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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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든 숟가락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명수를 바라보는 단유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이를 보는 명수의 눈동자에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단유야.”
“······.”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괜찮아.”
대뜸 괜찮다며 위로하는 명수의 말에도 단유의 눈동자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정확하다. 지금 단유는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생각을 정리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인 느낌. 이제껏 그래왔듯이 자기 합리화를 해보려 하지만, 음소거를 시켜놓은 TV 화면 속 영상처럼 의미도 모른 채 열을 낼 뿐이었다. 당위성, 합리화는 쉽게 허물어질 뿐인 논리. 변명과 눈속임으로 가리려 해도 드러난 진실.
단유는 자신의 벌거벗겨진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가리려 해도 가릴 게 없는 현실이었다. 동화 속 벌거벗은 임금님이 가도를 행진할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를 비웃는 백성들을 바라보는 임금의 기분이 이랬을까? TV 속 스튜디오에 앉은 앵커가 단유를 보며 뻐금거리는 말이 마치,
“니가 그랬잖아? 그래 놓고선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어? 진실? 눈 앞에 펼쳐진 진실을 외면하고 달아난 니가 진실을 이야기할 자격이라도 있어?”
그러자 짙은 회색 양복을 입은 패널이 말을 거든다.
“인생이 거짓인 사람이 진실을 이야기한들, 그게 과연 진실일까요? 거짓을 말하지 않아도 인생이, 삶이 거짓인 그는 그저 사기꾼에 불과합니다.”
머리를 단정히 빗은 여성 패널이 뒤질세라 열을 올린다.
“그의 위선을 고발해야 합니다! 위선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주제에 저 혼자 고고한 척,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던 저 자를 벌해야 한다고요!”
누구도 단유를 위해 변명을 해주지 않는다. 변명과 핑계는 오로지 단유의 몫. 하지만 어떤 말로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친구가 당하고만 죽음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건 전쟁이었어. 전쟁 중에 희생자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안 그래? 내 말 맞지?”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 편하게 생각해.
저도 모르게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릴 때, 그 주먹 위로 따뜻한 손바닥이 올라와 부드럽게 감쌌다. 시선을 들어 올리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단유를 내려다보는 하은이 보였다.
“선생님···.”
하은은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단유를 천천히 안아주었다.
“괜찮아, 단유야. 괜찮아.”
하은의 목소리에 가슴에서 울컥하고 무언가가 치솟아 올랐다.
“너무 괴로워하지 마, 단유야.”
단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단유의 편을 들어주는 하은과 명수. 그러나 그들의 위로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가족이니까.
그리고 그 가족에게 단유는 떳떳하지 못했다.
“죄송해요.”
“네가 왜 죄송해? 그런 거 없어, 단유야. 죄송해할 필요 없어.”
단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저 때문에, 위험했어요. 저 때문에 선생님과 상미가 죽을 뻔 했다고요.”
“아니야, 단유야. 아니야. 그런 생각 하지 마. 절대 네 탓 아니고, 우리 모두 무사하잖아.”
“아뇨, 선생님. 제 탓이에요. 제가···지키지 못했어요.”
언제 단유가 이렇게 흐느끼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하은도 눈물을 흘렸다. 단지 단유가 이렇게 힘들어한다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단유야. 난 알아. 언제나 우릴 지켜주려고 하는 거. 상미도 알고 명수도 알고 나도 알아. 항상 우릴 지켜주고 싶어하고 또 그러려고 노력하는 거, 우리 다 잘 알아. 근데 이번 일은 사고야. 갑자기 일어난 사고였어. 그걸 네가 어떻게 막아? 네가 최선을 다하는 건 알지만 네가 신은 아니잖아? 물론 위험했어. 나도, 상미도. 그리고 너도. 우리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위험했어. 그리고 안타깝지만 죽은 사람도 있어. 하지만 우린 살았잖아? 그럼 된 거야. 일단 살았다는 것에 대해 안심하면 돼. 살아남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나중에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면 돼.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단유야.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마.”
그렇게 말을 이은 하은도 이내 펑펑 눈물을 흘렸다. 여태 참았던 슬픔과 고통과 안도의 감정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단유와 하은이 서로를 부둥켜 안은 채 눈물을 흘렸고, 어느새 나와서 이를 지켜보던 상미도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명수는 조용히 일어나 상미를 안아주었다. 상미는 끅끅 소리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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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SD라고 들어보셨죠?”
