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98화 (798/956)

Drop off(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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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고민이 있다는 건 그녀를 카페에서 만났을 때부터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오는 동안 여러 차례 기회를 엿보다 번번이 타이밍을 놓치고 말을 돌린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혹자는 말을 하려다 말면 답답하다 하지만, 단유는 딱히 그런 종류의 화법에 호기심을 느끼는 부류가 아니었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라는 주의였지만 그래도 친구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눈치라 적당히 맞춰줬을 뿐이었다.

‘친구는 친구지.’

명수나 상미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친구인 유진. 앞서의 두 사람이 가족에 가까운, 높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친구라면, 유진은 그런 신뢰관계까진 아니지만 단유를 향한 애정과 우호도가 그녀를 ‘친구’로 여기게끔 만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이어진, 어찌보면 묘하다 해석할 수 있는 관계가 유진과의 관계였다. 오로지 유진의 일방적인 접근으로 만들어졌으나 그 긴 시간 동안 변함없는 모습으로 단유에게 호의적이었던 그녀를 단유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나 말이야.”

“응.”

빈 잔을 응시하던 유진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배우 생활 계속해야 하는 걸까?”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단유에게 유진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단어가 ‘연예인 정유진’이었다. 친구라고는 하지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당돌함과 평소 보여주는 자세나 자기관리 등을 생각하면 ‘연예인’을 동경하는 지망생으로서의 정유진보다 이미 연예인인 ‘정유진’을 연상하게 된다.

그 정도로 그녀의 정체성을 ‘연예인’ 혹은 ‘배우’라고 인식하는 단유였기에 그녀의 뜬금없는 질문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맥락이 있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그녀가 보였던 행동과 말들, 제스쳐 등의 모든 것들이 그녀는 천상 연예인이구나, 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가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하니 단유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성공하고 싶다며?”

누구보다 연예인으로서의 성공을 갈망하던 그녀가 왜 갑자기 이렇게 우울해하는 걸까?

단유의 물음에 슬픔이란 그림자를 얼굴에 드리우며 술잔을 바라보던 유진은 긴 침묵 끝에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어렸을 적부터 연예계란 세계에 대해 가졌던 꿈과 기대.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었다는 희망과 포부. 그 시절 단유가 보았던 것처럼 유진은 당돌했고, 당당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꿈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절대 부정적인 면을 보지 않으려 했다. 숱하게 들었던 연예계의 비화. 로또보다 낮은 확률로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도 겁먹지 않고 달려들었던 유진은 아역 배우에서부터 차근차근 스텝을 밟아 나갔다.

“희망 따위가 아니었어. 그때는 오로지 그곳만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확신 같은 게 있었어.”

위스키의 달달한 향이 그녀의 숨결에 묻어났다.

혼자만의 꿈이었다면 아마 지금의 정유진은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부모는 가장 열렬한 후원자이자 매니저였다. 어린 유진을 데리고 온갖 오디션을 돌아다니며 기회를 주기 위해 노력했고, 그녀도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타고난 외모가 있고, 끼가 있으니 아역 배우를 필요로 하는 CF에도 몇 번 참여할 수 있었고 변변한 소속사 없이도 드라마에 출연하는 쾌거도 이룰 수 있었다.

조금씩 인지도를 쌓는 과정이라 생각했기에 유진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런 유진을 주위 사람들은 성숙하다 칭찬했고, 성공할 거라고 격려했다. 주위 사람들의 기대와 격려,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부모 덕에 유진은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가 나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야.”

현실을 모르고 살았던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잘 알기에 더 노력했고, 노력한 만큼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어찌 서울대에 입학할 생각을 했겠으며, 그 생각을 현실로 만들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역시 노력만으로 모든 일이 되는 건 아니었어.”

영화도 찍었고, 드라마도 찍었다. 최근의 드라마는 시청률도 나쁘지 않게 나온 편이라 얼굴도장 확실히 찍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뿐이야.”

다시 채워진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 유진의 얼굴이 조금씩 불콰해지고 다시 내뱉는 그녀의 숨결에 달달한 위스키 향이 조금 더 진해진다.

그리고 고백했다. 두렵다고.

