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1)
-------------- 791/952 --------------
평소처럼 덤덤한 얼굴의 단유였지만, 하은은 단유가 보통 때보다 기분이 좋다는 것을 감지했다.
“좋은 일 있었어?”
“아뇨, 딱히. 왜요?”
“기분 좋아 보이길래.”
“아, 그게···.”
단유는 조금 전 수업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수학으로 논리력을 배양해 학업에 도움을 받았다, 는 이야기잖아. 별 내용도 없네 뭐.”
“그렇죠. 기본이죠.”
“하긴 그 기본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아서 문제지. 잘했어.”
하은은 단유의 등을 팡팡 두드려주었다.
그 시간. 단유가 나가고 난 뒤의 교실에서는 진이 빠진 얼굴을 한 학생들의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나 수학 포기할까 봐.”
“저 선생님, 진짜 암산으로 푼 거 맞아? 그냥 답을 다 외워서 말 한 거 아냐?”
“오늘 푼 문제가 몇 갠데, 그걸 다 외웠으려고?”
“아무리 앞에 잡담을 했다고 해도, 남은 시간에 진도를 맞추겠다고 그렇게 무식하게 달릴 건 뭐야?”
“솔직히 난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내가 무식한 거야, 아니면 선생님이 문제를 너무 쉽게 푸는 거야?”
“둘 다일 확률이 90%다.”
“넌 이해했어?”
“나도 그 90%에 들어가는 사람.”
“기억 남는 건 그거 하나다. 공부가 쉬웠어요.”
“저런 사람이니까 서울대를 가는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 수준에 맞춰줘야 하는 거 아냐?”
“설명 듣는 건 어렵지 않았지. 다만 속도를 못 따라갈 뿐.”
“앞으로도 이렇다면 그냥 질문을 하지 말아야겠다. 질문 좀 했다고 속도를 더 내버리면 어떻게 따라가?”
“난 그냥 얼굴 보는 맛으로 간다.”
“보는 맛은 있어. 그치?”
“공개홀 방청 가는 것도 아니고, 학원에서 보는 맛을 왜 찾냐? 난 항의 해야겠어. 이렇게 수업하면 못 따라간다고.”
“저기 남자애들은 벌써 항의하러 가는 모양인데?”
결국 단유는 또 한 번 수업 난이도에 대한 지적을 받아야 했다. 예전에 친구들을 가르칠 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로 하다 보니 이런 문제를 겪지 못했기에 벌어진 실수였다.
다음 날 수업에 들어간 단유는 우선 사과부터 한 후, 전 시간과 다르게 천천히 수업을 진행했다. 덕분에 학생들의 불만은 조금 줄어들 수 있었지만, 여전히 단유는 그리 친절한 선생님은 되지 못했다.
****
시간이 지날수록 단유는 조금씩 학원이란 환경과 분위기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실제로는 ‘A-2’반이라고 표기된 교실이지만, 불리기로는 다이아반이라고 하는 클래스의 경우, 학생 수는 다른 클래스에 비해 적지만 분위기는 진지하고 나쁘게 말하면 삭막했다. 몇몇이 사적으로 어울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지만, 수업시간에는 오로지 칠판과 단유 만을 바라보며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수업과 관련 없는 질문은 거의 하지 않으며, 관련된 질문이라 해도 수업 중엔 삼가는 편이었다.
반대로 B-15, B-16, C-5 반의 경우는, 굳이 표현하자면 그냥 평범한 수준의 학생들로 구성된 클래스였다. 공부에 열의가 없다거나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난이도 자체에 약간의 조정을 가해야 할 수준이라는 게 단유가 느낀 클래스의 차이였다. 그들도 수업에 최대한 집중하고 공부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지만, A반에 굳이 비교를 하면 약간 평범하다는 정도였다. 가끔 교실 뒤편에서 딴짓을 하는 학생도 보이고, 더러는 졸음을 못 이기고 흰자를 드러내는 학생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딱히 그들을 폄하할 일도 없었고, 오히려 수업이 끝난 후 가장 많은 학생들이 질문을 하기 위해 몰려들기도 했다. 가끔은 굳이 이런 질문을 왜 하나 싶은, 그런 문제들을 들고 오는 경우도 있었고, 문제의 답을 듣기보다 단유를 빤히 쳐다보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쓰는 학생도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아무튼, 질문에 대해 답을 주면 아이들은 기분 좋은 얼굴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겼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그냥 수업할 때와는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겐 정말 별거 아닌 수준의 지식이지만, 그 지식이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뿌듯한 느낌도 들었다.
‘맞아. 예전에도 이랬었지.’
에토신스에서 여러 학자들에게 소소한(?) 지식을 나누어 주면서 느꼈던, 그러나 이후 한동안 여러 일들이 터지며 잊고 있었던 그 ‘보람’과 ‘만족감’에 단유는 그동안 자신을 압박하던 어둠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사람을 해하는 마법만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어.’
