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op off(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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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식과 유진이 눈싸움을 벌이는 사이, 겨우 호흡을 가다듬은 매니저, 대훈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얼른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비록 자신은 광식이 운영하는 회사에 소속된 직원이지만, 매니저란 직업은 다른 누구보다 담당 연기자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우선으로 신경 써야 할 연기자가 당장 곤란한 처지에 있다고 판단하니 절로 몸이 움직였다.
엉망이 된 차림새를 정돈할 새 없이 허리를 꾸벅 숙여 사과의 말을 던짐으로써 대표의 시선을 연기자에게서 자기에게로 뺏을 수 있었다.
“제가 부족해 벌어진 일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말로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스스로 회사를 나가겠습니다.”
“오빠!”
“넌 가만히 있어. 대표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 허리를 숙여 사과하는 매니저의 모습에 광식도 흥분을 조금 가라앉힐 수 있었다.
“너, 계속 지켜본다. 알지?”
“네.”
광식은 다시 유진을 한 번 쳐다본 후, 곧바로 몸을 돌렸다.
대표가 완전히 사라진 뒤, 유진은 미간을 한껏 좁힌 채로 대훈에게 다가갔다.
“아니 오빠가 왜 사과를 해! 바보야? 등신이야?”
화를 내는 와중에도 그녀의 손은 대훈의 구겨지고 먼지투성이가 된 옷을 탁탁 털고 있었다.
“너 지금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 촬영 끝났어?”
“지금 촬영이 문제야?”
대훈은 유진의 손을 쳐내며 대꾸했다.
“연기자는 촬영만 신경 쓰면 돼. 만약 네가 촬영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내 잘못이 되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릴 해.”
“내가 부탁해야 들어갈 거야?”
유진을 향해 강한 눈빛을 쏘아내는 매니저가 한심하고 답답하단 생각이 들었다. 왜 지금의 눈빛을 대표에게 보여주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었다.
“······.”
“경원아, 넌 뭘 하고 서 있어? 빨리 유진이 데리고 들어가.”
뒤에서 한참 눈치를 보던 경원은 움찔거리며 머뭇대다가 조심스럽게 유진을 붙잡았다.
“들어가자.”
“······.”
“촬영 곧 시작한대.”
품에서 구겨진 담배를 꺼내던 대훈이 힐끗 유진을 바라본 뒤 입에 담배를 물었다.
“들어가. 이거만 피고 나도 들어갈게.”
“······.”
“너 프로야.”
유진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떼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담배 연기 속에 깊은 한숨을 함께 뱉어 허공으로 뿌린 대훈은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넘기며 하늘을 보았다.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을 보며 그게 자신의 미래가 아닐까 싶은 청승맞은 생각도 들었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흠칫 놀란 대훈이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 단유가 서 있었다.
“아, 단유 씨.”
단유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훈은 문득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보일까 걱정되었다. 부랴부랴 옷을 정리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물었다.
“일은 다 보신 거예요?”
“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괜히 민망해진 대훈이 볼을 긁적이려는데 대표에게 맞아 볼이 빨갛게 부풀었을 거란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어쨌든 다 큰 성인이고, 단유보다 어른인데 누군가에게 맞아서 엉망인 모습을 제3자에게 보인다는 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저기···.”
“매니저님.”
“어, 네?”
“때로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참을 필요가 있습니다.”
대훈은 분명 자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거 참. 쪽팔리네요.”
애써 넉살을 떨어보지만 단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희생, 혹은 헌신이라고 부르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희생과 헌신이 어떤 목적을 위함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그 목적에 부합되지 않은 희생과 헌신은 어쩌면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어···유진이 보러 온 거예요?”
“가끔 영화 같은 데서 나오는 숭고한 희생이라는 거 있죠? 가족을 위해서, 전우를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 하지만 과연 그런 명분으로 참아야 하는 것들이 과연 진정한 희생이며 헌신이 될까요? 매니저님의 상황을 잘 모르는 제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건방져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매니저님. 조금 전 매니저님이 참아야 했던 것은 희생이 아니라 슬픔이었던 것처럼 보였어요. 매니저님의 슬픔이면서 동시에 주위 사람들의 슬픔이요.”
남편이 맞고 다닌다는 걸 알게 되면 곧 아내의 슬픔이 될 것이며, 자신의 매니저가 누군가에게 맞는데도 하소연할 수 없다면 그가 지키려 했던 연기자 역시 슬플 것이다. 대표가 폭력이라는 몰상식한 행위를 저지름에도 이를 묵인하고 굴복했다면, 또 다른 매니저들에게도 그런 행동과 관습이 전가될 수 있으니 또한 슬픔이다.