“주인공의 친구, 지만 결국 코믹한 컨셉의 보조역. 연기 잘한다는 소리는 여태 듣지 못했고.”

발연기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을 정도의 명연기도 펼치지 못했다.

“지금이야 그 드라마에 나왔던 걔, 정도로 사람들이 알아보지만 몇 달만 지나면 쟤 어디서 봤더라, 가 돼 버리고 또 몇 달 지나면 아무리 TV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사람 정도가 돼 버릴 거야. 지금껏 그랬듯이.”

싱긋 웃는 유진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아, 왜 이러지. 괜히 울컥하네. 자, 짠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유진은 잔을 들었다. 단유는 가볍게 잔을 맞부딪혀 준 후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나이가 들수록 여배우로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 더러는 나이가 들어서 빛을 보는 사람도 있다는데, 사실 그런 사람도 굉장히 드문 편이고, 오히려 대부분은 서른이 되기 전에 사라지는 편이야. 위에는 대선배들, 혹은 나름 입지를 쌓은 이들이 자릴 잡고 비켜주질 않고 밑에서는 젊고 어린 데다 연기까지 잘하는 배우들이 계속해서 유입되니까 사이에 낀 나 같은 배우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사라지는 거지.”

솔직히 말해서 유진의 연기를 자세히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예전에 해외 로케까지 가며 촬영했다던 영화에서 유진의 짧은 연기를 볼 수 있었지만, 그게 다였기에 그녀의 연기가 훌륭한지 아닌지는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그때 그 영화는 최종 스코어가 그리 좋지 못했다. 배우들의 연기 운운하기 전에 영화 자체의 스토리가 별로 좋지 못했던 편. 혹자는 투자받아서 해외여행만 하고 온 거 아니냐고 혹평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다고 해서 벌써 포기할 정도는 아니지 않아? 내가 잘은 모르지만, 넌 아직 젊고 아직 많은 기회가 남아 있을 것 같은데.”

단유의 말에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말했지만, 내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아. 밖에서 보기엔 방송국도 늘어나고 영화 촬영도 많으니 노력만 하면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실상은 레드 오션도 이런 레드 오션이 있나 싶을 정도야. 오디션? 스토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역을 맡으려고 100 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하고, 영향력 있는 역은 이미 제작진의 추천과 인맥에 기대서 선발이 끝나 있지. 혹은 투자사나. 뭐, 됐어. 그런 건. 더 큰 고민은 나 스스로에 대한 거니까.”

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실 지금의 내 위치도 객관적으로 보면 다른 수많은 경쟁자들의 시선에선 부러워 보일 수 있는 위치거든. 이 바닥에서 구르고 구른 이들도 번듯한 드라마 한 번 나오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난 지금 내가 이룬 것들에 감사해야겠지만, 내 마음이, 내 머리가 그렇질 못해. 너도 알겠지만, 난 욕심이 많으니까. 욕심이, 지금의 날 견딜 수 없게 해. 더 높은 곳에 오르고 싶어 하니까, 그런데 오르지 못하니까 스트레스받고 우울해져.”

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단유는 유진의 뒷모습을 슬쩍 보고는 다시 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잔에 채워뒀던 얼음들이 반쯤 녹아 있었다. 잠깐 눈 돌리면 아마 그마저도 다 녹아서 사라져버리고 말리라.

“나도 알아. 내가 연기 못하는 거. 어쩌면 서울대 입학 준비를 할 게 아니라 연기 학원에서 더 많은 시간을 쏟았어야 했을 거야. 하지만 이미 지난 시간. 지금 연기 학원을 가면 괜찮지 않냐, 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하루 이틀로 될 일은 아니잖아. 지금까지는 내 연기가 학원 연기에서 보기 힘든 자연스러움이 있다고 좋아했는데, 연기 학원을 다니면 그게 과연 답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고···.”

그녀의 말이 멎을 때마다 거실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크게 울렸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른다.

