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01화 (801/956)

Drop off(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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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골목 안쪽에 보니까 방범용 CCTV가 있더군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나올런지는 모르겠지만 참조해주시고요.”

“물론 그럴 겁니다만 CCTV는···.”

“알아요, 구청 감시센터 담당이란 거. 그리고 협조 공문 요청할 거란 것도. 단지 잊지 말고 꼭 부탁드린다는 말입니다.”

“네, 네. 물론이죠. 아침에 바로 협조 요청하겠습니다.”

변호사를 등 뒤에 세운 단유의 이야기는 지구대장으로서도 쉬이 무시하기 어려웠다. 혹시라도 민원이 들어가게 되면 더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테니까. 아니, 이미 골치 아픈 일이 돼버린 걸까?

“혹시 주변 차량 블랙박스 같은 것도 제가 따로 가서 구해야 하는 건가요?”

“아뇨, 저희가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구대장은 최대한 친절과 봉사의 이미지를 드러내려 노력했으나, 단유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뇨, 지금 상황으로는 걱정이 되네요. 전 그저 위법 상황을 목격하고 이를 신고한 건데, 도리어 폭력으로 입건한다 하니 말이죠.”

“그게 아니고요.”

지구대장의 변명에도 단유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옆에 선 변호사에게 물었다.

“김 변호사님, 혹시 모르니까 저희가 따로 가서 구하는 게 좋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일단은 경찰 쪽에 맡기시죠.”

“그럴까요? 거기 수제 돈까스 집 앞에 회색 넥쏘가 서 있더군요. 차량 번호가 56다4815였습니다. 블랙박스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확인 부탁드릴게요.”

“어, 거기 차가 있는 건 어떻게···, 아니 번호까지 외우셨어요?”

“처음에 저 사람이 작업이란 걸 걸 때, 주변을 한 번 둘러보면서 확인했던 겁니다. 만일의 경우가 있으니까 혹시나 해서 외웠던 건데 지금은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솔직히 고백하건대, 지구대장은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애초에 신고 전화를 받고 달려간 것은 지구대장이 아니었지만, 그가 신임하는 후배 경찰들의 말에 따르면 단순한 언쟁 정도가 아니라 몸싸움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이고, 의심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원칙에 따라 사실에 판단해서 사건을 봐야 하는 경찰로서는 덩치와 그 동료가 열을 내며 진술하는 내용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엔 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 의해 입건되어 경찰의 조사를 받도록 하는 것이 절차였고 관행이었다. ‘관행’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정말 소수의 몇몇 사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폭행 사건을 지구대가 아닌 경찰서에 처리하도록 하기 때문이었다.

“지구대의 노고를 알아달란 뜻은 아니지만, 지구대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은 넘쳐나는 반면, 일을 처리할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경찰서로 넘기는 게 보통입니다.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는 현실이거든요.”

단유와 변호사를 회의실로 데리고 들어온 지구대장이 한숨과 함께 털어놓았다.

“물론 억울하시겠습니다만, 지금 당장은 저희가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여유가 없어 그렇습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보셨다는 그 운전자분이 증언하신다면 모를까.”

그러나 그 운전자는 지금 응급실에서 긴급 수술에 들어간 상태라는 전언이 있었다.

“억울하신 거 다 압니다. 그런데 저희는 항상 중립, 공정해야 할 위치에 있기에 이럴 수밖에 없어요.”

단유와 변호사가 회의실에 들어간 사이, 다시 목청을 높여 억울하다고 난장을 피우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닫힌 문 너머로 흘러들어왔다. 아마도 변호사를 대동한 단유 때문에 위기감을 느낀 탓이리라.

“신원이 확실하시니 별다른 조치는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우선 돌아가시고, 나중에 조사가 필요하면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네.”

연세 지긋한 지구대장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안쓰럽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요. 원래 저희가 할 일을 하는 건데요. 사실 별로 한 것도 없지만요.”

“면전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지만, 정말 변호사라는 직함의 위세는 무시 못 하네요.”

“하하. 아, 이렇게 웃을 일은 아닌데 웃음이 나는군요.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죠.”

요즘은 거리에 널린 게 변호사라지만, 유명 로펌의 이름이 붙는 변호사라면 어딜 가더라도 우대를 받는다.

“만약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면 다시 연락 주십시오. 말씀하신 내용대로라면 단유 씨가 다시 나올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알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죠.”

