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86화 (786/956)

HI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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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하은이 단유를 불렀다.

“요즘 바쁘니?”

하은의 물음에 단유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미안함이었다.

“죄송해요. 많이 힘드시죠? 내일부터는 저도 도와드릴게요.”

“응?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그리고 니가 직접 와도 딱히 도와줄 건 없어. 거기 스튜디오에도 도와주는 사람은 많으니까. 조금 힘들긴 하지만, 그건 애들 결혼 문제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잠시 뜸을 들이던 하은이 곧 하려던 말을 꺼냈다.

“학원 문젠데.”

단유가 도와줘서 시작한 학원은 벌써 서울 시내에만 3개로 늘어났고, 곧 지방으로도 진출할 준비를 한다고 하니 그녀는 이제 어엿한 사업가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내가 잠시 학원 운영에 신경을 못 쓴 틈에 약간 문제가 생겼네.”

“어떤 문제요?”

“학원 선생님 한 분이 갑자기 자리를 비우시게 되었다고 하더라고.”

하은의 이야기에 따르면, 학원 선생님의 아주 개인적인 사정으로 정말 어쩔 수 없이 강의를 빠져야만 하는 일이 생겼는데, 이게 하루 이틀만 빠질 문제가 아니라 심각하면 한 달 가량을 빠져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동네 작은 학원의 경우에라도 강의가 하루 빠지게 되면 엄청난 반발이 따르는데, 하은의 학원은 규모도 작지 않은 데다가 기간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 달, 어쩌면 그 이상도 길게 갈지도 모를 일이니 운영을 맡은 하은의 입장에서 여간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좋은 선생님이었고, 수강생들도 꽤 높게 평가하는 선생님이셨는데, 그 선생님을 대체할 선생님을 찾는다는 게 또 쉽지만은 않은 일이거든.”

학원 일이라는 게 꽤 복잡 미묘한 사업이었다. 쉽게 설명하면 교육 사업이지만 학교와 달리, 학원은 학생들로부터―아무리 하은의 정책상 비슷한 규모의 학원들과 비교해 저렴한 수강료를 받는다 하더라도―돈을 받고 학문을 ‘서비스’하는 형태이기에 자본주의적 관계가 형성된다. 선생님, 이라고 불리지만 시스템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용역’이고 학생, 이라고 부르지만 시스템적으로 그들은 고가의 비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제공받아야 할 권리를 가진 ‘손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손님’에게는 보다 영향력이 강한 ‘부모님’을 뒤에 두고 있기 때문에 학원 운영자의 입장에서 쉽게 대하기 힘든 ‘고객’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더 깊이 따지고 들면 학교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솔직하게 자본주의적 관계를 형성하는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교육’이기에 용역을 제공하는 선생님들은 ‘교사’로서의 의무감과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학생들에 대한 무한한 ‘존중’을 끊임없이 보여줘야 하는 감정노동자로서의 일면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종신 계약이란 게 없다 보니, 고용이라는 측면에서 학원 선생님들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도 없다시피 하지.”

종종 비교되는 분야 중의 하나가 연예계인데, 연예계나 방송계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사실 TV로 보는 것 이상으로 많은 현실이지만 그 중에서 삶을 유지할 수 있을 수준의 돈을 받으며 활동하는 사람은 전체의 30% 정도이며 나머지는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수입을 얻는다고 말한다. 가끔 수억을 벌며 호사를 누리는 연예인들이 언급되지만 그들이 전체 연예인 중 1%도 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학원 강사의 세계도 이와 비슷했다. 대략 40만에 육박하는 학원 강사들 중 가쉽 기사에나 나올 법한 수익을 얻는 이는 전체의 1%도 안 된다. 대부분은 1년 연봉이 2천만 원 안팎이란 이야기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더구나 40만 중 장기 고용이 되는 경우는 더욱 드물어 평균 근속 기간은 3년이 채 되지 못했고, 어떤 경우에는 강사가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도 학생들의 반응이 미적지근하다는 이유로 몇 달만에 잘리는 경우도 종종 벌어진다. 물론 먼저 그만두는 경우도 많았다. 열악한 근무조건과 근무시간, 타인과의 접점을 거의 가지기 힘든 사이클링은 과도한 스트레스를 부과하게 되고, 결국 몇 년 못 가 학원을 그만두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지만 학원 역시 정으로만 운영하는 건 아니니까, 결국 실력이 부족하거나 학생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하면 운영을 하는 입장에선 아무나 쓸 수 없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어쩔 수 없는 선택, 이라지만 결국 ‘선택’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지친 하은을 붙잡고 ‘선택’의 의미를 추궁하며 지루한 논쟁으로 끌고 가고 싶지 않아 단유는 묵묵히 기다렸다.

