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07화 (807/956)

Fall off(1)

-------------- 807/952 --------------

“오빠!”

마치 적장과의 일기토를 위해 전장에 나서는 장수처럼 성큼성큼 걸어오는 유진의 기세에 눌려버린 대훈은 억지로 미소를 띄우며 손을 들었다.

“안녕? 잘 지내지?”

몰래 도너츠를 먹고 흔적을 미처 지우지 못한 사람처럼 어색한 미소를 짓는 대훈을 사납게 노려보며 유진이 소리쳤다.

“뭐? 잘 지내? 지금 오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

“아, 그런가? 하긴 네가 못 지낼 이유가 없지. 씩씩한 녀석이니까.”

“헛소리 집어치우고, 어떻게 회사 나가면서 한 마디 말도 안 해?”

배신감이 든다며 부들부들대는 유진을 보며 오히려 안심이 되는 대훈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그만큼 믿는다는 뜻이니 지금보다 밝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

“말 안 했나, 내가?”

안정을 찾기 시작한 대훈의 너스레에, 유진은 여전히 뿔났다는 듯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안 했어.”

“미안.”

답답한 마음에 유진은 발을 동동 구르며 따졌다.

“오빠 혼자 달랑 나가버리면 끝이야? 나는?”

“넌 아직 계약 기간 남았으니까.”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좀 진정해라. 나라고 너랑 같이 하고 싶지 않겠니? 근데 내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서 말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같이 하면 되잖아?”

“아니, 난 제대로 준비가 된 뒤에 부르고 싶었지.”

투자를 받고 회사를 설립했으나, 제대로 조직을 구성하기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상황. 전 회사에서 함께 넘어오기로 한 이도 몇 있지만, 많이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굴 데려오든 고생은 뻔했고, 시쳇말로 ‘꽃길’을 걷게만 해주고 싶은 대훈의 욕심에 유진과 함께 시작하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아, 정말···.”

유진도 사실 진심으로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유능하단 이야기에 추천을 받아 회사와 계약했던 유진은, 독단적이며 폭력적인 대표의 모습에 정이 떨어져 가던 중이었다. 속으로 다음 계약은 없다고 미리 마음먹고 있기도 했거니와, 그런 와중에도 물심양면으로 자신을 케어해주는 대훈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의 ‘탈출’을 심정적으로는 지지하는 쪽이었다.

그래도 이왕 나와서 이렇게 회사를 차릴 거라면 같이 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 괜히 심술을 부려보는 것이었다.

“단유, 너!”

대훈에게 먹히지 않으니 이번엔 단유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두 사람의 재회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차를 마시던 단유가 깜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넌 왜 나한테 이야기 안 했어?”

“무슨 이야기?”

“무슨 이야긴지 몰라서 물어?”

“만약 회사 이야기라면, 너한테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

“너 제대로 설명 안 하면 두 번 다시 너 안 볼 거다?”

“난 투자자야. 회사의 경영 일체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했고, 따라서 이 회사가 누굴 영입해서 어떻게 운영할 건지는 모두 유 대표님의 권한이야. 그러니까 너한테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게 없었던 거지.”

“너무하네, 진짜. 난 너한테 이것저것 이야기 다 했는데 이렇게 나오기야?”

“유진아, 좀 진정해라. 내가 일부러 부탁한 것도 있어.”

“오빠가 왜?”

“너 이렇게 반응할까봐. 내가 널 모르니? 카메라 없는 곳에서는 상남자나 마찬가지인 거 내가 제일 잘 안다. 만약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아마 회사에 사고치고 여기로 왔을걸?”

“지금도 사고 칠 수 있어.”

“제발 참자, 응? 너 계속 일해야 하잖아? 이 바닥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그랬어? 실력보다 중요한 거? 평판이라고 내가 했어, 안 했어? 아무리 불합리하고 불공평해도 참아야 하는 게 이 바닥이야. 그래야 너한테 유리한 평판이 쌓이고 그 평판이 널 스타의 길로 인도한다, 고 했어, 안 했어?”

“됐어, 그만해. 벌써 잔소리야?”

“사고 칠 생각 말고, 거기서 얌전히 최선을 다하고 있어. 네가 여기 올 때쯤엔 괜찮은 기획사로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로 올려놓을 테니까. 다행히 우리 투자자님께서 시간도 넉넉히 주시고, 투자금도 넉넉히 주셔서 준비는 제대로 갖출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어휴, 아무리 그래도 단유 넌 진짜 배신이야, 배신. 이런 앤줄 알았으면 너한테 고민도 털어놓지 않았을 거야.”

