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03화 (803/956)

Drop off(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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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상대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유진이 촬영하기로 한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저기 앞에서 세워주시겠어요? 전 여기 내려서 갈게요.”

매니저는 길가에 차를 잠시 세웠고, 단유는 유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 보고 별일 없으면 놀러 와. 저기 저 스튜디오니까.”

단유는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차에서 내렸다. 한 블록도 안 가서 차는 오른쪽을 꺾어 스튜디오 주차장으로 들어갔고,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단유는 바로 앞 건물 2층에 위치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전면이 통유리로 된 2층 커피숍에는 잔잔한 올드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실내디자인은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라 분위기가 꽤 좋았지만, 어쩐지 실내에 손님들은 많지 않았다. 어쩌면 평일 낮이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고 잠시 생각하며 단유는 주위를 살폈다.

전화를 걸었는데, 얼마 안 있어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도착하셨습니까? 곧 가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단유는 가볍게 대답한 후 창가 쪽 빈 테이블에 앉았다. 2차선 도로 위에는 마침 신호에 걸려 멈춰 서 있는 차량 몇 대가 전부였고, 인도 위 통행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커피숍이 한적한 이유는 아마도 이 주위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탓이 아닐까 싶었다. 나름 유명한 일산이라 북적거릴 줄 알았는데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싶은 생각을 하며 실내로 시선을 돌렸다.

넓은 카페에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딱히 열을 맞췄다기 보다는 분위기에 맞게 공간을 만들어낸 느낌이었다. 때문에 테이블이 그리 많았고 그 와중에 손님도 겨우 세 테이블에 불과했다. 한 테이블에는 스카프를 한 중년 여성과 정장을 입을 남성이 서류를 가운데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또 그 옆에는 화려하게 차려 입은 30대 혹은 40대 초반 정도의 여성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다른 한 테이블은 단유의 뒤쪽에 있었는데, 카페에 들어올 때 잠깐 스치듯 본 바로는 그들 역시 여성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카운터 너머에서는 무심한 표정의 젊은 여성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는데, 가끔 단유를 향해 시선을 던지는 모양새가 마치 주문 안 하냐고 묻는 듯 했다.

나른한 인상의 주인과 올드팝, 그리고 중년 나이대의 손님들이 어우러져 만든 커피숍의 분위기가 단유는 썩 나쁘지 않았다. 사실 예영이 운영하는 카페는 번화가 가운데에 있던 탓에 손님도 많은 데다, 주 고객층이 젊은 편이라 나오는 음악들도 거의 최신의 곡들 위주였다. 때문에 비록 그곳을 자주 방문하기는 해도 그 번잡한듯한 분위기가 단유의 취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사람도 많지 않은 한적한 분위기가―장사를 하는 주인의 주머니 사정이야 좋지 않겠지만―단유는 더 마음에 들었다.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 단유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좋은 점이었다.

****

“왜 이렇게 늦었어!”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차가 좀 막혀서···.”

“됐고. 유진이 넌 가서 감독님한테 인사부터 하고. 경원이 너도 서둘러!”

유진은 말없이 대표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스튜디오 안으로 빠르게 사라졌고, 그 뒤를 스타일리스트가 무거운 화장용 박스를 들고 뒤쫓았다. 그리고 주차장에 남은 매니저는 대표에게 더 긴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평소에도 까칠한 대표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잔소리가 길었다. 제대로 잘못을 꼬집어 반성해야 할 문제라도 있다면 모를까, 약속 시간에 늦은 것도 아니고 단지 대표보다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잡도리를 당해야 한다는 게 억울할 뿐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대표고, 자신은 일개 로드 매니저에 불과한데.

솔직히 따지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몇 달 전, 분명히 본인 입으로 자신을 공석인 팀장 자리에 올려 주겠노라 해놓고선, 며칠 지나지 않아 다른 회사에서 스카웃한 경력자를 팀장으로 앉혔다. 거기에 대해서는 솔직히 억울한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신보다 경력이 긴 인물이었기에 수긍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팀장으로 앉히겠노라고 약속까지 했다면 적어도 그에 준하는 대우는 해줄 수 있지 않은가? 마치 신입 로드를 대하듯 이렇게 주차장에서, 그것도 담당 연기자와 스타일리스트가 있던 자리에서 핑계거리도 되지 않을 트집을 잡고 막말을 들어야 했다는 게 너무 창피하고 억울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항변이 아니라 사과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단줄 알아? 어떻게 매번 잘못하면서 고칠 줄을 몰라? 응?”