“그런 이유로 새로 선생님을 뽑아야 돼.”

“여기까지만 들어서는 제가 도와줄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은의 학원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마케팅과 공격적인 전략을 구사하여 나름 빠르게 인지도를 쌓은 중형급 이상의 학원으로 성장했다. 물론 무시하기 힘든 정도의 투자금도 성공에 보탬이 되었고.

그런 학원이기에 공고문을 내면 곧바로 많은 강사 지망자들이 몰릴 터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새로운 강사를 투입해서 학생들의 수업을 책임져야 하거든.”

“잘은 모르지만, 보통 그런 경우라면 원래 계시던 선생님들의 스케줄을 조정해서 할 수 있지 않나요?”

“문제는 지금 빠진 선생님이 맡은 반이 소위 말하는 ‘다이아 반’이라는 거지.”

학원의 운영은 잘 모르지만, 저 단어 하나만으로도 몇 가지를 추측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할 수 없지만, 학원에서는 할 수 있는 제도. 바로 차등 교육 시스템이 하은의 학원에서도 실시되고 있는 것이리라.

“요컨대, 제가 땜빵으로 수업을 봐주란 이야기죠?”

“그렇지.”

“전 강사를 해 본적이 없는데요?”

“없긴 왜 없어? 내가 본 것만 해도 몇 번인데.”

“제가요?”

“중학교 때부터 했었잖아? 애들 옆에 데려다 놓고 가르쳤던 건 내가 아니라 너였어.”

“그건 그냥 친구들끼리 약간의 도움을 준 것 뿐인데요?”

“그 정도로 충분해. 그리고 오랜 학원 강사를 해왔던 나로서는 너의 실력이 충분히 통한다고 장담해.”

“너무 어이없는 결론이라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조금 전까지 정으로 사업하는 건 아니라고 하신 분이.”

“정 아니고 실력. 그리고 넌 충분히 실력 있고, 재능 있고. 그리고 좀 더 복잡한 문제가 있지만 그건 패스.”

“패스하지 말고 이야기 해주세요.”

“학원에서는 지금 자리를 비우게 된 선생님에 대해 높이 평가를 하는 편이야. 얼마나 높냐면, 그 선생님이 다시 돌아온다고 할 때 다시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할 만큼.”

“그럼 말 그대로 한 달짜리 시한부 강사네요.”

“그렇지. 그리고 이런 억지를 들어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게 지금의 현실. 하지만 나에게는 단유, 너라는 비장의 카드가 있다는 것. 비장의 카드를 발동하여 학원 운영에 불만을 갖는 무리를 무찌르는 게 계획.”

“불만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설마? 그냥 꺼낸 말이야. 혹시 모르지. 내 앞에서는 티를 안 내도 뒤에서 뒷담화를 할 수도 있고. 아무튼 이번 기회를 무사히 넘기면 앞으로 내 입지가 더욱 튼튼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있어.”

“그 기대에 보답하지 못할까 걱정되네요.”

“걱정 마. 너한테는 기대 안 해.”

“기대도 안 하면서 왜 저를?”

“기대라는 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거지만, 바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넌 잘할 거니까. 이미 정해진 미래에 대해 의심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 그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미래를 구상하는 게 낫지.”

“이것 참.”

“너 병원 상담도 끝났지?”

“네.”

“잘 됐네. 이제 시간도 많을 테고.”

단유는 피식 웃었다. 앞에서는 잔뜩 우는 소리만 하면서 부탁을 하는가 싶더니, 끝에서는 무한 신뢰한다는 듯이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무슨 수업인데요?”

****

명수와 상미의 결혼은 이미 예전부터 이야기가 나오고 있긴 했다. 그러나 딱히 날짜를 정하지는 않았는데 명수가 바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상미도 자기가 하는 일이 한참 궤도에 오르는 중에 결혼이라는 이벤트를 이유로 흐름을 깨뜨리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여태 지지부진했었다.

그러나 한강공원 일이 벌어지고 난 뒤, 명수가 먼저 강하게 결혼식을 올리자고 주장했다. 그동안 두 사람의 행태에 딱히 나서지는 않았지만 내심 못마땅해했던 상미의 부모님이 가장 많이 기뻐했고, 명수를 도와 상미의 결정을 이끌어냈다.

“근데 왜 갑자기 결혼이야?”

