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96화 (796/956)

Story(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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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 소리가 잦아들 무렵 단유는 다시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댔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면 아무래도 섭섭할 테니, 명수의 이야기를 잠깐 해보려 합니다.”

사실 앞의 축사까지는 명수와도 이미 말을 맞춘 상태였던 터였다. 그리고 선생님에 대한 감사로 축사를 마무리한다고만 알고 있었기에 이어지는 단유의 이야기에 굉장히 민망해했다.

원래 축사는 민망하고 오글거리는 거라는 채윤의 조언이 없었다면 단유도 그쯤에서 끝냈을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명수는 오직 하나만 바라보며 한길만 걷던 아이였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그 결과로 지금의 명수가 있게 되었지만, 어렸을 적 명수는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기도 했습니다. 당시 주변에서는 명수에게 말했습니다. 공부 안 하고 맨날 공만 차면 바보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웃음이 터져 나오고 명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마나 바보냐 하면, 중학교 때 만난 첫사랑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다가 결국 결혼까지 해버렸으니 말입니다.”

이번엔 감탄사가 나왔고 명수는 단유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단유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인 뒤 축사를 이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축구밖에 모르는 바보입니다. 공부와는 담을 쌓다시피 하면서도 오로지 축구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노력하는 바보였습니다.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바보는 오직 경기장 위 축구공만 바라보며 뛰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우습게 보던 이들에게 증명해냈습니다. 바보라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바보라서 자존심이 없었겠습니까? 바보라서 귀가 들리지 않고 눈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제 친구 명수는 바보라서 오로지 한길만 달릴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유의 덤덤한 목소리는 조금 더 큰 울림이 되어 하객들에게 전해졌다. 조용해진 식장에는 작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그는 새로운 시작을 맞이합니다. 저는 그의 바보병이 절대 고쳐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압니다. 지독한 바보기 때문에 그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오로지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것이란 걸 믿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증명해낼 것입니다. 누구보다 행복하게, 자유롭게, 풍요롭게 살 것을 말입니다.”

지태와 채윤이 손을 높게 쳐들고 박수를 유도했다. 곧 커다란 박수 소리가 식장을 가득 메웠다.

“덧붙여 그런 명수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본 저의 또 다른 친구 상미는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려는 뚝심도 가진 친구입니다. 바보 명수와 현명한 상미의 앞날에는 오직 좋은 날만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터졌고, 명수와 상미는 히죽 웃으며 단유에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단유가 덩달아 웃으며 손을 살짝 들었다 내렸다. 감사 인사는 한참 뒤에 받아야겠노라고 마음 먹었다.

****

스포츠 선수의 결혼식에 왜 연예부 기자가 찾아와서 취재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명수가 나름 국내 축구계에서 쌓은 인지도가 높기 때문이려니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금일 결혼식은 지인들만 초청해서 조용히 진행하려 하기에 취재진분들의 요청을 부득이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터뷰만 하게 해 주시면 안 되나요? 30초에서 1분 정도의 인터뷰만 해주시면 되는데요.”

잠시 틈을 내어 명수에게 물었더니, 그 정도는 괜찮지 않겠냐며 대수롭지 않게 결정했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후 영국에서 활동할 명수지만, 한국 내 명수를 지지해 줄 팬들과 언론이 호의적인 게 도움이 될 듯도 싶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단유에게 명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촬영하라 그래. 괜히 유난 떨 필요 없잖아?”

그래서 단유는 취재진을 식장 안으로 안내했다.

플라워샤워를 받으며 퇴장행진을 함으로써 우선 식은 끝이 났다. 이후 결혼식 촬영까지 빠르게 마친 후, 남은 하객들이 여전히 식장에 남아 담소를 나누는 동안 명수는 취재진들이 기다리는 임시 취재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난 선생님이랑 같이 있을게.”

“응. 알았어.”

폐백은 생략하기로 한 터라 상미는 곧바로 옷을 갈아입기 위해 대기실로 향했고, 단유는 하은의 곁으로 다가갔다.

“수고했다, 단유야.”

“수고는요. 선생님이 고생 많으셨죠.”

“아무리 그래도 축사는 좀 심했어.”

“심하긴요. 다들 손뼉 쳐주던 건 기억 안 나세요?”

