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op off(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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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고민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비록 술기운에 빌려 말하는 진심이라도 그간 얼마나 속으로 고심하고 괴로워했던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고민은, 솔직히 말해서,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단유가 학생들에게 했던 조언에서도 언급했듯, 결국 미래를 위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흔히 할 수 있는 종류의 고민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고민은 누군가에게 의탁해서 해결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오롯이 자신이 고민하고 자신이 선택해야만 한다. 그래야 그 선택의 결과를 오롯이 감당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그 선택을 대신해 준다면 그 선택의 결과가 나쁠 경우 그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고, 그것은 곧 자신의 삶에 대한 회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우리 삶의 목표는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식상한 주제야. 특히나 이렇게 만취한 자리에서는 그저 술주정에 불과해.”
단유의 대답에 유진이 뾰로통하게 쳐다보는 듯 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맞아. 그래도 네가 말하면 다르게 들리네? 그래서, 니 삶의 목표는 뭔데?”
“행복하게 사는 거.”
“에이, 시시하네.”
“넌?”
“나? 뭐, 나도 행복하게 사는 거지. 문제는 어떻게 해서 행복하게 사느냐 아냐? 난 배우로 성공해서 행복하고 싶다는 거고 넌···.”
단유는 유진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어디선가 들었던 말인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자기가 뱉어놓고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유진. 단유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행복은 욕망에 반비례하고 노력에 비례한다고 그래.”
“결국 행복하려면 노력하라?”
“이걸 공식으로 쓰면 행복이 욕망 분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어. 즉, 분모가 욕망이고 분자가 노력이야. 그래서 노력을 한다는 건 분자를 키워서 분모값에 가깝게 해야 행복을 달성할 수 있다는 뜻이지. 간단한 예로 만약 드라마의 주연이 목표라면 이 목표가 욕망이라는 분모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어. 네가 노력을 해서 달성하면 당연히 행복하겠지?”
“간단하네? 목표치에 맞춰 노력하면 된다는 소리잖아?”
“그런데 자크 라캉이라는 정신분석학자가 말하길, 이 욕망이란 것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고 그래. 왜냐하면 욕망이란 건 달성의 순간에 또다른 욕망으로 대체되기 때문이지. 역시 예를 들면, 100만원을 저금하는 게 목표였다면 이 목표치를 달성한 순간, 새로운 목표, 이를 테면 1000만원이라는 목표치가 생성되고, 이것이 새로운 욕망의 분모로서 새로운 분자값, 즉 노력을 요구하게 되는 거지. 그래서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하지만, 결코 완전한 행복은 달성할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하는 거야.”
“뭐야, 그게. 그럼 평생 불행해야 하는 거야?”
“물론 이 공식만 따지면 그런 해석도 가능하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들 하잖아? 하지만 이를 통해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방법도 우린 알 수 있어.”
“어떻게?”
“수식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야. 분모가 100일 때보다 10일 때가 분자값을 맞추기가 쉽다는 건 이해하겠어? 즉, 욕망의 크기를 줄이면 그만큼 노력도 덜 들고 더 쉽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어.”
“정말 너다운 생각이다.”
“이건 내 생각이 아냐. 극단적으로 분모값을 줄여서 행복을 느끼는 이들이 있으니까. 대표적인 경우라면 역시 무소유를 주장하신 법정 스님의 경우겠지.”
“아, 무소유.”
“욕망의 값을 최대한으로 낮추는 것. 그게 행복에 도달하기 가장 쉬운 방식이지. 하지만 쉽지 않아. 말했듯이 욕망이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면서 동시에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본능 같은 것이니까.”
“난 못하겠네. 난 욕심이 많아서.”
어느새 눈가에 어렸던 물기는 말라 사라지고 히죽 웃고 있는 입꼬리만 남았다.
“의외로 행복은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해.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하지만 만약 목표를 크게 잡고, 그것이 인생의 성공이라 생각한다면, 굳이 그 생각을 버릴 필요는 없어. 대신 그만큼 노력해야겠지. 그리고 그 노력의 끝에 과실을 얻는 순간, 그 과실이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도 감내해야 한다는 거, 그걸 말해주고 싶었어.”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다고, 흐릿한 의식 속에서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적, 처음 연예계에 입문할 때만 해도 대배우가 되겠다는 거창한 꿈보다는 무대에 한 번 서보는 것, 카메라 앞에서 연기 한 번 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는 무대에 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조연으로 회당 5분 이상 출연해도 만족하지 못하게 되니 단유의 말을 빌면 그만큼 자신의 욕심이 커졌고, 그에 반해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뜻이겠지.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하지 않았던 건 해마다 커져 갔던 욕심 때문이리라.
