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82화 (782/956)

정화(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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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음과 함께 터져 나온 빛이 주변 일대를 가득 채웠다. 근처에 있던 사람은 물론이고, 자연학습장 너머에 있던 사람도 깜짝 놀라 눈을 가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광량(光量)이 뿜어져 나왔다.

실제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체감상 1초는 너끈히 넘을 것 같은 시간 동안 눈도 뜨지 못하고 정신 없어 하던 즈음, 아마도 폭음이 터진 부근에서 시작된 것이리라 추측되는 바람이 불어와 옷깃이 흩날리는 걸 느꼈다. 그 바람이 지나고 난 뒤에야 사람들은 겨우 눈을 뜨고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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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미와 하은도 등을 돌리고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채 몸을 떨었다. 도대체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고, 더구나 그 위험이 어느 정도에까지 피해를 미칠 것인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도 어려웠다. 오직 본능적으로 몸을 굽히고 머리를 비우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들 역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걸 느꼈다. 곁에 있던 하은이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려 상미가 먼저 실눈을 떠보니, 눈이 조금 따갑고 눈물이 맺혀 주위가 흐릿하게 보이지만 주변 사물을 대략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서, 선생님!”

상미가 하은을 붙잡자, 하은이 기함을 토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선생님! 저예요.”

그 목소리에 하은도 질끈 감고 있던 눈에 힘을 풀며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녀 역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지 연신 눈을 깜빡거리며 초점을 맞춰보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사, 상미야. 괜찮아?”

“네, 전 괜찮아요. 선생님은요?”

상미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하은의 몸을 살피니 일단은 외견상 크게 문제는 없어 보였다. 자신의 몸을 더듬으며 괜찮다는 사실을 확인한 하은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상미를 살폈다. 모처럼의 나들이라고 한껏 머리를 가꾸고 나왔던 상미였는데, 지금은 봉두난발에 흘러내린 마스카라로 얼굴이 엉망이었지만 그 외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아, 단유!”

상미가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하은의 머릿속에 단유가 상기되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하은이 단유를 찾으려 하던 그때,

“전 괜찮아요.”

단유가 다가와 대답했다.

도대체 어디에 있었냐고, 걱정돼서 죽는 줄 알았다고 가슴을 치는 하은에게 사과를 한 뒤, 단유는 두 사람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위험해요.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두 사람은 단유가 이끄는 대로 달리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니? 넌 어디 갔다 온 거고? 넌 괜찮은 거야, 정말?”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단유는 대답을 얼버무리며 우선 두 사람을 현장에서 멀리 떼어놓는 방향으로 유도했다. 이미 그들 주변에서도 그들처럼 현장에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무슨 전쟁터 같아.”

그 와중에 뒤를 힐끔 돌아보며 상미가 말했다. 과히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비록 단유가 벌인 일이긴 했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단유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단 기혁, 이란 이름을 쓰던 사내는 더 이상 살아있지 않았다. 애초에 살 수가 없었다. 바로 귀 옆에서 ‘해체 마법’에 의한 폭발로 가슴 위쪽은 완전히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졌고, 특히 머리는 반이 날아가 버렸다.

며칠동안 단유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에 비하면 그의 최후는 사실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반항도 못하고 죽어버렸다. 그 결과만 두고 본다면 단유로선 차라리 속시원하게 끝냈다고 자위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유의 마음이 가볍지 않은 건, 바로 주검이 된 기혁의 옆에서 신음과 비명을 흘리며 쓰러진 사람들 때문이었다.

애초 단유의 계획은 그를 붙잡아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해 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상대의 놀라운 반응 속도와 대처로 인해 실패했고, 그래서 다음에 준비한 것은 그의 능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마침 바로 옆에 한강이 흐르니, 단유 스스로도 피해를 감수한다면 어떻게든 그와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악한 기혁은 구경 나온 사람들 속에 몸을 숨겨 단유에게 쉽사리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도 단유는 자신의 능력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극히 꺼렸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능력을 사용하지 못했다. 사실 불이 붙은 사람들을 위해 물을 소환하는 마법을 사용한 것도 거듭 각오를 다진 후에야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기혁이 하은을 바라보는 순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단유는 더 이상 기회를 엿보며 기다릴 수 없었고, 잠시의 머뭇거림도 허용되지 않았다. 되도록 무고한 희생자를 낳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것도 그 순간에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다.

