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06화 (806/956)

Drop off(10)

-------------- 806/952 --------------

그러나 매니저는 단유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지간히 자신이 처량해 보였던가 싶기도 하고, 오죽하면 자신보다 어린 친구가 자신을 위로하려 저리 말해줄까 싶기도 하고, 그런가하면 그리 어린 나이도 아닌 데다 유진과 같은 학교 동창인데 설마 투자가 뭔지 몰라서 저런 말을 내뱉는 건 아닐 테니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들고, 아무튼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머릿속에서 민들레 홀씨 흩날리듯 둥둥 떠다니니 제대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음만 받아둘게요. 조금 위로가 되네요.”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위로···하기 위한 마음이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보다는 좀 더 계산적인 이유에서 한 말이니 진심으로 받아주셨으면 하네요.”

“진심···입니까?”

“네.”

“왜요?”

“왜 제안을 했냐는 물음이라면, 조금은 개인적인 이유라고 대답해야겠네요.”

단유는 진심으로 투자를 고려하고 있었다. 단순히 매니저를 돕거나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친구인 유진을 돕겠다는, 명랑 만화같은 이야기도 아니었고.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투자’라는 행위가 가지는 목표에 있었다. 투자를 하는 이유는 당연히 수익을 얻기 위함이다. 비록 지금까지 단유가 만든 프로그램이 훌륭한 성과를 거두고는 있다지만, 최근 수익률의 성장세가 둔화되는 면이 있어, 택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유를 살폈더니 시장 전체에 퍼져 있는 경기(景氣) 불황의 문제 때문이었다.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경제 침체는 단순히 프로그램만으로 극복하기 힘든 점이 있었고, 더군다나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몇몇 이슈들이 불황을 가속화시키는 마당이라 지금껏 고수해온 투자 방식의 변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수익성이 좋다고 장담하는 매니저의 말을 힌트로 투자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는 단유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투자를 하겠노라 완전히 결정하기 전에 좀 더 면밀히 검토해서 투자를 진행하겠지만, 확실히 투자처로서 긍정적인 면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거기다 이제껏 직간접적으로 연예계와 관계를 맺어왔던 터라 전혀 무지한 분야만은 아니라는 것도 투자를 고려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그 외 부가적으로 꾀하는 목표가 있다면, 역시 자신에게 돈지랄이나 하고 아랫사람에게 손찌검과 폭언을 일삼는 대표라는 작자의 행태를 유사 돈지랄(?)로 벌 줄 수 있다면 어쩐지 기분이 통쾌하지 않을까, 라는 기대도 있었다.

말없이 생각에 잠긴 듯 먼 곳을 응시하는 단유의 옆모습을 본 대훈은 꽁초를 땅에 비빈 후 일어섰다. 단유의 시선이 대훈을 따라 올라가자 대훈이 말했다.

“어쨌든 덕분에 마음이 좀 편해졌네요. 유진이 단유 씨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네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하하, 뭐 본인은 모를 수 있죠.”

단유와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어쩐지 조금 더 진심을 다해 이야기를 나눈다는 느낌?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평범한 대화와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대화가 흐르기도 하지만, 부담스럽거나 당황스럽기보다는 신선하고 유쾌한 느낌?

“다음에 또 이야기 나눴으면 좋겠네요. 나중에 같이 술 한잔 할까요?”

“상관없습니다.”

“그래요. 다음에 또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죠.”

엉덩이를 툭툭 털며 ‘촬영이 끝났으려나’ 중얼거리는 대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유는 택윤에게 돌아가 조금 전 생각했던 ‘투자’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 나눠보기로 마음먹었다.

****

“죄송합니다.”

지구대장이 어린 단유를 향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어떤 식으로 정보가 유출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불쾌했던 경험이었습니다.”

“아랫사람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제 책임이 큽니다.”

단유와 함께 자리한 변호사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저희 의뢰인의 말대로라면 더 큰 범죄가 될 수도 있는 일인데, 설마 조사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실 생각은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이 일은 상부에도 보고해서 제대로 수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구대장의 말이 끝나고 회의실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지구대장과 일을 더 크게 벌이고 싶어하지 않는 의뢰인의 요구에 변호사도 선을 넘을 수 없었던 탓이다. 마음 같아서는 언론에도 알리고, 배상 청구도 하면서 실적을 쌓고 싶지만 말이다.