그럴 거라 짐작하고 찾아왔으니 모를 리 없었다. 하은은 옆에 앉은 단유의 손을 꼭 붙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세 분 말고도 이번 일로 병원을 찾는 이가 많다고 합니다.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에요. 가끔 어떤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다 여기며 혼자서 참으려 하는데, 그러다 더 큰 병이 생길 수 있거든요. 심각한 우울증과 불안 증세가 올 수도 있고요. 그러니 세 분은 잘 찾아오신 거예요.”
“저희 말고도 온 사람이 있나요? 그···.”
“한강공원에 있었던 사람 말이죠? 네. 정확하게 몇 명이라고 말씀드릴 순 없지만, 있습니다. 그리고 제 친구가 운영하는 병원에도 이번 일로 찾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편견이나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아프면 치료받는 건 당연하잖아요? 열린 마음으로 상담에 임하셔야 더 빨리 나을 수 있습니다.”
의사는 ‘외상처럼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없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게 아닙니다’라는 말을 덧붙이며 개별 상담 치료 계획을 짰다. 솔직히 단유는 별로 오고 싶지 않았지만, 하은의 고집을 애써 꺾고 싶지 않았다.
이후 단유는 택윤이 운영하는 사무실로 향했다.
“보상금이요? 보상금이란 건 개인이 책정하는 게 아닙니다.”
택윤이 놀란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걸 왜 당신이, 라는 눈빛에 단유는 진지하게 답했다.
“보상이든 배상이든 후원이든 기부든, 이름은 상관없어요. ···그냥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위해 뭔가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병원비든 장례식 비용이든 뭐든.”
택윤은 머리를 긁적이며 아래를 내려다보다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타블렛을 조작한 뒤, 다시 단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네, 일단 뭐 알겠습니다. 기부금이라고 하시니 이해를 못할 정도는 아니네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이상하게 반응을 한 거죠. 그런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금전적으로라도 도움을 주려는 게 이상한 건 아닌데 말이죠. 보시다시피, 단유 씨의 계좌는,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넘쳐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까요.”
좋은 데 쓴다는데 이상하다 여길 이유가 없어야 당연하겠지만, 여지껏 단유의 돈을 관리하는 동안 단유가 단 한 번도 어떤 기관이나 단체를 통해 기부금을 낸 적이 없었던 것을 잠깐 상기했었기에 저도 모르게 되묻는 실수를 했다. 초기에는 세금을 위해서라도 기부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었지만, 단유가 일언지하에 자른 탓에 이후로는 제안을 꺼낸 적이 없었던 택윤이었다. 그러나 그 과거를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다 여기며 택윤은 타블렛으로 간단히 계좌 현황을 보여준 뒤 물었다.
“혹시 생각하신 기관이라도 있어요?”
“직접 줄 수도 있나요?”
“직접이요? 기관을 통해서 하는 게 세금 문제···.”
“세금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냥 직접 주는 게 더 확실하니까 그런 거예요.”
“그럼 대상은 누구를?”
“한강공원에서 희생당한 대상 모두에게 주고 싶은데요.”
“그런 경우라면, 차라리 지정기탁제를 이용하시도록 추천하고 싶군요.”
“지정기탁제요?”
“기부자가 지원 대상과 지역 등을 특정해 기부하는 방식인데, 이 경우엔 분명한 대상자를 지정할 수 있으니 문제가 없겠죠. 가끔 기부자들의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불확실한 경우가 있어 생긴 제도입니다. 투명성을 강조한 제도라고 요약할 수 있겠네요. 지금 단유 씨가 원하는 바대로 말이죠.”
몇몇 기관들의 기부 사기 문제가 뉴스가 되기도 했지만, 그건 극히 소수의 경우이고 대부분 기관들은 기부와 후원을 위한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기에 개인이 직접 돕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택윤의 소견이었다. 결국 단유는 그의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금액을 얼마 정도 할 것이냐는 물음에 단유는 최대한, 이라고 답했다.
이후 금액에 대한 조정을 힘겹게 끝낸 택윤이 겨우 숨을 돌릴 때쯤, 단유는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 차를 몰아 한강공원 쪽으로 향했다.
잠원한강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출입통제가 걸려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었다. 대신 방송국 차량들과 수 대의 경찰차, 그리고 국과수 마크를 단 승합차만 들어선 모습이 언뜻 보였다. 임시로 텐트를 쳐서 현장 감식과 수사를 동시에 진행하는 듯했다.
굳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없어 다시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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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닙니다. 아직 시간은 남았는걸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일찍 오셨네요.”
“늦는 것보다 낫다고들 하죠.”
