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95화 (795/956)

Story(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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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너 무슨 짓을 한 거니?”

“네?”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거야?”

그 순간 단유는 당장에라도 거울 앞으로 달려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법이라뇨?”

“어떻게 했길래 애들이 원장실로 전화를 걸까?”

“그냥 본론만 얘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애들이 너 학원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달란다. 너한테 수업 듣고 싶다고.”

그제야 단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볼을 긁적였다.

“딱히 뭘 한 건 없는데.”

단유가 능청을 떤다고 생각했는지 하은은 하얀 미소를 지으며 단유의 등을 토닥였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잠시 뜸을 들이며 학생들을 둘러보던 단유는 이내 말을 이었다.

“같은 나이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언어를 쓰며 같은 공부를 하고 있지만 여러분 서로는 모두 다릅니다. 살아온 과거가 다르고, 지금 살아가는 방식도 조금씩이나마 다를 겁니다. 앞으로도 그렇겠죠. 그렇게 다 다른 사람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때로는 우정도, 때로는 갈등도 생길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단순히 ‘동급생’이라는 단어로 갈음될 수 없는, 동등한 존재들입니다. 여러분 사이에 어떤 우열도 없다는 이야기죠. 그런 말은 들어보셨죠? 틀린 건 없다, 그저 다를 뿐. 전 그 다름을 여러분들이 기억했으면 합니다. 조금 더 욕심을 내면, 그 다름을 존중해주길 바랍니다.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은 있어도 무시해도 될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생각은 있어도 얕잡아도 될 생각은 없습니다.”

다수의 학생들은 별 감흥이 없다는 듯 단유의 마지막 이야기를 경청했다. 몇몇은 용기를 얻는 듯도 보였고, 깨달음을 얻은 듯도 보였지만, 극히 소수였다.

단유도 예상했던 바였다. 말 몇 마디로 바뀔 세상이었으면 진작에 수십 번도 바뀌었겠지. 자신이 떠난 뒤에도 이 학원에는, 이 교실에는 여전히 누군가를 무시하는 학생들이 있을 테고, 누군가와 다툼이 벌어질 수도 있을 테고, 누군가를 따돌리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앞에 있는 이들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미래의 수많은 가능성, 이란 진부한 표현을 지루하다 생각하지 마시고, 실제로 자신에게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믿으세요. 그 가능성을 매일매일 생각하세요. 그건 매일매일 모든 선택지에 대해 수학적, 논리적 판단을 하려는 노력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또 하나, 그 수많은 가능성 중에 자신이 가장 피하고 싶은 현실과 맞닥뜨릴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하세요. 자신은 절대 그렇게 될 리 없다, 라고 생각하는 미래마저 가능성이 있음을 잊지 말고 늘 주의하세요. 그렇게 필사적으로 생각하며 ‘지금’을, ‘현재’를 살아가시면 분명 여러분들은 과거를 후회할 일이 적어질 겁니다.”

단유의 마지막 수업이 끝이 났다.

****

“여, 단유야! 반갑다!”

“오랜만이다, 채윤아. 잘 지냈지?”

“넌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네. 우리 몇 년 만에 보는 건지는 알지? 그런데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환영하기냐?”

“나 지금 많이 반가워하고 있거든?”

“이 자식아! 반가우면 반가운 척 좀 하고 그래라.”

단유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밀며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린 채윤은, 군대를 다녀온 후 성격이 많이 변한 것처럼 보였다. 중학교 때는 다소 조용하면서 눈치를 많이 살피던 성격이었는데. 하긴 그때로부터 10년도 넘게 지났으니 변하지 않았다고 실망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저런 밝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보기엔 더 좋으니까.

“가끔 전화 통화하고 지냈잖아.”

“마지막 통화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넌 내가 전화 안 하면 아예 할 생각이 없지?”

“아, 뭐···. 조금 바빠서 그랬어. 아, 선생님한테는 인사했어?”

“당연하지. 선생님 되게 좋아하시더라.”

“널 봐서?”

“설마. 명수 때문에 기분이 좋으신 거겠지. 아무튼, 네 반응 보니까 조금 걱정된다.”

“왜? 뭐가 걱정돼?”

“야!”

