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09화 (809/956)

Fall off(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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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에 시큰한 통증이 느껴져 입술을 깨물고 발목을 부여잡고 있는 와중에 사내가 다가왔다.

“가만히 계세요. 무리하면 더 큰일 날 수 있어요.”

이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하면 이상하겠지만, 지아는 사내의 목소리가 꽤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핸드폰 없으세요?”

“어, 이, 있어요.”

“그럼 우선 신고부터 하세요. 119에. 걸어서 내려가긴 힘들어 보이시니까요.”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주변 사람이 먼저 전화를 해주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눈이 사내에게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복장이 꽤 독특했다. 반 팔에 반바지 차림이라니. 마치 뒷산 약수터에 오른 사람 같지 않은가. 실상 이곳은 설악산 서북능선을 오르는 험준한 산길인데 말이다.

‘이상한 사람.’

생긴 건 준수한 편이고 목소리는 듣기 좋은데 복장이며 하는 행동이 수상쩍다. 게다가 요즘 세상에 핸드폰도 없는 사람이라니.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잘 생긴 사람이 사실은 사이코패스여서 앞에서는 친절하게 굴다가 뒤로 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멱을 따더란 괴담. 멀쩡히 생긴 주제에 저녁이 되면 바바리코트를 입고 여고 앞을 서성인다는 이야기. 괜찮은 남자로 소개받았는데 알고보니 변태였다는 이야기. 지금까지 살면서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들 속 변태남, 괴벽남, 살인자, 강간범, 추행범이 눈앞의 사내 위에 덧씌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경계 서린 시선에도 단유는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잠시 시선을 틀어 그녀의 발목 부위를 살핀 뒤 다시 그녀에게 신고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지아가 움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유가 등을 돌리자, 오히려 당황한 건 지아였다.

“어, 어디 가세요?”

단유는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았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네? 아니, 사람이 다쳤는데 그냥 가요?”

지아의 물음에도 단유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발목만 다치신 거잖아요? 딱히 응급 처치가 필요해 보이지도 않고 119에 신고만 하면 될 일이니까 제가 같이 있을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 그럴 수 있나? 다쳐서 꼼짝도 못 하는 ‘연약한’ 여자가 인적 드문 산속에, 게다가 아직 해도 다 뜨지 않아 사위가 여전히 어둡기만 한데, 이런 상황에서 그냥 두고 가겠다고? 만약 산짐승이 나타나면 어쩌라고?

덕분에 단유에게 몰래 덧씌었던 이미지는 싹 사라졌다.

“곰이라도 나오면 어떡해요?”

“곰이요? 제가 알기로 설악산에 곰은 없는데요. 정확히는 몰라도 1980년대에 마지막 반달곰이 죽은 거로 알거든요.”

지아도 자기 입에서 왜 곰이 나왔는지 몰라 당황스러웠지만, 이대로 보내면 정말 혼자가 될까봐 얼른 입을 열었다.

“그, 곰 아니더라도, 요새 멧돼지도 많다고 하잖아요?”

“멧돼지는···.”

생각해보니 멧돼지의 출현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과거 등산로에서 멧돼지가 출현해 등산객을 습격했던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낸 단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처방안을 소개해주었다.

“멧돼지와 같은 야생동물들이 무턱대고 사람을 덮치진 않아요. 당황하지 말고 마주보고 있으면 먼저 피하는 게 대부분이에요.”

“그게 어떻게 돼요? 만약 달려들면요?”

단유는 여자가 과장되게 겁을 먹은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가정이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서 대꾸하기가 곤란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죠?”

“그걸 지금 몰라서 그래요? 제가 부축해달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지아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무섭단 말이에요, 혼자 있기가.”

아, 그랬구나. 단유는 그제야 여자가 원하는 바를 알아챘다.

“몰랐네요. 무서워하는 줄.”

단유의 대답에 지아는 어이가 없어졌다.

“네? 아니, 그게 말이 돼요? 이렇게 어두운 산속에 여자가 다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그러면 무서워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혼자서 산을 타고 계시기에 그런 건 별로 안 무서워하시는 줄 알았죠.”

하긴 일행도 없이 혼자서 야간 산행을 하고 있던 건 지아였다.

