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op off(6)
-------------- 802/952 --------------
다시 만난 유진은 전날 술에 취해 불콰했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화장빨이야.”
단유는 유진의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매니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네, 단유씨는요?”
가볍게 악수를 나눈 후, 단유는 매니저의 옆자리에 동석했다.
“미리 주문해 놨어요.”
“고맙습니다. 유진아, 네가 사는 거지?”
“내가 산다니까? 여기 정말 맛있어. 아마 다음에 또 생각나서 오게 될 거야.”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유진은 매니저에게 어제 일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고생하셨겠네요, 단유씨가.”
매니저의 말에 유진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무슨 병균이야? 나 때문에 힘들게?”
그러나 매니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멋대로인 네 녀석 맞춰주려고 고생했을 게 뻔하니까 그렇지.”
“오빠, 나 때문에 힘들어?”
“그걸 말로 해야 아냐?”
“아, 그랬어? 난 몰랐지. 알았어. 회사에 말해서 오빠가 내 매니저 하느라 힘들어 한다고 말할게. 앞으로 우리 보지 말자.”
“그러시든가.”
매니저의 대꾸에 유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단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단유야, 이럴 때 어떤 협박을 해야 저 오빠가 겁을 먹을까?”
유진의 말에 매니저가 먼저 대꾸했다.
“당사자 앞에서 곤란해질 발언은 삼가자. 응? 그리고 지금처럼 네가 그렇게 행동하니까 주위 사람이 힘든 거야. 지금도 봐. 단유 씨 곤란해 하는 거 안 보여?”
“단유는 내 말 잘 들어주거든? 누구랑 다르게? 오빠 때문에 더 피곤해지는 거 같아.”
“네가 피곤한 건 숙취 때문이지, 나 때문은 아냐.”
단유는 두 사람의 만담이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제는 제가 다른 팀 매니저를 도울 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웠던 건데, 그 새를 못 참고 저렇게 사고를 칠 줄은 몰랐네요. 죄송해요, 단유씨.”
‘내가 무슨 사고를 쳤다고 그래?’ 라는 유진의 말은 가볍게 무시당했다.
“전 괜찮아요.”
“거봐. 괜찮다잖아? 친구랑 술 한잔 먹는 게 뭐 어때서 그래?”
“핑계는···. 하루는 친구 핑계로 마시고, 하루는 일 끝났다고 마시고, 하루는 일 없어서 마시고. 너, 그놈의 술 좀 줄여. 언젠가는 그 술 때문에 사달이 날 거 같아 걱정이다.”
매니저의 타박에 유진이 슬쩍 단유의 눈치를 살폈다. 단유는 애써 모른 척, 휴지를 집어 식탁 앞을 닦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알았어. 잔소리 좀 그만해. 아, 음식 왔네? 맛있겠다!”
유진은 해장국을 먹는 동안 맛있다며 연신 감탄했고, 매니저는 조신하게 좀 행동하라며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의 배려 덕에 단유는 어색함 없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배려? 혹은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너스레. 어느 쪽이든 단유로선 다행이었다. 적어도 어젯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며 불안해하던 유진의 모습보단 보기 좋았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어제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녀가 단유에게 털어놨던 고민을 듣지 않았다면 지금 단유가 보는 유진은 그저 유쾌할 뿐인 여느 때의 그녀와 다르지 않을 거란 것. 마치 TV 속에서 익살스럽게 과장된 연기를 펼치던 그녀를 보며 미소 짓던 여느 시청자들처럼 그녀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가끔 일방적으로 친한 척 하는 특이한 친구라는 기억을 가진 채로 말이다.
어쩌면 어제의 만남이 그녀를 친구라는 카테고리 속에서, 이전보다 특별한 의미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든 계기가 아닐까 싶었다.
“여보세요?”
식사 중에 걸려온 전화의 발신처를 확인한 매니저는 다급히 핸드폰 액정을 쓸어 넘겼다. 그의 입술 주위에 묻은 국물 자국을 보며 단유는 휴지 한 장을 뽑아 건넸으나, 그는 휴지를 받고서도 입술을 닦을 생각을 못하는 듯 보였다.
“네, 식사 중입니다. 네, 네. 일산에 스케줄이 있어서 식사 끝내고 바로 갈 겁니다. 네. 아뇨, 늦지 않게 주의하겠습니다. 네, 네, 죄송합니다.”