에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평범하게 살 것이냐, 아니면 이왕 칼을 뽑은 것 정상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절차탁마할 것이냐의 갈림길에서 현명한 선택지가 무엇인지 물었던 것인데 뜻밖의 수업을 들어야 했다. 술까지 마셨는데 말이다. 역시 단유란 친구는 냉정하고 배려가 부족하다, 고 판단할 무렵 급격히 의식이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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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식탁 위에 엎어진 유진을 그대로 두고 나갈까 생각하다가 그건 정말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유진의 한쪽 팔을 들어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손을 밀어 넣어 유진을 번쩍 들어 올리니 조금 과장해서 아무런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듯 했다. 카메라 앞에 서는 이다 보니 평시에도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체중관리를 하기 때문이라 판단했다.
그 점만 살피면 확실히 연예인이란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잘 통제하는 게 분명했다. 사람의 3대 욕구 중 하나라는 식욕을 이 정도까지 통제하니 말이다. 다만 그게 조금 지나치기에 문제가 될 뿐이고, 그것의 반발로 다른 욕망이 지나치게 부푼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깨고 나면 기억이나 제대로 할는지.’
오늘의 그녀는 진심으로 고민을 가지고 있었고, 그 고민을 털어놓은 것은 진짜 답을 원했다기 보다는 그 고민을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리라. 그것으로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 수 있다면 오늘 단유의 몫은 다 한 것이라 봐도 충분할 것이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주었더니 답답하다며 발로 팡팡 차는 유진을 내려다본 단유는 문을 열고 나가는 대신 이동 마법으로 집을 나왔다. 문을 열고 닫는 소리에 잠을 깰 것 같진 않았지만.
바로 집으로 향할까 하던 단유는 취기도 날릴 겸 거리를 걸었다. 시기상 계절은 봄이지만 아직 밤바람은 차가워서 조금 걷다 보면 금방 열기가 사라지고 술이 깰 것 같았다.
차라리 끝까지 듣기만 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유진이 고등학생 애들도 아닌데 말이다. 단유가 그렇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자신의 고민을 스스로 고뇌하고 풀어나갈 능력이 되는 성인인데 괜히 잘난 척을 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고작 한 달이었지만 애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일깨움을 준다는 행위에 너무 빠져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친구’라면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용기를 주는 쪽으로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모두 좋은 쪽으로만 이야기하더란 말에서 반감을 느끼는 것 같아 반대로 조금 딱딱하게 설명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주위 사람이라 지칭되는, 이를 테면 ‘매니저’라든가 ‘직장 동료’라든가 하는 이들이 그저 유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좋은 말만 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단유보다 더 그쪽 세계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이들이니 다른 조언보다 그런 격려가 그녀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을 지도 모른다.
결국 단유는,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쪽 세계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충고를 건넨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게 정말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도움은커녕 그녀의 의지를 깎아내리는 결과를 만들지도 모른다.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진 못할 수 있다는 걸 머리에 새기며 길을 걷던 단유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전방에 우회전 신호를 넣고 대기하던 흰색 차량으로 한 덩치 좋은 사내가 접근하고 있었다. 밤이라 거리에 다니는 차도 없건만 흰색 중형차는 신호를 넣고도 섣불리 우회전을 하지 않는데 그 광경이 신기해서 눈이 간 것도 있지만, 그 차의 조수석 쪽 소위 사각지대라 불리는 쪽에서 접근하는 덩치의 은밀한 움직임도 눈에 거슬려서 절로 시선이 따라갔다.
단유가 더 접근하기 전에 중형차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꺾기 시작할 무렵 노란 티셔츠를 입은 덩치가 차에 붙는다 싶더니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명을 내지르며 팔을 감싸안는 덩치의 모습이 보였다. 곧 차량 뒤쪽에 브레이크등이 붉게 빛나고 운전석에 있던 이가 주춤거리며 나왔다.
“괜찮으세요?”
중년의 여성이 나와서 살피려다 덩치의 외형에 움찔하는 모습도 보였다.
덩치는 아주머니를 흘겨 보나 싶더니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
“이봐요, 아줌마. 운전 똑바로 못해요?”
“아, 저, 죄송해요. 많이 다치셨어요?”