“사람들이 가끔 ‘현실’을 들먹이며 타협하려 하지만, 그건 융통성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외면이죠.”
단유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받고 보니 휴대용 물티슈였다.
“울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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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피세요?”
“아뇨.”
“그러시구나.”
“피우셔도 됩니다.”
“네, 그럼.”
후우. 용트림하듯 앞으로 길게 뻗는 담배 연기. 아마도 아까 저도 모르게 흘렀던 눈물은 저 연기가 매워서였으리라. 담배를 배운 이후로 한 번도 담배 연기 때문에 운 적은 없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단유이니 그렇게 변명하면 먹히지 않을까, 라는 멍청한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가 거품 꺼지듯 사라졌다.
“단유씨도 제가 한심해 보였나요?”
단유는 나란히 앉은 대훈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대꾸했다.
“말 편하게 하세요.”
다시 한번 담배를 길게 빨아들였더니 입안 가득 구수한 맛이 차올랐다. 대훈은 입술을 오므리고 바닥으로 긴 연기를 뿜어냈다. 하얀색 유명 메이커의 운동화에 부딪힌 연기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메이커면 뭘하나. 너무 오래 신은 데다 세탁한 지 오래되어서 메이커의 의미가 무색해질 지경에 다다른 신발인데.
“나중에, 좀 더 친해지면요.”
대훈의 대답에 단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훈의 감정이 마저 정리될 때까지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겠다는 것인지, 단유의 눈은 여전히 큰 길가를 향하고 있었다. 혹은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것일까?
“이 바닥이 이래요. 아니 우리 회사만 그런가? 모르겠네. 아무튼, 그래요. 단유 씨가 말한 희생, 헌신 그런 거 아니고 그저 목숨줄 붙잡고 살아보겠다는 발버둥이죠. 욕하고 모욕당하는 거, 사실 흔해요. 그런 말 있죠? 고객 센터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감정노동자라고들 하잖아요?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쩌면 저희가 더 심할지도 몰라요. 몸 힘든 건 둘째고, 사실 감정 소모가 꽤나 심하죠. 말이 좋아 매니저지, 어떤 사람은 거의 종노릇을 한다고 해요. 담당 연예인의 자질구레한 심부름은 일상다반사고, 방송국, 광고주, 영화사 등 소위 ‘갑’으로 통칭되는 이들과 만나면 매니저란 족속들은 그저 허리를 숙이며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하거든요. 그런 와중에 또 회사라는 조직에 소속된 직원이다 보니 온갖 상사들을 머리 위에 두어야 하고, 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후배들을 경계해야 하죠. 오늘 같은 일, 어찌 보면 별일 아닐 수도 있어요. 이런 말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어떤 사람은 골프채로 맞은 적도 있다고 하니까. 그래도 난 고작 뺨 몇 대 맞은 것 뿐이잖아요.”
“남들 다 겪는 일인데 유난 떨지 말란 말처럼 들리네요.”
“그게 사실이죠. 다 참는데 나라고 못 참을 게 뭐 있겠는가, 라는 생각. 그리고 그걸 버텨야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 이 바닥에서 성공하는 길은 버티는 것이란 선배들의 격언이 있어요. 제가 5, 6년 일해보니까 그게 맞아요. 지금 무슨 무슨 엔터, 무슨 무슨 대표라고 하는 이들, 대부분 저처럼 말단 로드부터 시작해서 올라간 사람들이에요. 버티고 버티면 그게 경력이 되고, 실력이 되고, 명함이 돼요. 그 명함을 들고 투자자에게 내밀면, 투자자들로부터 인정받아 투자를 받게 되고, 투자받아 회사를 차리면 그때부터 대표입네 할 수 있는 거죠. 그런 거예요. 그 길을 보고 가는 거예요. 바로 그런 점에서 이 바닥이 실력 위주라는 말이 나오는 거고, 전 그 실력을 기르는 과정에 있는 거죠. 맞는 거? 길게 보면 나쁠 일도 아니에요. 어쩌면 나중에 그런 이야기를 듣겠죠. 네가 그 사람 밑에서 로드를 했었다고? 그 사람 성격 알아주는데 잘 버텼구나. 쉽게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겠군. 옛다, 내가 투자하마. 그거 보고 투자한다. 그럼 전 아이고,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허리 디스크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허리를 숙이겠죠. 그런 겁니다.”