“그래도 엄연히 주인공은 명순데···.”

“전 선생님 생각해서 마지막 한 줄은 일부러 생략하기까지 했는데.”

“뭘?”

“이렇게 고마우신 분이 지금까지 혼자라는 게 안타깝습니다. 주위에 좋은 분 계시면 소개를···.”

“야잇!”

단유는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그때 하은에게로 다가오는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유는 곧 옷을 단정히 하고 허리를 숙였다. 단유의 모습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린 하은도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다가오는 이와 마주했다.

“아빠···.”

하은의 아버지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탓이리라. 결국 진한 한숨을 내뱉고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먼저 가마.”

“더 있다 가시지 않으시고요?”

하은보다 단유가 먼저 나섰다. 그는 단유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까처럼 묵직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피할 수 없어 단유는 조심스럽게 두 손을 내밀어 잡았다.

“나중에···시간 되면 같이 식사 한번 해요.”

“네? 아, 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라 단유도 살짝 당황했지만, 그래도 얼른 예를 다하며 아버지가 내민 초대에 응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아무 말 못 하고 지켜만 보던 딸에게로 고개를 돌린 아버지는 또 한참을 망설이다 말했다.

“나중에 연락하마.”

뜸 들이며 꺼낸 말에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연락할게요.”

“···그래라.”

아버지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 뒤를 하은과 단유가 끝까지 따라가 배웅했음은 물론이다.

****

명수와 상미의 결혼식은 그날 저녁 바로 TV 연예프로에 소개되었다. 유명 연예인들이 온 것은 아니지만, 일단 당사자가 현재 국내 국가대표인데다 다음 시즌 영국의 프리미어리거로서 활동이 예약된 선수이기에 대중의 관심이 높다는 점이 방송의 이유였다.

“다음 소식 알려주시겠어요?”

“네! 앞서 불미스러웠던 일을 소개해드려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축하드릴 일이 있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우선 내년부터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유명 구단 에버튼에서 뛰게 된 국가대표 인명수 선수의 결혼식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단독인터뷰도 있으니까 기대해주시고요,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환한 미소를 짓던 리포터가 숙지한 대본을 명랑한 어조로 소개한 이후 화면이 전환되었다. 스튜디오에서는 진행자와 리포터들이 전면에 배치된 모니터를 바라보며 간간이 추임새를 넣으며 오디오를 채웠다.

유명 축구선수의 아내가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는 미모의 스트리머라는 소개와 함께, 명수가 과거에서부터 최근까지의 활약상을 짤막하게 편집한 영상까지 곁들여가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결혼식장 내의 촬영은 불가피하게 할 수 없었다는 말과 함께 영상에서는 하객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모습을 보여주며 소개했고, 특히 유명한 축구 선수들이 등장할 때마다 짧은 감탄사를 곁들이며 오디오를 채웠다.

사실 스튜디오에 앉은 진행자와 패널들은 모니터에 나오는 이야기에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우선은 지금 소개되는 영상이 사실 최근 연예계에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분위기가 계속 무거워지는 탓에 프로그램 내의 균형을 위해 억지로 끼워 넣은 뉴스라는 점이다. 연예계와 거의 상관이 없는 인물의 결혼식이었지만,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인물의 소식이기에 끼워 넣는 것을 굳이 반대할 순 없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인연도 없거니와,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지난 국가대표 A매치에서 한 골을 넣어 주목을 받았다는 게 전부였다. 축구를 아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그의 K리그 성적 따위는 이국의 가정식 요리 레시피나 마찬가지. 당연히 모니터를 바라보며 흥을 내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이기에 그들은 속내를 감추고 열심히 방송에 임했다.

그러다 최근 유명세를 얻어 활발히 활동 중인 배우 정유진이 화면에 나와 인사할 때는 눈에 익은 사람이 나와 반가운 마음에 진심으로 감탄하기도 했다.

“예쁘네요.”

마침 리포터도 그녀에게 다가가 짧은 축하 말을 남겨달라 부탁했다.

“아, 명수야. 몇 번 본적은 없지만 그래도 결혼 축하한다!”

드라마에 주로 코믹한 조연 위주로 맡는 그녀이니만큼 그녀의 쾌활한 축하말은 전혀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신부 측 하객인 줄 알았더니, 신랑 측 하객이었군요?