단유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를 부르는 채윤. 단유가 그 시선을 따라가니 날렵한 몸에 짝 빼입은 정장,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가오는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 오랜만에 보지만, 어렸을 적 얼굴이 남아있어 단유는 그가 누군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지태야.”

“어이, 김단유! 오랜만이다.”

성큼성큼 걸어와 단유를 와락 안아주는 지태의 박력에 단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마주 안았다. 잠시 후, 단유를 떨어뜨려 놓고 지태는 단유를 위아래로 훑으며 웃음을 지었다.

“이야, 정말 넌 내가 상상한 그대로네.”

“무슨 상상을 했길래?”

“어렸을 때, 잠깐 그런 상상 했었거든. 우리가 크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내가 유학 갈 때도, 나중에 다시 만나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라고.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딱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란 말이지. 역시 김단유구나, 싶다.”

“칭찬이지?”

“당연하지!”

그때, 하은이 단유를 불렀다. 하은 옆에 정장을 입고 선 나이 지긋한 중년인이 서 있는 걸 보고 단유는 지태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 가봐.”

단유는 채윤에게도 인사를 한 후 하은에게로 향했다. 고운 한복을 억지로 입혀놓은 탓인지, 하은은 평소보다 훨씬 단아하고 차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단유에게 중년인을 소개했다.

****

처음 결혼을 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명수는 큰 예식장을 예약해서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시즌 영국에서 뛰어야 하는 명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래서 부랴부랴 결혼식을 준비하다 보니 이미 식장은 예약이 꽉 차서 적당한 식장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조그맣게 하자.”

오히려 상미는 잘 됐다며, 자신은 초청할 사람도 별로 없다는 식으로 핑계를 댔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상미가 초청한 친구는 명수가 부른 축구팀 동료들보다 훨씬 많았지만, 어쨌든 상미는 그렇게 말했고 명수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역시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이게 조그만 거냐?’고 묻고 싶었다. 일류 호텔의 연회장을 빌려 결혼식을 하기로 한데다 식장에 차려진 고급 음식들을 보면 마치 드라마 속에나 볼 법한 장면이라 단유는 조금 황당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상미한테 이 정도는 해줘야지.”

명수는 오늘을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았다는 듯이 아낌없이 준비했다. 그리고 비록 피곤한 일정이 연이어 이어지는 와중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미안하잖아.”

결혼 후, 두 사람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기로 결정한 상태. 물론 그곳에서도 상미가 원하는 인터넷 방송을 할 수 있다지만, 그래도 여기서 하는 것만큼은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녀를 곁에서 보호하고 싶다는 소망과 가정을 만들어 안정감을 가지려는 욕심이 섞인 결정이었다. 어쨌든 이로 인해 상미가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이 명수는 미안했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는 게 호화(?) 결혼식으로 이어졌다.

“축의금은 안 받아.”

이적할 구단으로부터 엄청난 계약금을 받아 여유가 생긴 명수의 결정에 단유는 하이파이브를 건넬 뿐이었다.

처음엔 지인이라 불러서 정말 ‘지인’이라고 부를만한 친구들만 부르는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초대되었다. 부르지 않으면 섭섭해한다는 이유로 초대된 이들은 정말로 웃고 즐기며 명수와 상미의 결혼식을 축하해주었다.

그간 뿌린 축의금이 아깝지만 딸이 절대 반대를 외치는 바람에 몇 안 되는 가까운 친척들만 부른 상미의 부모님은, 며칠 전과 달리 밝은 얼굴로 하객들을 맞이했고, 하객들은 화려한 결혼식 외형에 놀라 연신 축하인사를 건넸다. 당연히 부모님들의 어깨는 더욱 으쓱거렸다.

깜짝 놀랄만한 일도 있었다. 솔직히 오실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정말로 모습을 드러낸 분이 계셨다.

“인사해. 우리 아버지야.”

멀리서 봤을 때는 그저 어느 회사의 부장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던 중년인이었기에 단유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김단유라고 합니다.”

“흐음.”

아버지의 눈이 단유를 훑어내렸다.