꾹 다문 입술 안쪽, 꽉 깨문 이를 뚫고 대표의 눈이 둥그래질 정도로 과격한 욕을 퍼붓고 싶다는 욕망을 있는 힘을 다해 참아낸 매니저는, 대신 허리 뒤에 감춰진 주먹을 그저 불끈 쥐어보며 대표가 떠나길 기다렸다.

정신머리가 어쩌니, 게으른 천성이 어쩌니 하며 직업적 회의감이 머리 끝까지 차올라 폭발하기 바로 직전에 대표의 설교가 끝이 났다.

“앞으로 잘하란 말이야. 알았어?”

매니저는 직감적으로 대표가 다른 곳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자기에게 푸는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알면 어쩌겠나. 그는 고용주가 자신은 고용인에 불과한 것을.

“난 잠깐 볼일이 있으니까, 유진이 뒤 좀 봐주고 있어. 알았지?”

“알겠습니다.”

주차장 바깥으로 사라져가는 대표의 뒷모습을 보며 침을 한껏 모으다가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 매니저는 바닥에 힘껏 뱉었다. 심호흡 몇 번으로 진정되진 않지만, 그래도 이 바닥에서 구른 지 언 5년. 충분히 프로로서의 자각은 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인사 늦어서 죄송합니다. 네, 유진이 매니저 나승원이라고 합니다. 유진이 금방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네, 네.”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감독과, 그 외 다른 스태프들에게 빠르게 인사를 건넨 매니저는 유진이 기다리고 있을 대기실로 향했다.

“준비 다 됐어? 그럼 나가자.”

***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나요? 일이 많아서요.”

커피숍에 들어온 사내는 홀로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단유를 발견하고 곧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젊으신 분이셨군요. 제가 나이는 듣지 못해서.”

만약 사내가 단유의 나이까지 미리 듣고 온 것이라면, 더더욱 기분이 나빴을 테다. 굳이 숨겨야 할 내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경찰이 나서서 밝힐 개인정보는 아니었으니까. 이 만남이 끝나는 대로 해당 지구대에 연락해서 사정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단유는 사내와의 악수를 마쳤다.

앞을 닫고 있던 버튼을 풀며 편안히 자리에 앉는 사내는 중후한 이미지긴 하지만 눈빛이 그리 온화하진 않았다. 오히려 사나운 들개가 저런 눈빛이지 않을까 싶었다.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며 단유의 위아래를 훑어 내려가는 눈빛이 불쾌감을 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슨 일이십니까?”

“아, 거 들으니까 좋은 일 하셨다고요.”

“좋은 일이요?”

“아까도 말했지만 어제 사고를 당한 이가 내 안 사람···. 근데 말이요.”

“네?”

“나이가 어떻게 되시지?”

“27살입니다.”

“그래요? 많이 어리네. 젊은 사람이 참 큰일을 했어. 고마워요.”

“···아닙니다.”

“안사람이 그 사고 때문에 큰 수술을 받았어.”

“아까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는데, 그렇지 않은가? 교통사곤데. 많이 힘들지.”

“쾌차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고맙네. 그런데 말이야.”

“네.”

“듣기로 안사람한테 불량배들이 붙어서 보험사기를 치려고 했다며?”

“네.”

“그걸 자네가 보고 말려주었고.”

“네.”

“그래, 하마터면 큰일이 날뻔했지. ···그래서 말인데, 아, 뭐 좀 마시겠나?”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려니 내가 다 민망해서 그래. 그래도 내가 초청한 손님인데, 대접은 해야지. 뭐로 마시겠나?”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시원한 거 괜찮지?”

“···네.”

“그래, 아가씨? 여기.”

카운터 너머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자가 핸드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다가왔다. 사내는 ‘아이스 커피 2잔’이라고 간단하게 주문을 말한 뒤, 다시 단유에게로 시선을 옮겨 화제를 상기시켰다.

“그래서···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그래. 우리 와이프가 보험사기를 당할 뻔 했고, 그걸 자네가 목격하고 구하려 했던 거잖나? 그치?”

“네.”

단유의 가벼운 수긍에 사내는 번들거리는 눈을 들이대며 요청했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그 사실을 증언해줄 수 있겠나?”

“이미 경찰 진술서에 진술했습니다.”

“그렇지. 진술했지. 그런데 좀 더 구체적인 진술이 필요해서 말이야.”

단유는 사내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구체적인 진술이요?”

“그러니까, 그 못된 놈들이 우리 와이프한테 보험사기를 치려고 다가와서 겁을 잔뜩 주고 해코지를 하려 했잖나?”

