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op off(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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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소리가 문을 열자 들렸다. 텅 빈 공간을 울리며 적막감을 한층 더 배가하는 소리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상미가 원래 쓰던 침대와 가구들은 전과 같이 그대로 두었고 방송용 장비를 갖췄던 컴퓨터와 모니터도 그대로였다. 이 방에서 사라진 거라곤 작은 인형 몇 개와 옷장에 두었던 옷들, 그리고 그 옷을 걸치고 지냈던 사람뿐이었다.
“청소는 다 하고 나갔나 보네.”
아무래도 마지막이라고 청소도 말끔히 해두었던 모양이라 손은 덜 가게 생겼다. 그래도 오래 내버려 두면 먼지가 쌓이면서 더러워질 수 있으니 그 꼴은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단유는 품에 안고 있던 시트를 펼쳐 책상과 침대 위 등, 가구 위에 덮을 수 있는 곳은 모두 덮기로 했다.
하은은 그런 단유를 보고 유난 떤다고 했지만, 쓰지 않는 방이라고 더러워지는 꼴은 두고 볼 수 없었던 단유였다. 그래서 명수의 방은 물론이고 상미의 방까지 모두 조치를 취한 뒤, 문을 잠갔다.
“이 큰 집에 우리 둘만 사는 건 좀 그렇지 않니? 관리하기도 쉽지 않고.”
“그럼 데려오세요.”
“누굴?”
“결혼할 사람.”
“야!”
“선생님도 이제 결혼하셔야죠?”
“너는 안 하니?”
“저야 아직 젊은 걸요.”
“나는 늙었고?”
“말해 뭐해요? 다 아시면서?”
“제발 부탁인데, 단유야. 명수 없다고 니가 명수 몫까지 챙길 필요는 없어.”
“무슨 말씀이세요?”
“명수처럼 뺀질거리지 말란 소리다, 이 자식아!”
단유는 싱긋 웃어 보인 뒤, 이내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농담이 아니라, 명수가 부탁을 하고 갔어요. 선생님 앞에서 계속 결혼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고. 그래야 위기의식을 가지고···.”
단유는 말을 하다 말고 두 스텝 뒤로 물러났다. 빠른 회피가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하은의 잡기 공격을 무효화시킬 수 있었다.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가볼게요.”
“거기 안 서!”
“나중에요.”
단유는 얼른 신발을 챙겨 신고 집을 나섰다.
명수와 상미가 떠나고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그 전에도 명수는 집보다 구단 내 숙소에 머물 때가 많았는데, 어쩐지 그의 부재가 크게 느껴졌다. 단유는 왠지 모를 공허함을 느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
“어서 오세요.”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 단유를 보고 익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단유도 마주 인사를 건네며 물었다.
“누나 계세요?”
“아, 잠깐 뭐 좀 사러 나가셨는데, 금방 들어오실 거에요.”
단유에게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포스기를 툭툭 두드리며 뭔가를 정리하는 모습이라 단유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냥 지나가려 했다.
“아, 다른 일행분은 저 안쪽 자리에 와 계세요.”
그녀의 손끝이 향하는 방향을 확인하고는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은 웃음을 지어 보인 뒤 시선을 내렸다. 그녀가 선 카운터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한참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친구가 보였다. 책을 눈높이에까지 들고 독서에 열중이었는데, 단유가 가까이 갈 때까지도 그녀의 시선은 책에 고정되어 떠나질 않았다. 단유가 그녀의 맞은 편에 앉으며 물었다.
“진짜로 책 읽고 있는 거야, 아니면 읽고 있는 척 하는 거야?”
들고 있던 책 위로 날 선 눈빛이 날아와 단유에게로 꽂힌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당연히 진짜 읽고 있는 거지.”
“무슨 내용인데?”
“···넌 왜 이렇게 늦었어?”
단유는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확인한 후, 그대로 액정을 그녀에게로 향하게 틀었다.
“보다시피 약속 시간까지 10분이 남았어.”
“나 바쁜 사람인 거 몰라? 어떻게 연예인보다 더 바쁜 척이니?”
따지면 그녀와 약속을 했을 때, 그녀가 단유보다 일찍 온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모처럼 단유보다 일찍 나왔다고 유세를 떠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단유는 적당히 어울려주기로 했다.
“너 요즘 일 없다고 하지 않았어?”
“일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냐! 연예인은 늘 바쁘다고!”
“뭐하느라 바쁜데?”