“그래도 다친 사람이 이런 데서 혼자 있는데 그냥 가겠다는 게 말이 돼요?”

“···알겠어요. 우선 전화부터 하시죠. 저랑 말싸움이나 하자고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고.”

지아는 사내가 자신의 화를 돋우려 일부러 저런 화법을 쓰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의심은 둘째고, 우선은 그의 말 대로 신고를 했다.

“여보세요? 119죠? 저기 설악산 등산 중에 다쳐서요.”

신고를 마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더니 어색한 적막이 주위에 돌았다. 지아는 저만치 떨어져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지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 먼저 피한 건 지아였다.

‘이상한 남자.’

어울리지 않는 복장과 범상치 않은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였다. 여자가 다쳤는데 도울 생각도 않고, 아니 돕긴 했다. 만약 그가 붙잡지 않았으면 지금보다 더 큰 부상을 당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다는 평가가 변하진 않았다.

“왜 그렇게 서 있어요?”

지아의 물음에 단유가 평이한 어조로 대답했다.

“야생동물이 나타나지 않을까 보고 있어요.”

지아는 그의 대답이 자신을 놀리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그 대답에 발끈하기보다는 우선 할 말부터 하기로 했다.

“저기요.”

“네.”

“고마워요.”

“네.”

뭔가 생각했던 반응과 다른, 어딘지 심심한 대답에 지아는 재차 입을 열었다.

“도와줘서 고맙다고요.”

“네.”

하지만 여전히 무미건조한 반응. 혹시 아까 자신이 너무 다그쳤던 바람에 화가 나서 그런 건 아닐까, 지아는 슬쩍 눈을 흘겨 보았지만 단유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바라본 단유의 옆모습은···.

‘멍청아. 이 판국에 무슨 생각이야.’

지아는 자신의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하늘에 묽은 수채화 물감을 뿌린 것처럼 옅은 색이 번져나갔다. 나무와 잎들에도 생명력 가득한 색감이 깃들고 먼 곳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의 부지런한 지저귐이 들려왔다. 불과 몇 십분 전까지 어둡기만 했던 주위가 순식간에 변하니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먼 곳은 새벽 안개 때문에 흐릿하고, 가까운 곳은 한 남자의 존재감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흐릿한 느낌이었다.

애써 다른 곳을 보려 해도 계속 눈길이 가는데 지아는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성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정상적인 반응이잖아, 바보야.’

라고 설득해보려 해도 지금 상황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지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저기요.”

그러니 지금 지아가 사내를 호출한 것은 결코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네?”

언제까지 상대를 ‘저기요’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름이 뭐예요?”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결코 사내에게 흑심(?) 따위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정적인 산속 풍광을 즐기는 듯 보이는 사내의 여유로움을 일부러 깨고 싶어서도 아니었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그녀가 느끼는 일말의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합리적으로 설명할 도리가 없는 이유 때문에 지아는 사내의 이름을 물었다.

“김단유라고 합니다.”

단유, 라는 이름의 울림이 썩 나쁘지 않았다.

“이지아라고 해요.”

그러나 상대가 역시 이상한 남자라는 건, 자신의 이름을 알려줬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반짝이기라도 하면 이해를 하겠는데, 마치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려버리니 지아는 괜히 민망해졌다. 혹시 자신의 목소리가 작아서 못 들은 건 아닐까, 다시 큰 소리로 이름을 말해야 하나, 라는 고민을 짧은 순간 수십 번 머릿속에서 반복했다.

다시 정적이 찾아오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피는 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비록 발목을 다치고 구급 요원이 오길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여자니까 거울을 꺼내 외모를 살피는 것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지 않을까? 몰래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 살피니 땀에 흠뻑 젖고 흙바닥을 뒹굴며 더러워진 옷이 부끄럽게 여겨진다. 거기다 어쩌면 지독한 땀냄새가 날 지도 모른다.

‘바람이 저쪽으로 부는 건 아니지?’