스피커로 전환한 것도 아닌데 핸드폰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을 굽힌 채로 전화를 받는 매니저의 모습에 유진도 신경이 쓰인 탓인지 식사를 못 하고 있었다. 단유가 보니, 유진은 통화의 상대가 누군지 아는 것처럼 보였다.
매니저가 숟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일어서려 하자 유진이 물었다.
“대표님이에요?”
“응.”
“또 뭐래요?”
“뭐라긴. 너 스케줄 늦지 않게 조심하란 소리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매니저였지만, 사정을 모르는 단유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나 먼저 나가서 시동 걸어 놓을 테니까, 먹고 나와.”
“다 안 먹었잖아요, 오빠. 마저 먹고 같이 나가요.”
“아냐, 괜찮아. 배불러. 계산해 놓을 테니까 서두르지 말고, 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어. 알겠지? 단유 씨도 식사 마저 하고 나오세요.”
매니저가 나간 뒤.
“하아.”
유진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다 단유와 눈이 마주쳤는데, 뭔가 할 말이 많은 눈치였다. 하지만 입술이 쉽게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유진은 매니저가 식당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물어볼 것인가, 말 것인가. 선을 넘은 간섭이 될 것인가, 친구로서 도의적인 참견이 될 것인가. 단유는 어떤 선택이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짧은 시간 고민을 하다가 결정했다.
“무슨 일인데.”
“응? 일은 무슨. 들었잖아. 스케줄 때문이라는 거.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먹어.”
“한 사람은 식사를 채 마치지 못한 채로 자리를 뜨고, 또 한 사람은 불편한 얼굴로 수저를 내려놓았는데, 신경을 안 쓸 수가 있나.”
“미안해.”
“아냐. 너야말로 식사 마치도록 해. 앞으로 또 몇 시간 쉴 틈 없이 일해야 될 텐데 배라도 든든히 채워야지.”
“아냐. 지금이 딱 좋아. 어차피 조금만 먹으려고 그랬어. 촬영 있는데 살이 너무 쪄 보이면 안 좋잖아?”
“촬영 있다는 애가 술은 왜 마셔?”
“선배가 알려준 팁이야. 촬영 전날 술 한잔하면 다음 날 약간 마른듯한 인상이 된다고 말이야. 혈색도 좋아지고. 어때? 괜찮지 않아?”
“모르겠네, 난.”
“나중에 모니터로 보면 꽤 괜찮게 나올 거야. 걱정 마.”
끝내 식사는 거기서 마무리되었다. 하긴 매니저가 밖에서 시동 걸고 기다리는데 유진도 마음 편히 먹진 못할 것이다.
왜 벌써 나왔냐는 매니저의 물음에 ‘오빠 심심할까 봐’라는 유치한 답으로 대꾸한 유진은 단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집에 갈 거야?”
“그래야지. 딱히 할 일도 없고.”
“넌 일 안 해?”
“일하고 있어. 집에서 하는 일이라 밖에 나올 일이 별로 없을 뿐이지.”
“아, 맞다. 너 번역한다고 그랬지. 깜박했네.”
“그런 건 기억하지 않아도 돼.”
“단유야.”
“왜?”
“···저기 있잖아.”
유진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뭔가를 말하려던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단유의 핸드폰에서 울린 벨소리였다.
“여보세요?”
―아, 저 혹시 그쪽 분이 어제 보험사기 경찰에 신고하신 분이신가요?
중년 남성의 톤 낮은 목소리에 단유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요?”
―저는 어제 그 운전자의 남편 되는 사람입니다.
“아, 예. 그런데 어떤 일로···, 아니 그 보다, 아주머니는 괜찮으신가요?”
―네, 다행히 중상은 아니어서···. 아무튼 말입니다. 혹시 잠깐 시간 되시면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앞에서 유진이 뻘줌하게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통화가 끝나길 기다리는 모습이라 단유는 손을 저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 거죠?”
―그게 전화로 말씀드리기가··· 만나 뵙고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먼저 가라는 뜻으로 손을 저었더니 유진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에 올랐다.
“뭐, 그게 편하시다면. 어디서 뵐까요?”
밴 앞쪽으로 몸을 틀어 운전석에서 기다리고 있는 매니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매니저는 알겠다는 듯 손을 살짝 들며 단유의 인사를 받았다.
―그게, 제가 지금 일 때문에 일산에 와 있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일산 쪽으로 오실 수 있나요?
“네? 일산이요?”
차 문을 닫으려던 유진이 멈칫하더니 단유를 빤히 바라보았다.