“그 아주머니는 어떻습니까?”

조용히 있던 단유가 지구대장에게 물었다.

“듣기로는 큰 수술을 받았다고 하던데.”

“큰 수술은 아니고, 팔과 다리에 금이 가서 깁스를 했다고 합니다. 사고에 비하면 경미한 부상이었다고, 그래서 의사가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던데요.”

“그럼 그 운전자에 대해서도 법적인 제재가 들어가겠군요?”

“물론입니다. 이미 증거 자료는 모두 확보했고, 아, 그때 말씀 주셨던 CCTV 증거도 저희가 확인을 했습니다. 수사가 아직 진행 중인 건이라 더 자세하게는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이쪽 분께서 증언하신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잘 됐네요, 그럼.”

“네. 그리고 그와 관련돼서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원래는 나중에 연락드리려 했던 내용입니다만, 이왕 오셨으니 말씀드리자면, 선생님께서 직접 보험사기를 치려던 두 사람을 제압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에 대해 저희 서에서 선생님께 용감한 시민상을 드려야 한다는 의견이 내부에서 나왔습니다.”

“괜찮습니다.”

단유는 거절했다.

“널리 알리고 싶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약 대표의 일이 없었다면 조금 고민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시민상 따위 받고 싶지도 않았고, 요란스러운 요식 행위에 들러리를 서고 싶지도 않았다.

단유는 변호사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덩달아 변호사와 지구대장도 일어났다. 하루하루 평안하게 살자, 는 게 소원인 지구대장은 숱이 적은 흰 머리를 쓸며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수고하세요.”

“저기···.”

“모든 일이 순리대로 처리되길 바랄 뿐입니다.”

단유는 그렇게만 말을 남기고 지구대를 빠져나왔다.

****

생각난 김에 처리하자는 생각으로 단유는 평소와 다르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택윤을 만나고 엔터 쪽 투자에 전문가라 하는 이들과 따로 미팅을 잡고, 미래 전망에 대한 분석도 들었다.

“직접 운영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네. 전 그냥 투자만 하고 싶어요.”

택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단유씨라면 어쩐지 기대가 됩니다. 제가 본 중 가장 뛰어난 투자자 중 한 분이셨으니까. 다만 지금까지는 금융 쪽에 치우쳐 성과를 보이셨기에 전혀 다른 분야로 진출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우려와 기대가 있어요.”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젊으니까?”

“다시 벌면 되죠.”

“그렇네요. 단유 씨라면. 그럼 저도 안심하고 있어도 되겠죠?”

단유는 옅은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며칠 뒤, 변호사를 통해 단유는 대표의 아내라는 이가 불구속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을 상대로 수사가 웬 말이냐며 강하게 항변했다는데 수사 진행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는 후문도 들려주었다.

보험사기를 치려 했던 2명에 대해서는 빠르게 수사가 마무리되어 재판에 넘겨졌는데, 한 가지 쟁점이 되는 것은 도망치려다 쓰러져 허우적대던 일당의 증언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누군가가 자신을 밀어 쓰러뜨린 후 일어나지 못하게 위에서 짓누르더란 증언을 일관되게 했는데, 이게 피의자의 정신 상태를 의심케 하더란 이야기였다.

“국선 변호사는 이 증언과, 당시 CCTV 증거 영상에서 피의자가 보여준 행동을 토대로 정신 이상을 주장한다더군요.”

“그게 범죄 사실을 증명하는 데 어떤 문제가 있나요?”

“요약하면, 정신이 온전치 않은 피의자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던 탓에 위법적인 행위에 가담하게 되었다는 뭐 그런 이야깁니다. 형사소송법상 책임능력이 존재하냐 하지 않느냐의 유무는 꽤 중요한 문제니까요.”

단유는 괜한 능력의 사용으로 붙잡혀야 할 사람을 풀어 주게 만든 건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증거로 내세웠던 영상 자료들이 오히려 피의자의 증언에 힘을 실어주는 판국이니. 초현실적인 힘에 강제된 녀석의 행동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의 눈에 이상하게 비치는 것은 당연했는데, 이를 미리 짐작하지 못한 단유의 실수였다. 차라리 쓰러지면서 와중에 기절이라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해당 사건을 담당한 검사가 골머리를 앓더군요. 사실 그 친구가 제 연수원 동긴데, 쉽게 넘어갈 것 같았던 사건이 꼬였다며 하소연을 하더군요. 만약 의뢰인과 관련된 일이 아니었다면, 실컷 비웃어주었을 표정을 짓더라고요. 그게 조금 아쉽네요. 그럴 수 없었다는 게.”