폭발의 여파로 당한 것은 비단 기혁 만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중년 남성은 어깨와 팔이 곤죽이 된 채로 죽었고, 기혁의 앞에 서 있던 장년 여성 또한 폭발의 여파로 넘어지며 머리가 깨졌다. 한 사람은 갈비뼈가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의 부상을 입은 채 신음을 흘리다 혼절했고, 또 한 사람은 귀에서 피를 흘리며 절규했다.

수 명이 죽고, 수 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실 그 전에 기혁이 한 여성에게 불을 질렀고, 그 불을 꺼뜨리기 위해 단유가 물을 소환했을 당시, 그때 피어오른 연기와 화염에 사람들이 달아나던 중이라 그나마 피해가 적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죽은 사람은 지금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단유로 인해 죽은 사람이 나왔다. 애써 피하고 싶었고 가장 꺼려 했던 일이 단유의 손에 의해 벌어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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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최초 119에 신고했던 지원차량이 이제야 도착하는 것 같았다. 따지면 실질적으로 기혁을 만나고부터 조금 전의 일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인데, 단유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왜 이제 오는 거야. 조금만 더 빨리 오지.”

사이렌 소리에 달리던 세 사람의 걸음도 점차 느려졌다. 그리고 마침내 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붉은색 구조 차량과 구급 차량을 확인한 뒤에야 세 사람은 멈출 수 있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상미와 하은은 여전히 안정이 되지 않는지 가슴께를 주먹으로 감싸 쥐며, 이제는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 현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앞서 지나간 구급차에서 내린 소방대원들이 주변을 통제하며 쓰러진 사람들을 살피는 모습과 또 그 주위에서 구슬프게 우는 사람들이 눈에 담겼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들이 내지르는 슬픔과 공포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단유는 이곳에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

뉴스에서는 잠원한강공원에서 벌어진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속보라는 이름 아래, 한강공원에서 수명의 사상자 발생이라는 타이틀을 각 방송사마다 내걸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앵커들이 현장 상황을 화면에 띄운 채 뉴스를 진행했다.

서울 한복판, 나들이 나온 가족과 친구들로 인해 붐비는 한강공원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화면에서는 모자이크된 현장 사진과 오열하는 가족들, 지인들로 가득했고, 경찰 전문가와 사회학, 심리학 전공 교수들이 급히 불려와 패널로서 스튜디오를 채웠다.

누군가가 촬영한 1분 남짓한 조악한 화질의 핸드폰 영상들이 연이어 소개되고 이해할 수 없다는 패널들과 경악을 금치 못한다는 시민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희생자도 많았지만, 목격자도 넘쳐나는 수준이었다. 기자들은 경찰보다 앞서 목격자를 회유해 인터뷰를 따낸 뒤 긴급히 방송국으로 보내고, 방송국은 거의 훑어보듯이 대충 1차 검열을 끝내고 곧바로 화면에 송출시켰다.

“갑자기 사람이 불에 붙어서 막 이렇게 비명을 지르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물이 쏟아져요. 그래서 불이 꺼지니까 막 연기가 나는데, 처음에는 무슨 영화 촬영인 줄 알았어요. 아니면 말이 안 되잖아요.”

“애들이랑 같이 바람 쐬러 나왔는데, 자연 학습장에 꽃이 많이 피었다길래 거기로 데려갔다가 바로 저쯤에서 연기가 막 나길래 무슨 불이 났나 싶었어요. 애들도 있는데 위험하겠다 싶어서 저쪽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뭐가 펑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 놀라서 바로 엎드렸거든요? 예비군 훈련 때 본 영상도 생각나고. 그런데 사방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빛이 나고 귀가 먹먹해지니까, 진짜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사람들의 목격담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SNS에서는 누군가가 현장을 찍은 사진과 동영상이 화제가 되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는 좀 더 자세한 상황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뒤늦게 찾아낸, 공원 곳곳에 설치된 CCTV의 화면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하는 장면을 방송사들이 서둘러 보도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무슨 핵폭탄이 터진 것 같다느니, 사제 폭탄으로 저런 폭발력을 낼 수 없다느니 하는 감상들을 늘어놓았다.