어쨌든 이제 단유에게 남은 시간은 3주가 채 못 되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서라도 성의를 다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고는 역시 예기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법인가보다.
****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항상 말들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걸까? 의외로 처음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교무실이었다.
2주가 될 때까지 단유는 거의 교무실에 있는 편이 없었고, 그래서 학원 내 선생님들과도 그다지 접점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서로 말을 나누는 경우도 드물었지만, 그 때문에 불편한 경우는 없었다. 적어도 단유에게는. 어차피 한 달이면 그만둘 일이었고, 그래서 딱히 교무실 선생님들과 친하게 지낼 이유가 없었다. 하은도 그 점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사실 하은은 단유가 임시직이라는 이유보다는, 어차피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자연스럽게 소통을 하게 될 테고 그러다 보면 한 두 마디 씩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해지기도 하는 법이니 굳이 애써 다가가 친한 척할 필요는 없다, 라고 했을 뿐이었다. 오히려 강사들과의 친목보다는 단유가 수업을 잘 진행할 수 있는지가 더 큰 걱정이었고, 그 걱정대로 첫 주에 많은 클레임을 받아야 했던 터라 그쪽으로 신경을 덜 쓴 경향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단유와 강사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던 편.
그러나 기존의 강사들에게는 단유의 그런 태도가 불편하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했다.
처음 하은이 그를 데리고 교무실에 왔을 때, 그리고 하은이 그를 소개해주었을 때도 별 감정은 없었다. 자신들도 한때 학원을 전전하며 다녀본 경험도 있었고, 처음 업계에 발을 들일 때 얼마나 긴장했었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여자 강사들의 경우에는 다른 남자 강사들에 비해 어린 나이인 데다, 주위에서 보기 힘든 비쥬얼을 가진 단유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 단유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해 이것저것 알려줄 마음까지 몰래 가진 이도 있었다.
그러나 첫날부터 단유는 교무실을 나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수업을 마친 후에는 짤막한 인사만 남기고 교무실을 떠나버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러려니 했다.
첫 주가 지나도록, 단유의 모습은 교무실에서 보기가 거의 힘들었다. 그리고 단유의 그런 태도가 어딘지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일부러 티내고 다닐 사람들은 없다. 다들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원을 마친 후, 동료들과의 가벼운 술자리에서는 안주거리 삼아 종종 올라오는 단유였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매일 본척만척이래요?”
비록 교무실에 상주하진 않지만, 복도에서나 건물 내에서 마주치면 깍듯이 인사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대화 한 마디, 안부 한 마디 건네는 것 없이 인사만 하는 단유의 태도는 안 하니만 못했다.
“성격에 문제 있는 사람 아닐까요? 그런 사람이, 아무리 임시직이라도 학원에 있다 보면 분명 말 나올 텐데, 그럼 곁다리로 우리까지 욕 먹을 수 있잖아요?”
“며칠 전에 우연히 들었는데, 학부모들한테서 클레임 전화가 왔었대요.”
“그럴 줄 알았어. 원장쌤은 뭐래요? 학원 평판은 신경 안 쓴대요?”
“원장쌤이 직접 데리고 왔으니 끼고 도는 모양이던데요?”
강사들이 보이지 않는 곳, 이를테면 옥상이라든가 집에서 단유에게 클레임에 대한 지적을 하는 하은이었지만 이를 모르는 강사들은 그저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할 뿐이었다.
“그 두 사람, 뭐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 분위기는 아닌 거 같은데.”
“에이, 그럼 누가 티 내고 다닐까. 새로 온 쌤, 혹시 교무실 대신에 원장실에 따로 들어가고 그러는 거 아냐?”
“그건 아닌 거 같아요. 어젠가 우연히 봤는데, 옥상엘 가더라고요.”
“옥상에?”
“나도 봤어요. 원장쌤도 같이 올라가던데?”
“그럼 그게 더 의심스러운 거잖아?”
의혹이 의혹을 낳기 시작했다. 그리고 덩치를 불리는 건 순식간.
첫 주가 지나고 단유가 담당 클래스를 늘린다는 결정에 몇몇 강사들은 부담을 덜었다며 좋아했지만, 겉으로만 환영할 뿐이었다.
“아니 도대체 실력이 검증되지도 않은 사람한테 왜 계속 일을 맡기는 거죠?”
술잔이 한 순배 돌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단유의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하는, 일과 후 술자리였다.
“혹시 쌤은 뭐 들은 이야기 없어요? 쌤도 다이아 반 가르치잖아요?”
“과목이 다르니 알 턱이 있나요? 내가 대놓고 애들한테 그 쌤 어떻냐고 물어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그 애들이 먼저 이야기하는 애들도 아니고.”