그동안 거의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던 것은, 고아 둘을 맡아 기른다는 딸의 행보에 실망한 탓이 컸다. 하지만 그 두 고아 중 한 명은 축구 국가대표가 되기도 했고, 또 한 녀석은 겉보기에도 멀쩡(?)하지만 서울대를 나온 영재이다보니 어디 가서 자랑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최근에 딸은 중형급 이상의 학원 여럿을 소유한 원장이 되었으니 무작정 거리를 두기가 어려웠던 아버지. 사실 그런 외적인 건 다 제하더라도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딸인데 완전히 연을 끊기가 어려웠을 테다.

그래서 한복을 차려입은 딸을 보자마자 꺼낸 한 마디가,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였다. 이에 하은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버지를 닮아서죠.”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말을 받았다.

“독하다, 독해.”

오래도록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얼굴은 그사이 많이 늙으셨고, 하은은 진심으로 울컥했지만 좋은 날이라 생각해 눈에 힘을 주고 기어코 눈물을 참았다.

“전에 말했죠? 얘가···.”

“안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딸의 말을 자른 뒤, 자신을 담담히 바라보는 단유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야기 많이 들었다.”

내민 손을 잡으며 단유는 다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단유의 사과가 어떤 의미인지 알아들었던 걸까.

“자네가 왜 죄송해. 사과는 얘가 해야지.”

“왜 그래요? 민망하게. 일단 들어가세요. 식 끝나고 이야기해요.”

고아의 선생 노릇도 모자라, 이제는 혼주 노릇까지 하려 드는 딸의 모습이 그리 기껍지는 않았다. 모르는 이가 보면 그저 의젓한 사업가로 볼지 모르겠으나, 시집도 가지 않은 과년한 딸을 둔 아버지의 심정은 또 달랐으니. 애써 좋게 말하려 해도 입술 밖으로 말이 쏟아지지 않았다.

“그러마.”

대신 단유의 손을 한 번 더 잡아준 아버지는 그대로 식장에 들어가고 그 뒷모습을 하은은 잠시 쳐다보다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도 들어가서 준비해야지.”

“선생님.”

“왜?”

“고마워서요.”

“고맙긴. 얼른 들어가.”

“···네.”

명수와 상미의 결혼식에서 단유가 맡은 역할은 사회자였다. 평소보다 훨씬 신경 쓴 대본을 바탕으로 식을 도운 단유 덕에 결혼식은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그래도 단유의 성격이 묻어나는지 비교적 딱딱하고 엄숙하게 진행되던 후반. 명수가 지금까지 몸담았던 축구팀의 감독님께서 주례를 마치신 후, 단유는 다음 식순을 진행하는 멘트를 이었다.

“다음으로, 축사가 있겠습니다. 축사는···.”

단유는 흘끔 명수를 바라본 뒤 계속 진행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피식, 웃음소리가 나오는 것도 같지만, 이를 무시하고 단유는 앞에 놓인 물을 한 잔 마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명수의 친구입니다.”

하객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명수가 보였다.

“···여기 계신 누구나가 다 그렇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가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울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식들. 가족 뿐 아니라, 지인과 은인들까지 모두 고려하면 쉽게 대답할 문제는 아닐 겁니다. 물론 지금 저 앞에 선 신랑은 당연히 신부라고 대답해야겠지만 말이죠.”

농담 같지 않은 농담에도 몇몇이 웃어준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진 듯 했다.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아내가 없는데도 말이죠. 아내만 없냐 하면, 사실 전 부모님도 계시지 않기에 여기 계신 분들보다 선택지가 더 좁습니다만, 그래도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단유의 시선이 하은과 마주쳤다.

“여기에는 제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이 두 사람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을지 자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 명은 바로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 인명수이고, 다른 한 분은 저기 앉아 계신 정하은 선생님이십니다. 사실 축사라 함은 당연히 신랑과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옳지만, 저는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의 저와 명수는 여기에 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건 명수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느새 하은을 바라보던 명수도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단유의 이야기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저의 가장 친구이며 형제인 명수, 그리고 역시 저의 오랜 친구인 유상미이며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전 저희 선생님께도 축하드린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천애 고아인 저희 두 사람을 오늘 여기까지 오게끔 해주신 덕에 저희가 이렇게 웃으며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입을 틀어막고 고개 숙인 하은에게 명수가 육성으로 외쳤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단유도 마이크에서 입을 떼고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하객들에게서 환호와 박수 갈채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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