“어느새부턴가 우리 사회에는 시간에 대한 강박이 심해진 듯 합니다. 코리안타임이라고 아시나요? 한때 코리안타임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며 약속에 늦는 걸 죄악으로 보는 풍조가 생겼죠. 그리고 국가적 캠페인으로까지 번지며 코리안타임을 없애자고들 했고요. 덕분에 요즘은 다들 시간을 잘 지키긴 합니다만, 가끔은 이게 도가 지나친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약속은 잘 지켜야겠죠. 하지만 시간에 대한 강박으로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부여하는 현대인들이 많아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저희 병원에 오시는 환자분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거든요. 아, 물론 그렇다고 약속에 늦는 걸 옹호하는 건 아닙니다. 약속 시간을 잘 지키면 서로에게 좋은 거니까요.”
원래 병원의 의사는 들어주는 걸 잘하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마주 앉은 의사는 말이 좀 많은 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게 처음 방문한 환자들의 심리적 안정을 돕기 위한 너스레 정도로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것만은 아니다.
“그때 같이 오신 분들이···아, 두 분은 이미 한 번씩 다녀들 가셨네요. 어, 제가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그냥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굉장히 잘 생기셨네요. 빈말 아니라 정말요.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혹시 정말 연예인이신 건 아니죠? 제가 TV를 잘 보지 않아서.”
“아닙니다. 그냥···일반인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단유는 두 사람과 나들이 삼아 공원으로 갔고, 사고를 목격했으며, 이후 두려움에 떠는 두 여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는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일을 목격하셨을 때 충격이 많이 심했겠습니다.”
“······.”
단유의 침묵을 의사는 어떻게 해석했을까?
“다른 목격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고들 하더군요. 뭐 뉴스에서도 그렇게 나오고요. 저는 그저 뉴스로만 접했지만, 실제 현장에 있었던 사람에게는 말로 표현 못할 충격이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911테러 당시 붕괴된 빌딩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은 물론이고, 멀리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도 심각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호소하는 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죽음이란 게 그렇습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심한 탈력감을 느끼게 되곤 하죠. 특히 단유 씨와 같이 젊은 나이의 사람들 경우 죽은 사람을 볼 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게다가 극심한 훼손을 당한 사람을 보는 경우는 더 그렇겠죠. 시각적 충격과 심리적 공포가 준비되지 않은 순간에 들이닥치게 되면 당연히 사람의 정신에 금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의사는 단유의 PTSD를 치료하기 위함이 아니라 위로를 하기 위해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좋은 접근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위로를 통해 환자의 심신을 안정시키는 것. 그리고 환자가 말을 꺼낼 때까지 억지로 질문을 던지며 대답을 유도하는 것보단 먼저 유려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시늉을 하는 게 환자로서도 참여하기가 편할 것이다. 물론 다른 환자들의 경우에는 말이다.
“어떻습니까? 단유 씨는 스스로가 돌이켜 보기에, 괜찮다고 여겨지십니까? 아니면 앞서 말한 사람들과 같은 증상이 일상에서 보이나요?”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거의 같습니다.”
단유는 우울했다. 무기력했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채로 며칠을 보냈다. 원인이 어쨌든 말이다.
“그럼 우선 그 우울증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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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 씨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보통은 책임감이라는 무게감에 다들 조금씩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거든요? 평소의 단유 씨는 그 스트레스를 실감하지 못했을 겁니다. 애써 누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사건이 벌어지고, 자신이 보호해야 할 두 사람이 위기에 놓였다고 생각한 순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겁니다. 그 때문에 평소라면 이성적으로 사고가 가능했을 문제도 해결에 곤혹을 느낀 겁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또 단유 씨는 생소하게 느껴졌고 스트레스가 더해진 것이라고 봐야겠죠.”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이 문제는 우리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풀어보죠. 오늘 하루 만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잖아요? 오늘은 스스로가 어떤 문제로 힘들었고 괴로웠던 것인지, 그 원인을 알아냈다는 것에 만족하는 겁니다. 그리고 단계적으로 풀어나가자고요. 괜찮으시죠?”
“네.”
“그리고, 만약 증상이 심해서 밤에 잠을 자기도 힘들다거나 기분이 급격히 다운된다거나 한다면 처방전을 하나 드릴게요. 약 먹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약의 도움을 받아요. 약에 의존하기 싫다 하시는 분들도 간혹 계시지만, 오히려 그게 더 위험할 수 있거든요.”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의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웃으며 단유를 배웅하는 의사를 향해, 이런 건 필요없어요, 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난 바뀌지 않아.’
사기꾼이라고 욕하고, 거짓이라고 비난해도,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가치가 부정당하더라도, 단유는 바뀔 수 없었다. 그건 그에게 주어진 숙명이었고, 운명이었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숙명.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은 가져본다. 바뀔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