서둘러 집에 귀가하려는 사람들로 교통 체증이 발생하고 거리 시민 인터뷰에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치안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도되었다.

그리고, 한 방송사에서 ‘단독’이라는 이름 아래 한 영상을 소개했다.

현장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서 촬영한 핸드폰 영상이었다. 온몸을 휘감는 화염에 고통스러워하는 남자의 모습, 그리고 그가 쓰러진 뒤 영상 위에서 물이 쏟아져내려와 불을 끄는 모습, 하얀 수증기로 화면이 잠깐 가려졌다가 곧 바람에 씻겨 내려가듯 수증기가 걷히고 나타난 끔찍한 몰골에 사람들의 비명과 경악이 고스란히 담긴 영상이었다.

“이 영상은 피해자의 핸드폰에 녹화된 영상으로 저희 방송사가 단독 입수한 영상입니다. 해당 영상을 촬영한 피해자는 이후 이어지는 영상에서와 같이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했을 때 넘어지면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다행히 피해자는 그 이후 발생한 폭발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현재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안정을 취하는 것을 알려졌습니다.”

영상 중간에 이어진 아나운서의 멘트와 이어진 영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갑자기 사람 몸에서 불길이 치솟더니 이내 온몸이 불덩이로 변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을 돋게 하였다.

“피해자는 이후 핸드폰을 떨어뜨렸으나 핸드폰은 계속 촬영이 계속되었고, 이후의 상황이 모두 녹화되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은 그날따라 유난히 맑았던 하늘을 비추었다. 화면 옆으로 비스듬하게 올라온 푸른 잔디와 파란 하늘, 하얀 구름만 보면 어느 화창한 오후의 그것처럼 평화롭지만, 영상에 담긴 절규와 비명, 경악과 고함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달아나는 사람들과 도움을 주려 다가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핏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이어진 것은 폭음과 하얀 빛. 그리고 검게 변한 화면.

“영상은 여기까지입니다. 해당 영상이 사건의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촬영한 영상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사건을 재구성해 봅니다. 교수님?”

패널들은 각자의 상식과 지식을 총 동원해 사건을 분석하고 해석하려 했다. 그러나 초자연현상과 폭탄 테러로 의심되는 일을 연이어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곤혹스러워하는 패널들과 심각한 표정으로 뉴스를 진행해나가는 앵커만큼이나, 인터넷도 뜨거웠다. 각 커뮤니티마다 다양한 해석과 가설들이 나왔다. 더러는 저런 잔인한 영상이 뉴스라는 이름으로 전 국민이 보는 TV에 나와서는 안 된다며 보도 윤리를 지탄하는 이도 있었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그만큼 사건은 충격적이고 동시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거의 전 국민이 TV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가운데, 단유네 집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사건 현장에 있었지만,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던지 알지 못하는 상미와 하은은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았고, 그 옆에는 구단 훈련장에 갔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명수가 함께 자리했다.

“세상에, 무슨 일이야, 저게. 상미야, 너 정말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응. 우린 괜찮아. 단유가 조금 걱정인데.”

상미의 말에 세 사람은 위층을 바라보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단유는 굳은 얼굴로 쉬고 싶다며 자기 방으로 올라간 뒤, 지금껏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내가 올라가 볼까?”

“아냐, 일단 좀 쉬게 둬. 물어보진 못했는데 아까 같이 오면서 보니까 얼굴이 말이 아니더라. 충격을 많이 받았나 봐.”

“다친 건 아니고요?”

“그건 아닌 거 같애.”

하은은 단유가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 그리고 사건이 벌어지고 이후에 단유가 굳은 얼굴로 돌아왔던 것을 말하며, ‘아마 가까운 곳에서 저 장면을 본 게 아닐까 싶어’라고 대답했다. 하은이 가리키는 TV에는 조금 전 보았던, 차라리 영화라고 믿고 싶을 영상이 다시 한번 나오고 있었다.

그 시간, 방에 들어간 단유는 바닥에 앉아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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