집까지 태워주겠다는 변호사들의 호의를 거절한 뒤, 단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고현장으로 돌아오니, 그 사이에 사고 난 차량은 옮겨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다만 미처 치우지 못한 잔해들만이 도로 위에 남아 있었다. 아마 좀 더 시간이 지나고 새벽이 되면 그마저도 깔끔히 치워질 테다. 이후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사고가 난 지도 모르고 무심하게 지나갈 테고. 하긴 어느 누가 사고가 났는지를 살피며 지나갈까?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건물이 무너지는 정도의 사고가 나서 현장이 부득이하게 장기간 보존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도 이곳에서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우스운 가정이지만 만약 보험 사기가 벌어지던 그 현장을 못 본 척했다면 어땠을까? 신고해달라며 허세를 부리던 덩치의 말을 무시했다면 어땠을까? 어떤 개입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면, 그 일은 마치 지금 발밑에 떨어진 헤드라이트 조각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일.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도 서서히 잊혀지다가, 그런 일이 있었던가 굳이 떠올리지 않는다면 생각도 나지 않을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조금 전까지 단유가 겪었던 불합리한 의심과 편의주의적 절차에 끌려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느껴야 했던 불쾌감은 느끼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정년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 지긋한 지구대장이 아들 뻘이나 될까 싶은 단유의 비위를 맞추려 굽신거리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그런 지구대장의 모습에 자신이 모욕당한 것마냥 불만을 드러내던 경찰들의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아무 짓도 안 했노라 떠드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음주운전을 하다 걸렸으면서도 처벌이 두려워 도망갈 생각만 했던 운전자의 행태에 혀를 찰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단유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도망치는 이기심을 비난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그 상황에서도 굳이 도망가겠다고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내고 끝내 응급실로 끌려간 행태에 답답함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따지면 세상 일이 다 그렇다. 24시간 반복되는 뉴스들을 보지 않으면, 클릭 몇 번에 나오는 포털의 뉴스들을 보지 않으면, 아무리 큰일이 벌어졌다 해도 내 일이 아니게 된다. 내 일이 아니면 관심을 기울일 필요도 없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불필요하게 감정이 소모될 일도 없다.

풋.

괜히 웃음이 나왔다.

욕망이니 행복이니 기껏 잘난 척 떠들고 나왔는데, 정작 자신은 지구대에 들어갔다 나오는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그러고 보면 자신이 가진 능력이란 거, 결국 도망가는 녀석을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 그건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어쨌든 피는 보지 않았으니까.

****

“어제 늦게 들어왔니?”

주방에서 물을 따라 마시던 하은이 단유를 보며 물었다.

“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네가 늦잠을 자길래 그냥 물어본 거야. 많이 피곤해 보인다?”

“생각할 게 많아서 그런지 잠을 조금 설쳤어요.”

“왜? 뭐하고 지낼 건지 고민하느라?”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또 어찌 보면 비슷한 문제네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거든요.”

“할 거 없으면 우리 학원에서 애들 좀 가르칠래?”

“말씀드렸잖아요? 아직은 그럴 주제가 못 되는 것 같다고.”

“네가 어때서? 조금 빈틈이 있긴 해도 외부 사람들은 전혀 모르니까 별문제 없잖아?”

“저한테 어떤 빈틈이 보이시는데요?”

“그걸 말로 해야 하니? 너 빈틈 되게 많아.”

“그런가요?”

“하나하나 지적하면 끝도 없을 정도? 그래도 우린 가족이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거지.”

“말 나온 김에 한 번 이야기 해주세요.”

“아침부터 상처 주기 싫다.”

“상처를 왜 받아요? 저 그 정도로 흔들리지 않아요.”

“그게 또 너의 빈틈 중 하나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너 말이야. 얼굴은 되게 무덤덤한데 의외로 상처를 잘 받는 성격이란 말이지.”

“제가요?”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쉽게 떨쳐내지 못하고, 몇날 며칠을 고민하잖아? 지금처럼.”

“그런 게 보여요?”

“못 보는 게 이상하지.”

“알았어요. 그럼 그거 말고 또 다른 건요?”

“정말 알고 싶어? 아니 정말 듣고 싶어?”

“만약 저한테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들이 심각해지기 전에 고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글쎄다. 그래, 뭐 본인이 원한다는데 말 못할 것도 아니지.”

히죽 웃는 하은의 표정을 보니 괜히 물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나는, 너 요리 못 하잖아? 라면 하나 제대로 끓일 줄 모르는 그 실력이 첫 번째 빈틈.”