****
“아니, 뭐 그런 사람이 다 있대? 자기가 뭔데 오라마라야? 부탁할 일이 있으면 자기가 직접 찾아와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 말하는 유진이었지만, 말투와 다르게 표정은 왠지 들떠보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생각했으면 딱 부러지게 말했어야지.”
“······.”
분명 그 상황에서 단유는 말했다. 자신이 왜 거길 가야 하냐고. 교통비는 자신이 댈 테니 부탁한다는 상대의 말에 단유가 잠시 머뭇거릴 때, 유진은 손을 까닥거리며 차에 오르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입꼬리를 잔뜩 올린 채.
지금은 짐짓 화가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입꼬리를 씰룩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속내는 정반대인 듯 싶었다.
“흠흠.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보자는 건데?”
단유는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딱히 숨길 일도 아니란 생각에 어젯밤 집에 가던 길에 마주쳤던 일을 설명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진짜로 있구나. 넌 어떻게 겁도 없이 그런 델 끼어들어?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럼 네 생각에 내가 끼어들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응? 뭐, 또 그렇게 물으면···대답하기가 곤란하네. 결과는 둘째치고 어쨌든 불쌍한 사람을 도우려고 했던 거잖아? 문제는 그 사람이 전혀 불쌍한 처지가 아니었단 거지만. 그쵸, 오빠?”
“뭐, 그렇지.”
“아마 오빠가 거기 있었으면 못 본 척하고 돌아서지 않았을까? 오빠?”
“넌 대체 날 뭘로 보는 거냐?”
“양심도 없는 사람?”
“내가 어디에 양심이 없다는 거야?”
“소속 연기자를 막대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이나 하는 못 된 매니저?”
“너야말로 매니저를 우습게 보기나 하고, 험담이나 하는 이상한 사람이다.”
“내가 언제 험담했어? 험담은 오빠가 더 많이 했지.”
“너 지난번에 사무실에서 정 대리한테 내 험담했어, 안 했어?”
“우와, 그게 언제 일인데 그걸 꺼내냐? 오빠, 치사하다.”
“이제 치사한 사람이야? 에휴, 더러워서 내가 먼저 회사에 담당 바꿔 달라고 졸라야겠다.”
“흥, 그 전에 내가 먼저 바꿔 달라고 말해야지.”
“나 운전 중이다. 자극하지 마라.”
“네네. ···근데 단유야. 그 사람이 왜 널 부를까?”
“모르지. 만나서 이야기를 해 봐야 알지.”
“근데 진짜 남편 맞아?”
“맞대.”
단유는 조금 전 지구대에 연락해 그쪽에서 연락처를 줬음을 확인한 참이었다.
“경찰이 남의 전화번호를 그렇게 함부로 알려줘도 되는 거야?”
“안 되겠지.”
안 되는데,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사람들이 없진 않았다. 그리고 짧은 통화를 나눴던 그 중년인이 그걸 되게 하는 사람 중 한 명일 수 있었다.
“혹시 도와줘서 고맙다고 사례라도 하려는 거 아닐까?”
“사례금을 주려고 사람을 부른다면, 그것도 조금 이상하지 않나? 그리고 사례금 때문은 아닌 거 같아.”
“왜?”
상대는 분명하게 뭔가 부탁할 일이 있다고 목적을 밝혔다. 사례금 지급이란 게 시간을 다투는 일도 아닐뿐더러 사고 다음날 바로 자신을 찾아 연락을 줄 정도라면, 돈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어떤 부탁을 위한 것이라 추정하는 게 옳다.
상대가 어떤 사람일지 추측하는 동안 차는 일산에 도착했다. 단유가 메시지를 보냈더니 상대는 주소를 알려주었다.
“혹시 여기 아세요?”
“어, 거기가 지금 저희가 가는 곳인데.”
단유가 핸드폰을 내밀며 묻자, 매니저는 신기하다는 듯 치켜 세운 눈썹을 비비며 대답했다.
“어, 그래? 오빠? 설마 오늘 촬영하기로 한 곳의 스텝 중 한 사람은 아니겠지? 그러면 오늘 일하기 되게 힘들 거 같은데.”
유진의 섣부른 걱정에 단유는 피식 웃었다.
“이게 내 일이지, 네 일이야? 넌 신경쓰지 말고 네 일이나 해.”
“매정하다, 김단유.”
“난 원래 그래.”
“그래. 넌 원래 그렇지.”
그러나 단유를 부른 상대는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놀라운 신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