“너 지금 내 얼굴 보이니? 나 아침부터 샵에 가서 화장 받고 오전에 광고 찍고 오는 거였거든?”
단유는 손바닥을 펼쳐 얼굴을 가리며, ‘네가 얼굴을 그렇게 가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냐’는 뜻으로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더니 유진은 혀를 차며 책을 반쯤 내렸다.
얼마 전 끝난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의 친구 역으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는데 그걸 의식한 행동이었던 모양이다만 단유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녀가 드라마에 나왔다는 건 들어서 알지만 TV를 잘 보지 않는 데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반응을 살필 정도는 아니었기에 심드렁하기만한 단유였다.
“근데 왜 벌써 온 거야? 광고 찍으면 하루 종일 걸리는 거 아냐?”
“또 아픈 데를 찌르네. 지면 광고 촬영이었는 데다 빨리 끝나기도 해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너 말야, 오랜만에 본 친구한테 그게 할 소리니?”
단유는 검지 손가락을 세우며 ‘하나’라고 담담히 말했다.
“하나, 너랑 얼굴 본 지 이제 겨우 이틀 지났고, 둘.”
손가락 하나를 더 펼쳐 보이며 대답을 이었다.
“내가 한 말은 네가 어제 전화로 했던 말이었어. 일없어서 시간 많다고.”
“으휴, 이 융통성 없고 고지식하고 눈치도 없는 녀석아. 말을 말자.”
유진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보고 있던 책을 덮어 버렸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카페 안쪽을 훑어보지만, 카페에 앉아 있던 이들이 단숨에 그녀를 발견하고 열광해서 달려들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용하기만한 카페의 분위기를 살핀 유진은 이내 화제를 돌렸다.
“명수는 잘 갔어?”
“응.”
“가기 전에 싸인 받아놔서 다행이다. 그거 나중에 팔면 돈 좀 되겠지?”
“명수한테 싸인 받는 게 뭐가 어려워서 그래? 그냥 부탁만 하면 해줄텐데.”
“그게 아니지. 가치가 높은 물건이 팔 때 돈이 된다잖아? 준 연예인 급인데다 스토리도 있지. 결혼식 날 싸인 받아 챙겨둔 사람은 나밖에 없을걸?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 인명수의 결혼식 당일 싸인. 멋지지 않아?”
“연예인이 그래도 돼?”
“연예인은 사람 아냐? 그리고 혹시 모르지 나중에 방송에서 써먹을 일이 있을지도.”
가끔 가다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애초에 연예인으로 성공하고 싶어서 서울대를 갔다는 녀석이니 그녀의 사고방식이 남다르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바였다.
명수의 결혼식 때, 카메라가 있는걸 보고도 당황하긴 커녕 당당하게 카메라 앞에 나타나 단유 앞에 서서 인사를 건넬 때, 그 순간에도 자신이 카메라에서 어떻게 비칠지를 염두에 두고 몸을 슬쩍 틀어 각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며 ‘프로구나’라고 느꼈었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연예인임을 자각하고, 연예인으로서 입지를 높일 방법을 항상 궁리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비웃는 건 예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칭찬해야겠지.
“너 학원 강사 했었다며?”
유진은 핸드백에서 손거울을 꺼내 화장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언니, 아니 선생님이 알려주시던데. 선생님 하시는 학원에서 임시로 강사 했었다고. 애들한테 인기 많았다며?”
“많긴. 그냥 다른 선생님들 하는 정도로 흉내만 낸 건데.”
“그쪽으로 나갈 거야?”
“음,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왜?”
“그냥.”
“나중에 어떻게 생각이 들면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생각 없어. 해보니까 아직 누군가를 잘 가르칠 능력도 되지 않는 것 같고. 그거 물어보려고 나오라고 한 거야?”
“그럴 리가. 얼굴 본 김에 물어본 거지.”
“수상한데.”
“명수가 나한테 그러더라. 너 신경 좀 써 달라고.”
떠나기 전에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많은 걸 부탁하고 떠났구나, 단유는 자신이 받았던 부탁들을 잠시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니? 네 앞가림이나 제대로 해.”
“내 앞가림은 소속사에서 잘해주고 있으니 걱정 마. 근데 단유야.”
“응?”
“넌 연애 안 하니?”
“정말 넌 갈피를 못 잡겠다. 무슨 대화가 이렇게 중구난방이야?”
“아니, 그러니까 가장 친한 친구가 결혼을 했잖아? 그런 거 보면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막 그러지 않아?”
“아니? 딱히. 넌 결혼하고 싶어?”