“명수 씨에게 의외의 인맥이 있었네요?”

영상에 양념 같은 애드리브가 들어갈 때, 다른 이들과 달리 조용히 영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리포터가 있었다.

‘명수.’

어렸을 때, 그의 집엘 몇 번 찾아갔을 때 만나 인사도 나눴던 인연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가 이렇게 성장할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

“얘는 나중에 우리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축구선수 중 한 사람이 될 거야.”

라고 친구를 소개하던 그의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 그는 허튼 말은 하지 않았다. 비록 그녀보다 어렸지만, 그의 말은 여느 어른들 못지 않게 진중했고 진실했다. 그래서 그를 더 마음에 들어 했었다.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어릴 적 보았던 장난기가 얼굴에 지워지지 않은 얼굴이 화면에 비칠 때마다 그녀는 그의 얼굴 너머로 시선이 옮겨졌다. 하객들이 식장으로 입장하는 장면을 보여줄 때, 그녀는 잠시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언뜻 지나가는 장면에서 보였던 얼굴은 분명 그녀의 기억 속 그의 것과 같았다.

정유진이 정장을 빼입은 한 사내와 손을 잡으며 인사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분명 정유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정유진과 악수하며 환한 미소를 짓는 그에게서 떠나질 못했다. 곧 화면이 전환되며 그가 더이상 보이지 않을 때는 괜히 짜증이 밀려올 정도였다.

‘조금만 더 보여주지.’

명수의 짧은 인사말로 마무리된 영상은 곧 다음 뉴스로 넘어갔다. 그러나 리포터 석에 앉아 있던 그녀는 표정 관리가 힘들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혼란스러웠다. 자신을 찍고 있던 카메라 감독이 이상을 눈치채고 카메라 뒤에서 손을 휘젓는 것을 보고 얼른 표정을 고쳤으나 그녀의 오른손은 저도 모르게 블라우스 아래 숨겨져 있던 목걸이를 더듬고 있었다.

****

명수와 상미는 짧은 신혼여행을 위해 그리스로 떠났다. 거기서 곧바로 영국으로 갈 참이었기에 식장 밖에서부터 공항까지 꽤 긴 시간 단유와 함께 했다.

“짐은 이미 도착했다더라.”

“그래? 잘 됐네. 구단에서 되게 신경 써주나 보다.”

“내가 자기들의 구세주가 될 거란 걸 아는 거지.”

“자만하지 말고.”

“내 사전에 자만은 없어.”

“그게 자만이야.”

“몰라, 난 바보니까.”

“이상한 데다 써먹고 있어.”

상미가 한 마디 곁들였다.

“너 바보인 거 모르는 사람이 여기 어딨니?”

상미의 핀잔에 명수가 이죽거렸다.

“너는 그런 바보랑 평생을 살아야 하는데?”

그 말에 상미는 정색을 하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야.”

“응?”

“여차하면 얘랑 이혼하고 와서 너한테 따질 테니까 그렇게 알아.”

“왜 나한테?”

어이없다는 반응의 단유에게 상미가 짐짓 화난 척을 해 보였다.

“너도 책임 있어, 인마!”

“그럼 미리 부탁할게. 제발 얘 포기하지 말아줘.”

“니 부탁이니까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거야. 알지?”

“당연하지.”

명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니들 뭐하냐? 나 아직 여기 있거든?”

라고 하지만 두 사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 비행기 시간 늦겠다. 얼른 가.”

“알았어, 갈게. 선생님 갈게요.”

“그래, 얼른 가라.”

“연락할게요, 선생님.”

“그래, 그래. 신혼 생활 잘하고, 명수 너는 무리하지 말고.”

“선생님, 제 사전에 무리란···.”

“얼른 가라.”

이대로 두면 끝도 없이 만담이 이어질 것 같아 적당히 끊을 필요가 있었다. 단유는 명수의 말을 끊고 두 사람의 등을 억지로 밀었다.

한참 후, 단유와 하은만 공항을 떠나 집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한참을 말없이 운전하는 단유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하은. 그러다 하은이 턱을 괸 채로 단유를 불렀다.

“단유야.”

“네.”

“행복하다.”

“저도요.”

단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저물어가는 노을 아래로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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