사실 다이아 반에 들어가면 아무리 경력 많은 강사라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똑똑하고 능력 좋은 아이들이란 점도 있지만, 배경도 무시 못 할 아이들이 수두룩한 A반이었으니까 말이다.
“B반에서는 무슨 이야기 있어요?”
되묻는 여강사의 말에,
“B반 애들은 학을 떼던데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대답하며 머리를 흔드는 제스쳐까지 곁들이는 남자 강사의 모습에 다른 강사들이 호기심을 가진다.
“왜요?”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강사가 입을 떼기 전에 우선 목을 축이겠다고 맥주를 한 잔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입가에 묻은 맥주를 손등으로 훔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단유가 정신없게 수업을 한다느니, 아이들 반응도 안 살피고 수업을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들을 정도의 목소리인 데다가 뒷자리에 앉은 학생은 졸려서 죽는 줄 알았다며 하소연을 하더라 카더라, 그런 이야기가 줄줄 이어졌다.
술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아주 미세하게, 그럴듯하게 살을 붙여가며 말이 돌기 시작했고, 고작 2주 만에 단유는 학원 평판만 떨어뜨릴 뿐 아니라, 학원 강사로서의 자격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몹쓸 사람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단유는 변명을 하지 않았다. 변명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그런 이야기가 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으니까. 그저 가끔 교무실에 들릴 때마다 자신을 바라보는 강사들의 시선이 차갑거나 혹은 아예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는 인상만 받을 뿐이었다.
이질적인 분위기를 감지한 것은 하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교무회의를 주관하여 학원 내 문제들을 처리하던 하은은, 개중 친하다고 여겼던 강사를 따로 불러내 물었다.
“쌤, 혹시 요즘 무슨 문제 있어요?”
“아뇨, 특별히. 왜요?”
“교무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아서요.”
강사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하은에게는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그녀는 다른 강사들과의 술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의 일부를 최대한 순화시켜 하은에게 전했다.
“김쌤에 대한 불만들이 조금 있어요.”
하은의 미간이 좁혀질 무렵, 또 다른 공간에서 또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새로 온 수학쌤 있잖아.”
“키 큰 쌤?”
“그 쌤, 디스(dis) 당했다?”
“디스?”
“옆 반에서 어떤 쌤이 지나가는 소리로 그랬대. 요즘 어떤 쌤이 학원 분위기를 흐린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실제로는 한 강사가 수업 중에 교실 내 분위기가 조금 처진 감이 있어 농담조로, 분위기를 환기 시키려는 목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나왔다.
학원을 열심히 다녀야 하는 이유가 뭐냐. 좋은 대학 들어가서 좋은 직장 가지려는 목적이 있지 않느냐, 목적을 잃고 방황하다 보면 이도 저도 안 된다는 경고가 반쯤 담긴 이야기를 늘어놓던 중이었다. 비싼 학원비를 내고 강의를 듣는데 강사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학생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물론 그런 의무를 잊고 설렁설렁 수업하는 강사도 있지만, 대부분 강사들은 학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학생이 강사에게 불만을 가지면 학원비를 환불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강사가 학생에게 불만을 가지면 수업이 불성실해지니까 학생들만 손해다. 그러니 학생들도 최선을 다하자, 뭐 그런 이야기였다. 진지하게 이야기하면 듣는 이들도 기분이 나쁠 테니 농담조로 이야기를 끌었지만, 정작 학생들이 관심을 가진 건 강사가 간접적으로 언급한 한 강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어필 할 필요가 있어요. 그런 쌤이 있으면 우린 이런 쌤한테 수업 듣기 싫다고 강하게 말해야 해요. 그래야 학원도 정상적으로 운영되거든요.”
“그게 수학쌤이라고?”
“어떤 애가 물어봤대. 우리 학원에도 그런 쌤이 있냐고.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안 말했는데, 별 경력도 없이 나서는 쌤들 중에 그런 쌤들이 간혹 있다고 디스 하더라니까. 그게 누구겠어? 당연히 수학쌤이지.”
“와, 대박. 그러고 보니까 수학쌤은 다른 쌤들이랑 안 친한 것처럼 보이던데. 완전히 밉보인 거 아닐까?”
“그럴 가능성이 있지. 또 내가 우리 반 애한테서 들었는데 말이야.”
누구한테 듣고 누구한테 들으면서 커져가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새로운 단유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모르는 단유는 아무런 고민 없이 다이아 반에 수업을 하러 들어갔다.
“수업 시작할게요.”
“쌤!”
“네?”
이번에는 또 무슨 질문인가 싶어 단유가 돌아보니, 성욱이라고 기억하고 있던 학생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단유를 바라보며 손을 들고 있었다.
“야, 하지 마.”
옆에서 다영이 성욱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리는 기이한 모습도 눈에 들어왔고, 성욱을 향해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는 학생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