“자자, 그만하고. 이제 그만 돌아가. 바빠.”

“우와, 이제 내 매니저 아니라고 이렇게 매몰차게 돌려보내기야? 명패 하나 올렸다고 사람이 이렇게 변하냐?”

“명패값은 해야지. 이거 정말 비싼 명패야. 아침마다 명패를 손수 닦으면서 투자자님께 감사합니다, 절하고 있는 중이거든.”

“또 왜 그러세요? 민망하게.”

“이럴 때 열심히 아부를 떨어놔야 길게 일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이게 다 노하우거든, 비법.”

“그 아부 받는 사람이 저란 게 문제죠. 아무튼, 오늘은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기 자료는 가져가서 검토해도 되죠?”

“그럼요.”

규모가 크지 않은 회사다 보니 우선 배우 전문 연예 기획사로 시작하지만, 그래도 소속 배우들 및 이후 영입될 연습생들을 위한 관리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연예인을 ‘발굴’ 해내던 구시대적 방식을 떠나 이제는 배우든 가수든 ‘양성’을 하기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이 요구된다. 당연히 이 시스템을 구현하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 바로 이를 위한 필요 자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료였는데, 단유가 굳이 요청하지 않았지만 대훈은 어떻게 돈이 쓰이는가를 꼼꼼하고 투명하게 밝혀 투자자에게 회사가 존속되어야 할 당위성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단유는 그런 대훈의 일처리를 만족스럽다고 여겼다.

“두 사람 안 친해요? 왜 서로 존댓말이야?”

“비즈니스적으로는 윗분이신데 제가 함부로 말을 놓으면 안 되죠.”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제가 편해서 그런 거예요.”

“아우, 듣는 내가 불편해서 같이 있기 힘드네. 나 갈래.”

“조심해서 가.”

“나중에 나 꼭 불러줘야 한다? 알았지?”

“그래. 조심해서 가고, 지금 너 담당이 한준인가? 한준이한테도 안부 전해줘.”

“알았어요, 오빠. 수고하시고, 꼭 성공하세요.”

“화분 고맙다. 잘 가라.”

****

단유와 유진은 함께 회사 건물을 나왔다.

“너 진짜 돈 많구나.”

“많다고 했잖아.”

“이렇게 많은 줄 몰랐지. 어떻게 번 거야? 그때 말한 주식으로 이렇게 돈 번 거야?”

“뭐, 이것저것.”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유진이 익살맞게 인사를 건네며 허리를 꾸벅 숙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알았으면 앞으로 잘해. 아까처럼 사람 몰아세우지 말고.”

유진은 고개를 들어 단유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흠. 확실히 너도 나이를 먹긴 먹나 보다.”

“무슨 말이야?”

“예전에는 너 되게 차갑고 거리감이 조금 있었는데, 요즘은 이렇게 농담도 하고 그러니까. 뭐랄까? 조금 인간적인 느낌이랄까?”

“마치 전에는 내가 인간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하네? 그렇게 생각하는 주제에 잘도 친구인 척 했다?”

“아무래도 좋아. 어쨌든 너랑 친구여서 다행이다. 드디어 나에게도 이런 부자 친구가 생기는구나.”

유진은 싱긋 웃으며 단유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툭 두드렸다.

****

새벽이 지나며 사위가 환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산들바람을 맞으며 가볍게 조깅을 하던 단유의 이마에선 작은 땀방울이 송글 맺혔다.

오랫동안 쉬다가 다시 운동을 시작한 지는 며칠 되지 않았다. 오랜 기간 단련해온 몸뚱이였기에 그런지는 몰라도, 꽤 오래 쉬었음에도 단유의 운동 능력은 생각보다 많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오래 달렸음에도 땀이 많이 나지 않은 것은 단순히 날이 선선하기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이윽고 단유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 앞에 펼쳐진 경사로를 바라보며 호흡을 정리했다. 지금까지는 경사가 적은 산길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이제부터 산 정상까지는 꽤 가파르다. 다리와 어깨를 점검해보니 가볍게 뛰는 동안 몸이 많이 풀린 듯 했다. 호흡을 정리할 겸 스트레칭으로 몸의 근육들을 풀어주면 준비는 끝난다. 이제부터는 정상에 다다를 때까지 쉬는 일 없이 오르기만 하면 된다.

그때, 바라보던 방향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살피니 새벽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지친 데다가 그들의 입장에서는 내리막인 길이어서 입을 열진 않고 있었지만, 바닥을 짚고 내려오는 그들의 걸음은 꽤나 거칠고 소란스러웠다.