슬쩍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하얀 연기가 스며든 허탈함이 배어 나온다. 대훈도 알고 있었다. 방금 스스로가 말한 이야기가 꿈 같은 이야기라는 것을. 이 바닥에서 그런 정석 트리를 타고 올라간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 그리고 운 좋게 오르더라도 이후 성공을 거머쥐는 이는 또 많지 않다는 것을. 수십 개의 회사가 간판을 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엔터 시장에서 사옥 하나 없이 방송국을 전전하는 소규모 기획사도 많았다. 그런 기획사 사장도 사장일까?
‘그런 사장이라도 되고 싶다.’
“투자는 어떻게 받나요?”
“투자요? 보통은 지분 관계를 설정하고, 법적 분쟁 요소를 피하기 위해 변호사를 대동하···.”
“아뇨. 만약 매니저 님이 회사를 차리기 위해 투자를 받으려고 할 때, 어떻게 투자를 받냐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투자자들을 어떻게 찾아가서 어떻게 설득하냐는 거죠. 투자자들이 많나요?”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또 적지도 않아요. 어쨌든 요즘 대세는 엔터 쪽이니까요. 소규모 투자로 시작해서 세계 시장을 노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장이니까요. 가성비가 좋은 사업이죠. 특히 한국의 엔터 산업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음이 몇 해 전부터 증명되고 있다보니 이쪽으로 투자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편이에요. 뭐, 투자금의 회수율을 따지면 그리 낙관적이진 않지만 말이죠.”
“많이 공부하셨나 보네요.”
“공부해야 돼요. 안 그럼 평생 로드, 실장, 잘 해봐야 팀장 정도로 끝나니까. 부장, 이사, 대표로 진급하려면 공부 많이 해야 돼요. 인맥도 많이 쌓아놔야 하고. 그거 알아요? 지금 이것도 나름 인맥 쌓는 거예요.”
“제가 매니저님께서 신경 쓰실 정도가 되나요?”
“그럼요. 그거 알아요? 예전에 유진이 단유씨를 우리 회사에 데려오고 싶어 했는데.”
“들은 적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된 거네요. 우리 대표님, 솔직히 말하면 그리 좋은 대표감은 아니거든요. ···아닌가? 내가 좀 전에 맞아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닌데, 사람 인성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에요. 아닌데, 신기하게 능력이 좋아. 그래서 이 회사가 안 망하고 계속 유지되는 거예요. 특히 우리 대표님, 보는 눈이 좋고 씀씀이가 커요. 사치를 부린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회사 직원들 및 연예인한테 아낌없이 지원을 하는 편이거든요. 그런 것도 배워야 돼. 사람이 평소에 그렇게 쓰고 베푸니까, 내가 오늘 같은 꼴을 당하고도 참을 생각을 하는 거겠지요.”
“매니저 님은 되게 긍정적이네요.”
“긍정적이어야만 하니까요. 그래야 이 치열한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아마 저의 가장 큰 장점이자 특기가 아닐까 싶네요. 어,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마치 면접 보는 거 같네.”
“달변이시네요.”
“달변은 무슨. 그냥 이런저런 경험을 쌓다보니 포장하는 기술이 늘어서 그래요.”
“제가 투자해도 될까요?”
“투자요?”
“실은 제 자산을 관리해주는 자산 관리사께서 요즘 수익률이 좋지 않다며 다른 투자처를 찾아보자고 건의를 하시더라고요. 마침 매니저 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쪽 방면으로 투자를 하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한두 푼 들어가는 사업이 아니라 힘들 거예요. 게다가 사업 시작 후 첫 해 혹은 둘째 해까지 적자만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하거든요. 돈이 너무 많아서 전혀 아깝지 않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그런데 단유 씨, 투자라는 걸 할 정도로 돈을 많이 모으셨어요? 이야, 부럽네요.”
“운이 좋았던 거예요.”
“운도 실력이라잖아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 님의 말씀이 맞는 거 같아요. 솔직히 제가 실력이 좀 좋거든요.”
농담이라 생각한 대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저런 농담을 여유롭게 할 수 있을 정도라니.
“진짜 투자를 하실지 안 하실지 모르겠지만, 왜 저한테 투자를 하고 싶다는 거죠?”
“본인이 말씀하셨잖아요? 본인 정도면 투자받을 만하다고 말입니다.”
“그거야 제가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어죠. 만약 투자자라면 단지 몇 마디 말만 가지고 결정하진 않거든요.”
“저도 섣불리 제안하는 게 아닙니다.”
단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