“그 외에도 내 인지도를 넓히기 위해 소속사에서 잡은 스케줄을 다녀야 하고, 지속적으로 나를 노출시키기 위해 오디션도 계속 다녀야 하고. 그러다보면 또 시간을 내기가 여의치 않은 게 현실이고.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끌려다니다 보면 난 언제나 이 자리고. 정체되는 내 모습이 불안한데 마땅히 방법은 없고,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내 욕심은 제어가 안 돼. 맞아, 어릴 때는 그저 TV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 못하는 연기라도 하면서 내 몫을 한다는 것에 뿌듯했지. 감독님들, 스태프들, 선배 연기자 분들의 칭찬에 웃음을 지었던 게 실수였어.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시작이랬던가? 늦은 건 늦은 거더라. 스케줄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난 내게 남은 시간을 손가락으로 헤아려. 그리고 내 미래의 불안감을 안으로 삭히며 내일을 준비해야 해. 내 주위 사람들은 나보고 괜찮다고 그래. 잘하고 있다고 말해. 불안해 할 필요 없다고 다독여줘.”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찾아 잔에 붓는 유진은 단유의 잔도 비어 있음을 깨닫고 병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단유는 바닥에 찰랑이는 얼음을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버린 후 비어버린 잔을 유진에게 내밀었다. 다시 차오르는 위스키.

“날 위해서 하는 말이란 건 알지만, 믿을 수 없어.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 바닥 사람들, 반은 사기꾼이더란 말이지. 앞에서는 번드르르하게 혀를 놀리지만 뒤로 돌아서면 자기만의 채점표에 OX를 표기하고 X가 많아지면 알게 모르게 멀어지지. 단물이 빠질 때까지는 말 그대로 간 쓸개 다 내줄 것처럼 굴다가 더 이상 나올 국물도 없다 싶으면 냉정하게 돌아서는 거지. 그 모습을 십 몇 년간 봐왔더니 이제 내 주위 사람들을 믿을 수 없게 된 거야.”

병을 비우고, 또 다른 병을 찾으려는 유진의 팔을 붙들어 말렸다. 유진이 피식 웃으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 주변에서 정말 냉정하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더란 말이지. 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이성적이고 냉정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친구라고 빈말하기 보다는 팩트로 조질 수 있는 녀석 이잖아, 너. 그치?”

“많이 취했어. 그만 들어가서 쉬어.”

“안 되지. 여기까지 이야기 들었으면 너도 피드백 해줘야지. 응?”

“취해서 기억도 못 할 거 같은데?”

“나 그 정도로 취하지 않았거든? 넌 취했어?”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무슨 말이든. 지금 나한테 현실을 정확히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너 뿐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이야기해 줘.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난 너에 대해서 잘 몰라.”

“우와! 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술이 확 깨는데?”

“네가 그쪽 세계라 지칭하는 곳의 생리도 잘 모르고, 여배우가 얼마나 짧은 수명을 지녔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너에게 충고를 해 줄 수 있어?”

“에이, 그런 말 마. 설마 네가 모르는 게 있다고? 넌 뭐든지 다 아는 단유잖아? 그치? 내 친구, 단유야? 응? 그러니까 말해줘. 제발. 응? 부탁이야.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둘 거야?”

“응, 응. 네가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둬야지. 그만둘까?”

“많이 취했네.”

“빼지 말고.”

“유진아.”

“응.”

“간단히 말하면, 난 네가 그냥 어리광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해.”

“어리광?”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들어’,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나일 거야’라고 생각하는 거. 어리광이라고 봐.”

“···그렇지. 이 세상에 힘든 사람이 나만인 건 아니겠지. 그래, 어리광이라고 불러도 좋아.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야. 난 정말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너무 늦어버리면 난 새로운 길을 찾지도 못하고 스튜디오 구석에서 주름살만 키우며 살아야 할지도 몰라. 언제 콜업이 될지 모르는 2류 야구선수처럼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해. 그러긴 싫어. 내 가능성을 조명 뒤편 창고에 묻어두고 살고 싶진 않아.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떠나야 할까? 아니면 정말로 아직 기회가 남았으니까 포기하지 않는 게 좋을까? 응?”

단유의 왼쪽 팔을 붙잡고 큰 눈을 끔벅거리는 유진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그저 술기운에 눈물샘이 자극된 탓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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