단유는 볼을 긁적이다 잠시 피할 것을 결정했다. 상대는 새벽 산행을 위한 등산복에 백팩, 전문 등반용 등산화와 스틱, 머리에는 헤드램프까지 착용한 산악인들이었고, 반면 단유는 가벼운(?) 운동을 위한 반팔, 반바지에 미끄럼 방지용 운동화가 전부인 상태였다. 만약 이곳이 그냥 동네 뒷산이었다면, 그래서 산 중턱 약수터에 올라 잠시 스트레칭하고 말 운동 정도였다면 단유가 피할 일도 없었겠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동네 뒷산이라 칭하기엔 너무 높고 가파른, 설악산 서북능선의 한 등산용 코스였다.

물론 그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은 누구도 모른다. 지금도 침대에서 낮게 코를 골며 자고 있을 하은도 단유가 새벽 운동을 하는 줄로만 알지 설마 설악산까지 와서 아침운동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단유가 굳이 이곳까지, 마법을 써서 온 이유는 단지 조용하고 운동에 도움이 될 거란 판단 때문이었다. 가끔 지금처럼 새벽 산행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거나 혹은 설악산 종주를 위해 날 밝지 않은 새벽부터 산에 오르는 등산인들을 제외하곤 거의 사람을 마주칠 일이 없는 시간대의 한산한 코스였다.

때문에 복장이야 어쨌든, 그저 편한 차림으로 운동만 하면 되지, 라는 실리적인 판단에 따라 가볍게 올라온 단유였기에 괜히 사람들의 눈에 띄는 행동이나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

이 시간대 이곳에서 등산객과 조우할 일은 거의 없었는데, 더러 드물게 지금처럼 등산객을 만날라치면 아주 잠시 숲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가 상대가 사라지고 난 뒤 다시 돌아와 운동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오늘따라 무슨 날인지, 조금 전 한 무리의 산악인들을 지나쳐 보냈는데 또 한 사람과 마주하게 생겼다. 특이한 점이라면 좀처럼 보기 힘든 솔로 산행이라는 점이었고, 또 특이한 점은 상대가 여자라는 점이었다.

물론 여자라고 해서 새벽 산행을 하지 말란 법은 없었고, 여자라고 해서 혼자 산행하지 말란 법도 없으니, 이를 이상하게 여길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상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치 비를 흠뻑 맞은 사람 마냥 얼굴과 옷이 푹 젖어 있는 데다가, 후들거리는 무릎이 위태로울 보일 정도인 여자라면 절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위험해 보인다고 생각하던 순간, 여자가 미끄러지면서 바닥을 구르면 아무리 단유라도 계속 숨어있긴 곤란했다.

짧은 비명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진 그녀는 경사에 쓰러지면서 아래로 굴렀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바위가 그녀의 허리를 훑으며 상처를 입히고 길옆으로 뻗은 억센 나뭇가지 하나가 그녀의 볼을 스치며 붉은 실선을 남겼다. 그러고도 멈추지 못해, 길가에 우뚝 솟은 커다란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려던 찰나, 단유가 나섰다.

마치 산 위에서 베어낸 나무를 경사에 굴리듯 구르던 여자는,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나 그녀의 몸을 붙잡아주는 도움에도 정신이 없어 즉각적인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괜찮으세요?”

단유가 무표정한 얼굴로 안부를 물으니, 그제서야 여자의 입술이 열렸다.

“네, 네.”

“위험했어요. 저기 부딪혔으면.”

단유가 손가락으로 슬쩍 가리킨 곳에는 여자의 키만큼이나 큰 바위가 서 있었는데, 단유가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분명 그곳에 머리를 박았을 일이었다.

“핸드폰 있으세요?”

“네, 네.”

“그럼 지금 당장 119에 신고해서 도움을 요청하세요.”

“네, 네.”

“그럼 전 이만.”

“아니, 저기··· 잠시만요.”

여자는 일어서서 자리를 피하려는 단유를 불러세웠다.

“왜요?”

“고, 고맙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아무튼 지금 발목을 다치신 거 같은데 무리하지 마시고 꼭 119에 구조요청 하시길 바랍니다.”

단유는 거기까지 충고하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이 모두 같을 순 없는 법.

“아, 앗!”

억지로 일어서 보려다가 발목의 상처를 자극하는 바람에 여인은 비명을 내뱉으며 도로 자리에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단유는 여자의 발목을 흘낏 바라본 후 대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