“변명의 여지가 없네요. 그리고요?”

“너의 패션 센스. 돈도 잘 버는 애가 왜 그렇게 입고 다니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어릴 때야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기도 하거니와 거의 교복만 입고 다녔으니 그렇다 쳐도, 지금의 넌 어릴 때 습관이 그대로 붙은 건지 맨날 허름한 옷만 골라 입고 나가잖아?”

“그런가요? 전 그저 깨끗해 보이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 뿐이었는데.”

“것도 정도란 게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동네 백수야. 학원에 출강하러 다닐 땐, 그래도 정장을 잘 챙겨 입는 것 같아서 괜찮나 싶었는데 말이야. 하긴 그때도 매일 같은 정장에 넥타이도 칙칙한 것만 챙겨 입고 다녔지?”

혹시 어제도 하은이 말한 것과 같은, 그런 패션 때문에 경찰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던 걸까?

“그리고 그 머리.”

“머리요?”

“정확히는 헤어스타일. 요즘 좋은 미용실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매번 그런 헤어스타일로 하고 다니는지 가끔 이해가 안 돼.”

“이건 그냥 습관이 돼서.”

단유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쓱쓱 긁으며 대답했다. 저쪽 세계로 넘어가게 되면 헤어스타일 따위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되니까. 몇 달이 지나도 머리카락을 잘라서 정돈을 한다는 개념이 안 생기니까. 그게 반복되니 ‘헤어스타일’이란 단어 자체가 생소하게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

“보여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니? 너는 안 그럴지 몰라도, 대부분 사람들은 겉으로 보여지는 인상에 크게 좌우된다고. 마이 웨이도 좋지만 가끔은 보여지는 것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

“그래서 선생님은 늘 신경을 쓰시는군요.”

“그럼, 당연하지. 특히나 요즘은 만나는 사람이 많으니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지.”

“대신 선생님은 방이 더럽잖아요.”

“···너 아침부터 한 번 해보자는 거냐?”

“선생님이 먼저 그러셨잖아요.”

“거기 서. 도망가지 마. 딱 멈춰.”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화목한 인사로 하루를 시작한다.

****

“너 언제 집에 갔어?”

―너 잠들었을 때.

“나 언제 잠들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별일 없었지?”

―별일 없었어.

“나 실수하고 그러진 않았지?”

―응.

“에휴, 내가 물어 뭣해. 그놈의 술이 문제지. 너 청소도 하고 나갔더라?”

―우리 먹은 것만 치운 거야.

“고마워. 아, 너 해장해야지?”

―난 별로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뭘.

“같이 해. 신세도 졌는데 내가 살게.”

―신세는 무슨. 됐어.

“아냐, 너 나와. 얼마 전에 우연히 들른 식당이 있는데 되게 맛있었어. 해장국만 전문으로 파는 가겐데, 입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데.”

―그런데 막 들어가도 돼?

“뭐 어때? 뭐, 연예인이면 해장국 먹으면 안 되나?”

―안 될 건 없지.

“그럼 됐어. 나와. 문자로 주소 보낼 테니까 그쪽으로 와.”

통화를 마친 유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야, 창문 열고 숨 쉬어. 냄새 나.”

운전석에 앉아 있던 매니저의 핀잔에 유진은 투덜대며 차창을 내렸다.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구만.”

“자기 냄새는 자기가 못 맡는다지? 너 지금 술 냄새 많이 나거든? 냄새만 맡았는데도 취하는 기분이다.”

“알았어, 알았다고. 근데 오빠, 오빠도 같이 먹을 거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해장국이라고, 말 안 했나? 네가 쏘는 거지?”

“에휴, 알았어. 오빠랑 언니 꺼 다 내가 산다.”

뒷좌석에 앉은 코디가 박수를 치며 유진의 선언에 감사를 표했다.

“근데 유진아.”

“응?”

“너 걔랑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지?”

“무슨 일?”

“어제 밤 늦게까지 같이 술 마셨다며?”

“우리 그런 사이 아니거든?”

“그런 거 다른 데선 숨겨도 나한테는 숨기면 안 된다? 알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면 됐고. 아, 니가 말한 가게가 여의도에 있는 그 가게 말하는 거지? 삼거리 뒤쪽에 있는.”

“맞아. 오빠가 가르쳐 준데.”

“맛있지, 거기. 이야, 생각만 했는데 벌써 침이 고이네.”

매니저는 룸미러로 유진의 표정을 살피며 너스레를 떨었다. 룸미러 속 유진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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