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7)
-------------- 781/952 --------------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빽빽하게 들어찰 정도로 많진 않았다. 무엇보다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은 고작해야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 뿐이었고, 대부분은 반포지구까지 이어지는 자전거도로 위를 달리는 하이킹족과 바로 옆에 접한 인도(人道)를 통해 강변을 거닐던 사람들이었다.
간혹 잔디밭 뒤쪽의 주차장과 그 사이에 난 도로를 따라 자연학습장을 향해 걷는 이도 있었지만, 거의 드물었던데다 그런 이들도 대부분의 시선은 한강변 쪽을 향하고 있었다. 흔한 말로 각박한 도시를 살아가는 도시민들에게 여유를 되찾아주는 풍광이었다.
그랬기에 화염에 불타는 한 사내의 절규는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어머 어떡해, 저 일을 어째, 같은 탄식은 누구 하나의 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나온 어머니는 부랴부랴 아이들의 눈을 가리기 바빴고, 기민한 남자와 의연한 여자들은 누가 먼저랄 거 없이 핸드폰으로 119를 호출했다.
바닥에 깔린 붉은 벽돌 위에 검은 그을음을 남기며 한 걸음씩 걷던 사내가 철퍼덕 쓰러지며 뒹구는 모습은 악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워낙 거센 불길이라, 용감한 사내나 정의로운 여인이나 그저 주변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는데, 더러 몇몇은 핸드폰 카메라로 그 장면을 녹화하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어떡해’를 연발하지만, 손은 침착하게 ‘화염에 휩싸인 남자’라는 피사체를 정확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들이 평생 두 번 다시 보기 힘들 장면을 담아낼 기회를 얻은 것은.
갑자기 쓰러진 남자 위로, 대략 3, 4m는 떨어진 허공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누가 거대한 양동이를 기울여 부은 것처럼 허공의 어딘가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은 다행히도 사내의 몸에 붙은 불을 끄기에 충분했다. 허나 그 모습을 우연히 눈에 담은 이들은 비현실적인 현상의 발현에 또 다른 기함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하지만 눈으로 확인하고 곧바로 핸드폰을 치켜들었을 때, 주위는 남자로부터 피어오른 수증기로 인해 제대로 화면에 담을 수 없었다. 그와 상관없이, 그 광경을 목격한 대부분 사람들은 충격 속에서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오직 단 한 사람, 구경하는 사람들 속으로 스며든 기혁만이 재밌다는 눈으로 그 광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기혁은 윗입술을 혀로 핥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전에도 봤지만, 신출귀몰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상대였다. 정말 부러운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물이라니.’
혹시나 했지만, 역시 지난번 극장에서의 일은 단유의 능력이었음을 확인한 기혁은 두리번거리며 사라진 단유를 찾았다. 옛날 동화에 나오는 영험한 능력을 가진 도사라도 된 듯이 순간 이동을 사용하는 단유였지만, 만약 그가 접근하는 순간만 알아낸다면 자신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기혁이었다.
그리고, 기혁이 있는 곳으로부터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잠원안내센터의 옥상 안테나 부근에서 몸을 가린 채로 숨을 고르는 단유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자신을 찾고 있는 기혁을 신중하게 관찰했다.
이때, 단유는 기혁이란 사내를 제대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부터 고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기혁은 영악한 사내였다. 아무한테나 시비 걸고 다닐 것만 같은, 말보다 주먹이 빠를 것만 같은 모습이지만 실제로 그는 단유가 생각을 고쳐야 할 만큼 영리했다. 가벼운 어조로 상대를 도발할 줄도 알고 적당히 회유를 하는 척 전략을 교묘하게 감출 줄도 알았다.
새벽을 이용해 단유를 대면하려 했던 전략도 어찌 보면 단유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한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상대가 전략적이었던 반면에 단유는 감정적으로 흥분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평소의 단유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어쨌든 상대는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단유가 보인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그의 성격도 사실 눈여겨봐야 할 점이었다.
사실 이제껏 능력을 감추고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그의 신중함과 조심성 많은 성격을 방증하는 것이라 봐야 했다. 게다가 자신의 거처를 지속적으로 옮기는 등 생활 전반에 있어 몸에 새겨진 조심스러움은 단유가 그에게 뒤를 밟히고만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 장소를 전장으로 선택한 것도 굉장히 영악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넓은 장소이면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라 특별히 시선이 주목될 염려도 없고, 특별한 제스쳐를 취하지 않고도 능력을 발휘하는데 문제가 없으니 사람들은 기혁이 저런 화재를 거듭 일으켜도 의식하지 못한다. 바로 옆에 강호순 같은 놈이 돌아다니는데도 이를 알지 못하는 순진한 사람들을 방패막이 겸 미끼로 사용하는 기혁이었다.