어쩐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그저 앞으로의 미래를 두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굳건한 자신감을 얻기 위해 각오를 하고 오른 산행이었을 뿐인데, 생전 처음 보는 남자에게 땀과 흙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보일 뿐 아니라 도움을 받고도 고마운 줄 모르고 떽떽거리기만 하는, 성격 나쁜 여자로 미움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 지경인데, 하물며 역한 땀냄새까지 겹쳐진다면?

어쩌면 단유라는 저 사내가 어느 술자리에서 자신을 안주 삼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설악산에서 만난, 혼자 덤벙대다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른 주제에 도와주고 보니 성격은 개차반인데다 눈물, 콧물, 땀범벅에 역한 냄새까지 풍기던 여자에 대해 읊다 보면 소주 두 병은 너끈히 넘을 정도의 안주가 되지 않을까?

어쩌면 혹시라도 저 남자의 이야기가 흐르고 흘러 SNS에 오르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자기도 모르는 새 ‘설악산 무개념녀’, 혹은 ‘설악산 추녀’ 따위로 불리며 전 국민적 우스갯거리가 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스러워진다.

망상이 이어지다 보니 어쩐지 지아는 본인의 인생이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되는 것 하나 없는 인생이란 생각도 들고, 앞으로의 인생은 이보다 더 구리고 처참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흐느끼는 소리에 단유의 시선이 절로 여자, ‘지아’라고 소개했던 이에게로 돌아갔다.

‘많이 아픈가?’

애써 울음을 참아보지만 새어나오는 소리를 막지 못한 탓에 의도치않게 음산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만약 지금 이 사정을 모른 채로 다가오는 이가 있다면 걸음을 멈추지 않을까? 새벽 안개가 낀 산 속에서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를 듣는 경험은 흔치 않으니 말이다.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를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혹시라도 또 다른 부상이 있는데 단유가 보지 못한 것이라면,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것이라면 불가피하나마 약간의 힘을 발휘해서라도 도울 용의가 있었다.

그런데 지아는 화들짝 놀라며 단유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힘차게 내저을 뿐이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왜요?”

무슨 대답이 저런가 싶지만 단유는 다시 침착하게 질문을 던졌다.

“많이 아프신가 해서요. 계속 울길래.”

“울어요? 제가요?”

“네. 우셨어요.”

“아뇨, 안 울었···는데.”

말끝이 흐려지는 걸 보니 자신이 울었다는 걸 이제야 자각한 모양이었다. 참 별난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요.”

비록 조금 전에 통성명을 해서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부르려니 어색해서 또 ‘저기요’라고 부르게 된다.

“네.”

마치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처럼, 그냥 현장 효과음같이 반사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저기, 그러니까, 혹시 여기 사세요?”

“저요? 아뇨.”

“그런데 옷이···.”

“아, 그냥 가볍게 운동하려고 이렇게 입은 거예요.”

도대체 이곳 등산 코스에서 가볍게 운동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아, 그러시구나.”

대답할 말이 궁할 때는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게 현명하다는 정도의 이성이 돌아와 다행이었다. 여기서 지아가 대화를 끝내면, 또 한동안 정적 속에서 혼자 망상에 젖어 우울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지아는 아무 말이나 뱉기로 했다.

“전 도전하기 위해 왔어요.”

“도전이요?”

다행히 단유가 말을 받아주었다. 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사실 전 등산이 처음이거든요. 저 나름은 꽤 큰마음 먹고 도전한 산행이었어요. 쉽지 않을 거란 건 미리 알았지만, 이런 일을 당할 줄은 몰랐어요.”

“네.”

“저 사실은 이제 곧 대학을 졸업해요. 그런데 졸업 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아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길이 있는데, 어떤 선택을 해야 잘한 것인지를 고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계속 생각하다가 이번 산행을 결정한 거예요. 만약 제가 처음 해보는 이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다면 앞으로 겪을 일들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우습게 들릴 수도 있는데요, 사실 제 친구 중 어떤 이는 인도로 여행을 갔었대요. 혼자서요. 처음에는 되게 무섭고 걱정도 많이 됐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여행을 통해 자신감도 많이 얻고 용기를 가지게 되었대요. 덕분에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해외로 배낭여행을 가볼까 했는데, 사실 그럴 만한 여유도 없고 그건 정말 위험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대체할 만한 걸 고민하다 설악산 산행을 생각해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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