“솔직히 말하면, 당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찍 결혼하고 싶긴 해.”
“왜?”
“사실 연예인이란 직업이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고 멋져 보일지 몰라도 되게 스트레스 받는 직업이거든. 이럴 때 가정에서 듬직한 남자가 자리를 지켜주고 있으면 조금 안정적이지 않을까 싶은 거지.”
“남편의 내조가 필요하단 소리네?”
“굳이 내조랄 것도 없지만, 그냥 가정이 만들어지면 좀 덜 외롭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그렇네. 넌 안 그래?”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
“계속 이야기를 했더니 힘드네. 목 마른데 뭐 좀 마실래?”
뭐 마실 거냐고 물었더니, 그냥 시원한 커피가 마시고 싶다고 그래서 단유가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아이스 커피 2잔을 주문할 때, 카페 문이 열리며 예영이 나타났다.
“단유 왔니?”
“안녕하세요.”
“어. 언제 왔어?”
“조금 전에 왔어요.”
“그렇구나. 유진이가 아까부터 기다리더만. 뭐 주문했어?”
“방금 주문했어요.”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또 한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 카운터로 향하니 예영은 ‘나중에 얘기하자’며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자리로 돌아가기보단 기다렸다가 커피를 받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잠시 기다리다가, 아르바이트 생이 건넨 아이스커피를 쟁반에 담아 유진에게로 돌아갔다.
그 사이 유진은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손짓으로 잠시만 기다려달란 신호를 보냈다. 단유는 잠시 자리를 피해주려 등을 돌리는데, 유진은 괜찮다며 손가락으로 맞은편 자리를 쿡쿡 가리켰다.
“무슨 전환데?”
“회사. 내일은 스케줄 없으니 푹 쉬라고.”
“그럼 집에 가서 쉬어. 여기서 괜히 시간 때우지 말고.”
“너 집에 가고 싶어?”
“응.”
“집에 뭐 숨겨 놨니?”
“숨기긴 뭘 숨겨. 그냥 집에 가서 책이나 볼까 한 거지.”
“난 아무리 책을 봐도 너처럼은 안 될 거다.”
유진은 테이블 위에 놓은 책을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다가 이내 책을 집어 옆에 둔 백에 넣었다.
이상한 소리나 한다며 단유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가 풀고는 이슬 맺힌 아이스커피 잔을 들어 마시는데, 그 모습을 유진이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는 단유의 질문에 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술 한잔할래?”
단유는 들고 있던 컵과 유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
“여기 들어가면 오해 받을 거 같은데?”
“오해는 무슨. 괜찮아, 친구잖아.”
“친구라도 넌 연예인이고, 여기 어딘가에서 널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잖아? 만약 가쉽이라도 그런 기사 터지면 너한테 해가 될 텐데.”
“만약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네가 내 매니저라고 하면 돼. 진짜로 매니저 일 해 본 적도 있잖아. 안 그래?”
“일일 매니저 한 것도 매니저로 쳐주는 거야?”
“됐고. 사람 많은 가게에서 마시는 것보단 나아. 들어와.”
삐빅. 차 문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하고 유진은 또각거리는 구두소리를 내며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위치한 건물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유진이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이제 겨우 1년 째라는데, 단유가 걱정했던 것만큼 집이 더럽지 않아 다행이었다. 남의 집에 초대되어 갔는데 더럽다고 소매를 걷고 힘을 쓰고 싶진 않았다.
“집 좋네.”
“니네 집만 하겠니? 전에 너희 집 구경하고 나서 꿈이 생겼다. 그런 집에서 살아보는 꿈.”
“빈방 많아.”
“그런 꿈이겠니? 멍청아? 내 돈 벌어서 내 집을 사는 게 꿈이란 거지.”
“이 집 정도면 괜찮아 보이는데? 혹시 다른 사람도 살아?”
“혼자 살거든? 위험한 소리는 하지 말아 줄래?”
유진은 식탁에 앉은 단유 앞에 유리잔을 두고 위스키를 온더락(on the rock)으로 준비해주었다. 맞은편에 앉은 유진은 잔을 빙빙 돌리며 뭔가 고심하는 얼굴이었고, 노란 얼음이 잔 안에서 구르며 청량한 마찰음을 빚어냈다.
“무슨 일 있어?”
단유의 물음에도 쉽게 답을 하지 못하는 유진. 단유는 술을 마시는 대신 유진의 입술이 열리길 기다렸다.
“나···.”
마침내 결심한 듯 입을 여는 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