그가 조금 전 단유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일종의 전략이었음이 분명했다. 조금 전 그의 앞으로 ‘순간이동’을 했을 때, 그를 붙잡으려 손을 내뻗다가 그의 번들거리는 시선에서 위험을 느끼고 재빨리 피하지 않았다면 단유 역시 화염에 당한 남자와 똑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사내는 단유가 추측한 것 이상의 빠른 반사 신경으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빠른 반사신경과 단유의 ‘순간 이동’ 능력을 방해하는 사람들. 그리고 제한 없이 사용 가능한 그의 능력은 보통의 주의로는 상대하기 힘들다.
조심성이 많지만 손을 쓰는 데 머뭇거림이 없는 잔인한 성정.
전적으로 그에게 유리한 전장이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단유에게도 불리하지만은 않은 전장.
즉흥적이었을 그의 전략―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어 단유를 방심케 한 전략―하나는 용케 피했으니, 다음 전략에는 당하지 않으리라.
상대의 장점과 전략, 힘의 특성을 파악했다면 남은 건 공략.
비록 정의감에 불타는 단유는 아니었지만, 희생자 목록에 줄줄이 이름이 올라가도록 방치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상미와 하은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을 방관할 순 없었다.
단유는 잠깐 시선을 돌렸다. 소란이 일어난 것을 인지하고 일어선 잔디밭의 사람들이 일제히 이곳을 향해 미어캣처럼 바라보는 가운데 상미와 하은도 똑같이 목을 쭉 빼고 사태를 파악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단유는 속으로 빌었다. 제발 이곳으로 오지 말아 달라고.
그러나 그녀들은 이내 걸음을 떼어 사람들이 뭉쳐있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녀들은 잠시 자리를 비운 단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 하고 있었지만, 그 마음까지는 단유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한편.
단유가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 너그럽게 기다려줄 기혁이 아니었다. 기혁은 단유가 여유롭게 고민하고 있을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오지 않는다면 오게 만들면 되지.’
이제 대화는 필요 없다. 음성으로 말을 건네지 않아도 충분히 메시지를 보낼 수 있으니까.
****
핸드폰을 들고 불에 타들어 가던 사내를 찍던 여자는 옆에서 같이 사내를 찍던 친구에게 말했다.
“분신자살인가?”
“모르지. 그런데 왜 여기서 분신자살을 해?”
사내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고스란히 핸드폰에 담아내며 두 사람은 사내가 저렇게 된 이유에 대해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공중에서 물이 쏟아지며 사내의 몸에 붙은 불을 한 번에 꺼뜨렸다. 흰 연기가 자욱하게 일며 주위를 채우니 핸드폰에 녹화되는 영상도 하얗게 변했다.
“뭐, 뭐야?”
하얀 연기는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곧 사라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물에 젖었지만 심한 화상으로 기절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머, 세상에. 무슨 일이야?”
혹시라도 위험할까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핸드폰을 든 손만 쭉 내뻗던 찰나였다.
“까악!”
옆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화들짝 놀란 여자가 고개를 돌리니 바로 옆에 있던 친구의 몸에 화염이 솟구치고 있었다. 엉겁결에 같이 비명을 내지른 여자는 다급히 친구로부터 물러섰다.
“살려줘! 은하야! 살려줘!”
평소 자랑하던 길게 기른 머리가 순식간에 타올라 사라지며 역한 냄새를 풍겼다. 친구는 불을 끄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때리듯 미친 듯이 팔을 휘둘렀지만, 이미 온몸에 붙은 불은 그리 쉽게 꺼질 것 같지 않았다.
“아악! 살려줘!”
비명을 내지르며 여자에게 다가오는 친구의 모습에 여자는 물러서다 자기 발에 걸려 뒤로 넘어졌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지만, 친구는 정신없이 허우적대면서도 정확히 여자가 넘어진 방향으로 다가왔다. 여자는 발로 땅을 밀며 멀어지려 해보지만 다가오는 친구가 더 빨랐다. 여자는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외쳤다.
“살려줘요!”
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
그때, 또 한 번 기현상이 펼쳐졌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생겨난 폭포 같은 물줄기가 허우적대는 친구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어떤 전조 현상도 없이 불쑥 나타난 물 폭탄에 주위는 금방 하얀 연기로 가득 찼고, 벌벌 떨던 여자는 시야가 가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무언가가 발에 닿는 느낌에 흠칫 놀란 여자.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발목을 꽉 쥔다는 느낌에 여자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또 한번 펼쳐진 참혹한 광경과 기현상에 대부분 사람들은 뒤늦게 위험을 감지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몇몇이 그래도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저 발을 동동 구르며 조금이라도 빨리 119가 도착하기를 기도하지만, 그런 이들도 일단은 현장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 물러섰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고픈 마음에 다가오던 이들도 달아나는 사람들의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고는 등을 돌렸다.