“너도 알겠지만, 나한테 단유랑 선생님은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들이야. 그렇지만 이번에 일이 터지고 나서 난 내가 그동안 소중한 사람들을 제대로 지키려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무엇보다, 단유한테 너무 많은 짐을 떠맡겼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 집을 마련한 것도 단유고, 내가 집에 없는 사이에 선생님과 널 보호해 준 것도 단유였고. 그런데 그 날 단유가 우는 모습을 보니까, 내가 더 미안했어.”

“그게 결혼의 이유라고?”

“말 끊지 말고 들어봐.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단유와 선생님이었어. 예전에는. 하지만 지금은, 미안한 이야기지만, 두 사람보다 니가 더 중요해. 정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 널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해. 적어도 너만큼은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단유가 지고 있는 짐을 덜어주겠다는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적어도 너는 내가 직접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그렇다고 축구 선수를 그만두고 24시간 네 옆에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서 나름 생각해보니까 역시 결혼이 답이라고 생각했어. 세상에 알리는 거야. 상미 넌 내 부인이고, 그러니 널 지키는 건 나라고.”

“뭐야, 그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말주변도 없고 뒤죽박죽인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명수가 자신을 어떻게든 보호해 주고 싶어 한다는, 그 진실된 마음만큼은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명수가 이렇게 저렇게 둘러 말하지만, 사실은 그 사건이 벌어진 후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상미를 정서적으로 안정시켜 주고자 벌인 일이라는 것을 상미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말로 뱉어버리면 혹시 상미가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돼서 일부러 그 말만 빼고 말하려다 두서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는 것도 이해했다.

그래서 상미는 그냥 웃음 지으며 명수의 가슴을 한 대 툭 치며 허락했다.

“완전 엉망진창인 프로포즈네.”

“실망했어?”

“아냐. 괜찮아. 너 다워.”

“근데 있잖아.”

“응.”

“나 내년부터 영국 갈지도 몰라.”

“그래서 뭐? 나도 영국 가야 한다고?”

“갈래?”

“···이 자식이!”

사실 인터넷 방송 일은 결혼 후에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영국이라 한국에서만큼 원활하게 방송하는 게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명수도 상미의 인터넷 방송에 대해서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고, 결혼 후에도 계속 한다는 것을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오히려 수천 명에 달하는 시청자들과 소통하며 건강한 상미를 보는 게 더 좋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현실은 고된 것이라, 결혼식 준비를 하는 동안 하루가 다르게 핼쓱해지는 명수였다.

“운동할 때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단유는 명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힘내’란 말 외엔 달리해 줄 말이 없었다. 축하할 일인데 위로를 하는 건 이상하니까.

“너도 웬만하면 연애해라.”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 한다.”

“선생님이 십 년전에 그렇게 말씀하셨지.”

“그 말, 선생님 앞에서는 하지 마라.”

“에휴, 우리 선생님도 점점 히스테리가 늘어나나봐. 어제 스튜디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 줄 아냐?”

“알기 싫어. 알아봐야 머리만 복잡해지지.”

“역시, 단유네.”

“도와줄 건 없고?”

“됐어. 이미 충분하다. 세상 누가 친구한테서 결혼 선물로 집을 받을까?”

“마음 같아서는 세간살이도 전부 해주고 싶은데.”

“그만, 거기까지. 이미 집으로도 충분하거든. 상미는 나보고 염치가 없다더라.”

하지만 그 문제로 명수가 얼마나 단유를 쫓아다녔는지를 알면 상미도 그리 쉽게 명수를 욕하진 못할 것이다. 단유도 무르라며 쫓는 명수를 피해 도망 다니느라 애를 썼고, 그 때문에 스튜디오에 가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근데, 학원은 무슨 이야기야?”

단유는 대충 요약해서 하은이 들려준 이야기를 전했고, 명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네.”

“뭐가?”

“그동안 너 백수로 일 없이 지내는 게 보기 그랬는데 말이야.”

“백수? 나 번역 일도 하거든?”

“그렇긴 해도, 솔직히 그거 하루 종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명수도 단유가 마음먹고 번역 작업을 하면 하루 이틀 내로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그렇기에 단유가 많은 시간을 상념에 빠져 무기력하게 지내고 있음을 보았다. 명수도 아는 사실을 하은이 모를까? 일부러 일을 만들진 않았겠지만, 마침 학원에 빈자리가 생긴 틈에 단유를 불러 일하게 만든 것이리라고 명수는 생각했다. 바쁘게 움직이게 되면 단유가 조금이라도 무기력증을 덜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명수도 할 수 있었던 판단이었으니까.

“그런데 뭐 가르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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