****

“이게 뭐야?”

“사직서입니다.”

“사직서?”

“네.”

“······.”

심사가 꼬일 대로 꼬인 대표의 고약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대훈은 울컥 치솟는 감정을 느꼈다.

“마지막이니까, 한 마디만 할게요. 인생 그 따위로 살지 마쇼. 이 바닥에서 인성 드럽기로 소문난 거 알고나 있소? 내가 그래도 일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더럽고 치사해도 꾹 참았지만, 댁이랑 같이 일하고 싶다는 이들 별로 없을 것이오. 우리 회사 재계약율이 왜 떨어지는 줄 아슈? 당신은 맨날 매니저들이 관리를 못해서라고 했지? 아니요. 댁 때문이요. 댁의 그 개 같은 성격에 진절머리가 나서 다들 떠나는 거요. 개도 당신보단 나을 거요. 내가 진짜 할 말이 많은데 그나마 지난 정이 있어 이렇게 충고하는 거요. 그러니 새겨들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조만간 깡통 차고 길바닥에 나앉게 될 테니까.”

라고 퍼붓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충동에 따르는 대신, 대훈은 얌전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속으로 생각한 것처럼, 광식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지만, 그 전까지는 이를 드러내선 안 되는 일이었다. 크지 않은 회사라도 광식이라는 사람이 쌓은 경력과 인맥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 이 바닥에서 계속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주칠 때도 있을 것이고 그의 영향권 내에서 함께 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멀리 보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했다가 피보는 경우를 숱하게 보았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하니 잡아봐야 소용없겠네.”

“현우한테 인수인계시켜 놨으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뒷말이 나오지 않게, 깔끔하게 떠나는 것이다.

“수고했다.”

대표의 작별 인사는 그게 끝이었다. 그 이상은 대훈도 바라지 않았으니, 그 길로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대훈은 늙어서 신음을 앓는 차를 몰아 서울 외곽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 시작이군요.”

대훈은 새로 장만한 책상과 책상 위에 올려진 명패를 쓰다듬으며 읊조리듯 말했다.

“매니저, 아니 대표님, 소감 한 말씀 해주시죠.”

책상 건너 소파에 앉아 있던 단유의 말에 대훈이 입술을 길게 늘렸다.

“소감이랄 게 있습니까? 시작이니까, 그저 열심히 하는 수밖에요. 특히 저를 믿고 조건 없이 투자해준 단유 씨를 위해서라도.”

“조건이 없진 않습니다.”

향후 5년간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거나, 위법적 혹은 도의적이지 못한 행위가 발견될 시 대표직을 사임해야 한다는 조건이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지만, 그런 건 다른 회사의 투자 계약서 조항들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엔젤’이라 불러 마땅한 투자자였다.

“국내 최대의 기획사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내 최고의 기획사란 소리는 들을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최고도 바라지 않아요. 그저 실망하지 않는 수준이면 됩니다.”

비록 투자를 결정하고 오늘에 이르렀지만, 당장 이 투자로 큰 돈을 벌겠다는 욕심은 내지 않기로 한 단유였다.

“대표님에게나, 저에게나 이번 사업은 공부가 될 테니까요.”

무덤덤한 표정의 단유에 비해 대훈은 조금 부담스럽다고 느낄 정도의 눈빛을 쏘아내고 있었다.

“단유 씨가 얼마나 큰 재력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겐 그렇게 가벼이 생각할 사안이 못 됩니다. 정말 사활을 걸고, 최선을 다해 성공해야만 하는 일이죠. 한 번 실패하면 두 번다시 재기하지 못한다는 각오로.”

“제가 아닌, 다른 투자자였다면 꽤 기뻐할 만한 각오네요.”

단유는 그저 오래오래 유지되기만 해도 좋을 일이었다. 많은 욕심 내지 않고, 그저 노후가 보장되는 수준이면 만족스럽지 않을까? 소박한(?) 단유의 바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