“아이 씨. 팔꿈치 금 간 거 아닌가 모르겠네. 아줌마. 골목에서 속도를 그렇게 내면 어떻게 해! 옆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안 보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 씨발. 핸드폰도 깨졌네. 이거 보여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경찰 불러요. 얼른!”
“아, 그게···. 저기요, 많이 다치신 거 아니면 제가 그냥 합의금으로 드리면 안 될까요?”
“합의는 무슨 합의? 교통 사고가 났는데 경찰 불러요, 얼른! 난 핸드폰이 깨져서 전화를 못하니까, 아줌마가 부르라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아주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며 주위를 살피다 단유를 발견했다. 혹시 아주머니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까 싶어 조금 더 빨리 다가가 보려는데, 아주머니는 더욱 급하게 덩치에게 매달렸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제가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까 이번만 봐주시면 안 돼요? 합의금은 충분히 드릴게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부딪힌 팔꿈치가 아프다며 인상을 마구 쓰던 덩치도 단유를 발견하고는 계속 경찰을 찾지 않았다. 대신 험악한 얼굴로 아주머니를 쏘아보며 물었다.
“얼마 줄 건데요?”
“저기, 그러니까···.”
“아, 씨. 빨리 말해요. 아니면 병원까지 같이 가던가. 아, 이거 분명히 금 간 건데.”
아주머니는 허둥대며 차로 돌아가더니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 안을 확인했다.
“지금 이거밖에 없는데···.”
“장난쳐요? 아 놔. 사람 뚜껑 열리게 만드네. 됐고, 경찰을 부르던가 보험사를 부르던가 해요!”
“저기, 제가요, 그러니까···.”
“어? 이 아줌마 술 냄새 나는데? 아줌마. 술 마셨어? 응? 지금 술 먹고 운전한 거야?”
“죄송합니다. 몇 잔 안 마셨는데···.”
“몇 잔 안 마셨는데 술 냄새가 이렇게 나? 안 되겠네, 이 아줌마. 같이 경찰서 가요.”
덩치는 과장되게 고개를 홱홱 돌리는 시늉을 하더니 이제야 단유를 봤다는 듯이 목청을 높여 단유를 불렀다.
“어이, 거기. 폰 있으면 경찰 좀 불러봐요. 응?”
“아이고, 아이고.”
아주머니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데, 단유가 무심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자, 이번엔 덩치가 아주머니를 졸랐다.
“아, 얼른 결정해. 경찰서로 갈래, 아니면 합의금을 줄래?”
“줄게요, 줄게요.”
“어이, 거기. 잠시만 기다려봐.”
그러나 단유는 저들의 연극에 끼고 싶지 않았다.
“여보세요? 경찰이죠? 여기···.”
“아, 놔!”
덩치가 쿵쿵거리며 다가와 핸드폰을 뺏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단유가 한 스텝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덩치의 손은 허공을 가르고 지나갈 뿐이었다.
“야, 저기 아줌마가 부탁을 하잖아. 왜 마음대로 전화를 하고 지랄이야?”
단유는 핸드폰을 든 채로 아줌마를 불렀다.
“아주머니.”
“네?”
“이거 보험사기예요.”
“네?”
어리둥절해 하는 아주머니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선 덩치가 쌍심지를 켜며 단유에게 고함을 쳤다.
“야! 너 뭐하는 새끼야!”
“길 가던 사람입니다.”
“그럼 조용히 지나갈 것이지, 왜 지랄이야, 지랄을!”
“법을 지키셔야죠.”
“내가 무슨 법을 어겼어? 응? 법을 어긴 건 저 아줌마야!”
“그쪽이 고의로 팔을 내미는 걸 봤습니다. 일부러 핸드폰 떨어뜨리는 것도 봤고요.”
“보긴 뭘 봐, 새끼야? 너 저 아줌마랑 한패야? 응? 아줌마, 설마 이 젊은 놈이랑 같이 술 마셨어?”
“아, 아니요?”
다시 단유에게로 고개를 홱 돌리는 덩치가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아무것도 아니면 그냥 네 갈 길 가라고. 괜히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고.”
“그쪽이 저한테 경찰한테 신고해달라고 했잖아요?”
“이제 필요 없으니까, 그냥 꺼지라고. 응?”
단유가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가져가니 덩치가 다시 팔을 휘둘렀다. 물론 거기에 순순히 맞아줄 단유가 아니어서 또 한 번 덩치의 팔은 허공을 갈랐다.
“팔 다치셨다면서 잘만 휘두르시네요.”
“이 새끼가!”
씩씩 콧김을 뿜어대는 덩치에게서 고약한 냄새가 나,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