굳이 기억을 헤집지 않아도 어젯밤 있었던 일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던 단유였기에 사내의 말에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해코지요?”

“그래! 그래서 우리 와이프가 겁을 잔뜩 먹었단 말이지. 그래서 부득이하게 도망갈 수밖에 없었단 말이지. 정당방위로 말이야. 그런데 밤중에 덩치가 산만한 녀석들이 달려들었으니 정신이 어디로 제대로였겠는가? 가녀린 여자몸인데 너무 무서워서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가 어려웠던게지. 때문에 사고가 난 거지.”

단유는 사내가 ‘스토리’를 원하는 것임을 알아챘다. 스토리 작가는 사내 본인인지 모르겠지만, 구성이 참 얄팍하고 억지스러운 스토리였다.

“그렇게 급하게 달아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아주머니께 사기를 치려 했던 일당은 저한테 달려든 참이었고, 아주머니와는 거리가 조금 있었으니 그리 급하게 달아날 필요까진 없었습니다.”

“에이, 이 사람. 자네도 정신이 없어서 뭔가 착각하나 본데, 그때는 많이 위급했던 상황이었다고. 특히 힘없는 여자가 생명의 위험까지 느낄 정도로 말이네.”

“마치 거기 있었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다 들었으니 아는 거야. 아무튼 자네, 그렇게 증언 좀 해주게. 없는 이야기도 아니지 않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내뱉고, 그 외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대충 얼버무리려는 사내의 태도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왜 그런 증언이 필요하십니까?”

“그것까진 알 필요 없고. 아무튼, 좀 부탁하네.”

단유는 사내가 착각하고 있는, 혹은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사실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 그 골목을 찍고 있던 CCTV가 있었습니다. 분명 거기에 정황이 다 나올 텐데요.”

“그건 걱정말게. 그 문제는···.”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있는 사실을 왜곡하지 마시란 말씀입니다.”

“어허, 이 사람···. 말하는 본새를 보니 머리도 있는 사람 같은데. 걱정말게. 내 사례는 제대로 해줌세.”

“그런 문제가···.”

“어허. 있어 봐.”

사내는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안에서 몇 장의 하얀 수표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단유는 눈동자만 아래로 내려 그의 손바닥에 깔려 있는 돈을 확인했다. 백 만원 짜리 수표 3장.

단유의 시선을 확인했는지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그저 바른 말만 해주면 되는 거네. 자네가 바른 말을 한다고 해서 억울한 사람이 생기는 것도 아니네. 그저 나쁜 놈들이 확실히 벌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오히려 억울할 뻔 했던 이가 누명을 벗을 수 있게 되는 것일세.”

나쁜 놈들이란 보험사기단 두 사람을 말하는 것일 테고, 억울할 뻔 했다는 이는 자신의 아내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가 그렇게 감싸며 감추려하는 이유는 아마도 아내가 음주를 한 채 차를 몰았고, 그 결과로 사고를 냈다는 점일 것이다.

“음주운전이 아니었습니까?”

쉽게 넘어오지 않는 고지식한 단유의 태도가 답답한지 사내는 혀를 끌끌 차며 대답했다.

“이 사람이···. 자네, 확인되지 않은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냐.”

“수술을 받았다면, 분명 혈액검사도 했을 것이고, 그러면 혈중 알코올 농도도 검사지에 기록이 되어 있을 건데요. 경찰에서 그걸 파악하지 않았을 리 없고.”

“자네, 뭐 의사 그런 건가?”

“상식입니다.”

“흠흠. 그건 자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닐세. 됐고, 얼른 받게. 말 한마디 하고 이런 큰돈 받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나?”

“별로 크지 않을뿐더러, 그 정도에 숨겨질 사실이 아닙니다.”

단유의 대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사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웃었다.

“크지 않아? 허허, 이 사람.”

그리고는 돌연 단유의 속을 뚫어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한참 노려보더니, 그러길 잠시, 다시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자, 이 정도면 되겠는가?”

다시 꺼낸 건 수표 2장. 합해서 총 5백만 원. 마치 애들한테 과자 사 먹으라고 용돈 주는 모양새로 꺼낸 돈이 5백이었다. 확실히 범상치 않은 인물이긴 하다. 그러나.

“제가 아직 그쪽 분의 성함을 몰라 뭐라고 지칭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쪽 분의 돈은 필요 없습니다.”

단유의 호칭이 꽤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사내의 이마에 핏줄이 불긋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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