

그리고 단유는 재차 그녀를 불렀다.

“지아씨.”

단유의 차분한 목소리는 그녀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네?”

“제가 한 마디 해도 될까요?”

“아니, 저기 근데, 저기 뒤에···.”

분명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라고 말하고 싶지만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는 듯 차분하기만 한 단유의 목소리에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남의 인생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진심을 털어놓으셨는데 무시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전 지아 씨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후회를 하실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후회요?”

“네. 왜냐하면 지금 지아 씨가 선택하려는 길이 지아 씨 본인의 만족을 위한 길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요.”

단유의 말에 지아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뒤쪽에서 뭔가 소리가 난 게 분명한데, 잠시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소리가 마치 멧돼지의 소리였던 것 같은데, 그래서 그 소리의 정체를 확인해야 불안감이 사라질 것 같은데, 이제껏 조용히 있던 단유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고, 한다는 말이 그녀가 후회하게 될 거란 예언을 하고, 그 예언의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게 느껴지니 지아는 문득 현기증 같은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무, 무슨 말이에요?”

“제가 보기에 지아씨가 진짜 두려워하는 건 진로의 실패가 아니라, 그 실패로 인한 주위 사람들의 실망감을 떠맡아야 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이를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면, 주위 사람들, 특히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길을 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에요.”

“······.”

대꾸를 하지 못하는 지아를 보니 괜한 말을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덕분에 그녀가 놀라거나 당황해서 몸을 움직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건 구급대원이 오기만을 바라면 될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것인가 싶다. 올 때가 됐는데.

“부모님, 선배, 친구는 지아 씨에게 강력한 조력자가 될 겁니다. 하지만 조력자들을 위해 사는 인생은 아니잖아요? 그분들의 말을 조언으로 삼되 그것이 삶의 지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봐요. 등산에 실패했다고 해서 의지를 꺾다뇨? 등산은 등산일 뿐입니다. 설령 이 산행에 성공했다고 해도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봐요.”

단유의 신랄한 지적에 지아는 괜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단유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마음 먹고 도전한 이 산행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소리 아닌가?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없나요?”

그러나 이어지는 단유의 질문에 지아는 반박을 하지 못했다.

“지아 씨는 자신감이 부족해 보이네요. 혹은 자존감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르고요. 어느 쪽이든, 문제는 우선 떨어진 자신감과 자존감을 회복하는게 우선이라 보이네요. 그런 의미에서 이 등산은 지아 씨에겐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는 말이었어요. 등산에 성공한다고 해서 지아 씨의 피아노 실력이 갑자기 상승할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죠?”

이건 말로 때리는 폭력, 이라고 지아는 생각했다. 당신,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잖아, 라고 화를 내기도 어려운 상황. 그저 세게 쥔 주먹만 파르르 떨 뿐이었다.

“꿈을 꾸고 복권을 산다고 복권에 무조건 당첨된다고 할 수 없잖아요? 미역국을 먹는다고 시험에 떨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홉수라고 불행한 일들만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네잎클로버를 쥐었다고해서 행운만 찾아오는 건 아니죠. 인생은 그런 인과관계가 불확실한 미신에 의지할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오직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과 그 확신을 밀고 나갈 의지의 문제, 라고 생각해요, 전.”

다행스러운 건, 단유가 말이 끝날 즈음에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물론 단유는 그들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일찍 눈치챘다. ‘여기요’라고 소리내어 그들을 부른 것도 단유였고, 그 탓에 지아는 단유의 말에 반박이나 항의를 하지 못했다.

단유의 목소리를 따라 구급대원들이 경사진 비탈을 조심스럽게 내려올 때 단유가 지아를 향해 마지막으로 말을 남겼다.

“제가 한 말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건 저만의 가치관이니까.”

이제 와서 그런 소리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넘길 수 있을 거 같냐고 따지고 싶었다.

“지아 씨만의 길을 찾길 바랄게요.”

구급대원들이 지아의 발목에 응급조치를 취하고 그녀를 부축해 등산로에 올랐을 때, 한 사람이 물었다.

“방금 같이 있던 분은 보호자 아니셨나요?”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가 뛰어 올라간 방향을 눈으로 쫓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었어요.”

“아, 그래요.”

지아는 ‘이상한 복장’을 하고 ‘이상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뒤 사라진 ‘이상한 사람’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는 어쩐지 화도 나고 분한 마음이 들었는데 막상 그가 눈앞에 사라지니 섭섭하고 아쉽다는 기분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이왕 도와준 김에 곁에 계속 있어 줬으면 싶었는데.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지아의 본성을 알았기 때문일까? 구급대원이 도착해 그녀를 부축하는 순간 짐 떠맡기듯 넘기고 사라진 단유의 뒷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그 시간 단유는 이미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너 왜 이렇게 늦었니?”

“일이 좀 있었어요.”

단유는 대충 얼버무리며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오래 묵힌 갈증을 시원한 물로 씻어내니 상쾌함에 몸이 떨렸다.

“얼른 씻고 나와. 늦겠다.”

“네.”

오늘은 모처럼 휴가를 낸 하은과 함께 영국으로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두 사람은 명수의 이적 후 첫 경기를 관람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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