“뭐예요? 뭔데요?”
하은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려 했지만 누구도 제대로 대답해줄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여유로운 사람은 오직 한 사람, 기혁이었다.
‘이래도 안 나타나?’
라는 속내가 슬쩍 입꼬리를 올리게 만들었지만, 주변의 누구도 이를 의식하지 못했다. 물러서는 사람들 틈에서 똑같이 보조를 맞추며 물러선 기혁은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야지, 라는 생각으로, 마치 정찬에 올라온 음식을 고르듯 주위를 살피던 그때였다.
부르르.
바지 주머니에 끼워 뒀던 핸드폰이 울렸다.
“음?”
기혁이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니 익숙한 번호였다.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액정을 쓸어넘긴 뒤,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상대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흘러 나왔다. 단유는 몰래 이를 악물었다가 다시 힘을 풀고 대답했다.
“비겁한 녀석이로군. 고통에 찬 사람들의 비명이 너는 들리지 않는가?”
―뭐? 비겁?
“정정당당하게 싸우자. 애꿎은 사람들 희생시키지 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왜 내가 네가 유리한 쪽으로 싸워야 한단 말이지? 설마 너랑 나, 서로 마주 서서 주먹질이라도 하자는 거야? 나 참.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너 영화 되게 많이 봤나 봐? 그것도 청춘물로. 막 그런 로망이 있어? 서로 사이좋게 주먹 한 방씩 때리고 맞은 뒤에 악수하면서 화해하는 그런 거? 제발 어이없는 소리 좀 그만해라.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켜가며 싸우는 게 너의 방식인가?”
차가운 단유의 목소리에 기혁은 더 신이 나서 이죽거렸다.
―재수 없이 걸려든 거지. 누가 이런 곳에 오래? 됐고. 너 어디냐? 네 말대로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싶으면 너부터 얼굴을 내밀어. 아까는 서로 너무 조급해서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눴잖아? 우리 제대로 마주 보고 인사나 하자고. ‘정정당당’하게 말이야. 크큭.
“···그래. 그건 우리의 방식이 아니지.”
단유의 시선이 기혁의 뒤를 향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머뭇거리며 더 다가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망설이는 상미와 하은이 보였다. 지금도 위험할 정도로 가깝지만 더 가까이 다가오는 건 결코 바라지 않는 상황.
그런데 단유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선생님, 어떡해요?”
상미가 하은의 팔을 붙잡고 발을 굴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상미의 일그러진 표정. 하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개를 홱홱 돌리며 자신들 주위를 지나 달아나는 사람들 중에서도 단유가 보이지 않으니, 가슴이 타들어가는 심정이었다.
“단유야!”
하은은 단유의 이름을 크게 불러 외쳤다.
그 순간, 핸드폰을 들고 있던 기혁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의 시야에 하은이 담기는 순간, 단유 역시 그가 하은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기혁의 반사신경을 고려하면, 더는 머뭇거릴 수 없었다. 머뭇거려선 안 된다.
단유는 외쳤다.
“죽어!”
정신을 집중한 단유의 시계(視界)가 한없이 느려졌다. 그러나 반대로 단유의 머릿속에서는 수없이 복잡한 연산을 거쳐 포르마-아나그노리시-챕터로 이어지는 마법의 발현 과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이어 컨슈메(재현).
기혁이 들고 있던 핸드폰이 눈으로는 결코 쫓을 수 없는 속도로 분해되었다. 각각의 부품 단위로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근본적으로 이루는 가장 최소의 단위로. 아직 과학적으로 완벽히 정리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본원(本原)의 성질을 가진 최소의 단위이자 최초의 입자.
그렇게 잘게 쪼개진 입자들은 그들이 품고 있던 에너지를 토해냈다. 해체된 입자들과 에너지는 우주에 새겨진 법칙에 따라 새로운 결합을 시도했다. 빛으로, 소리(파동)로, 전자로, 원자로, 분자로. 그러나 결합에 성공할 확률은 극히 희박하니, 대부분은 결합을 이루지 못하고 우주의 대부분인 미결합 입자 상태로 흩어졌다. 하지만 해체와 결합의 과정이 동반한 물리적 현상은 충분히 파괴적이었다.
콰앙!
거대한 폭음과 폭발.
기혁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갈 즈음 발생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