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6)
-------------- 780/952 --------------
오랜만에 만난 명수는 자신을 마중 나온 가족들을 보고 입이 찢어져라 웃었고, 그 모습은 고스란히 공항에 나온 기자들의 카메라에 담겼다. 간단한 언론인터뷰를 마치고 한 편에서 비켜 서 있던 단유네에게로 다가온 명수는 한 사람씩 포옹을 하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너 완전히 영웅됐더라?”
“에이, 영웅은. 고작 2골 넣은 건데.”
“그 2골 때문에 스페인한테 이긴 거잖아. 여기 완전 난리 났었어.”
“얘가 그걸 모르겠니? 아마 그날 저녁에 핸드폰으로 지 이름으로 나온 기사는 다 찾아봤을걸?”
“상미 넌 나를 너무 잘 아는 거 같다.”
“됐고. 일단 나가자. 배 고프지?”
“조금? 어디 갈 건데?”
“오늘 날이 좋아서 다 같이 한강 공원 가자고 한 참인데, 너 갈 수 있어? 갈 수 있으면 거기서 배달음식 시켜놓고 먹으면 좋고.”
“야, 나 오늘 귀국했는데 귀국환영 음식이 배달음식이야?”
“싫어?”
“아니, 좋아. 짜장면은 꼭 시켜줘.”
****
명수는 대표팀 소집 해제 이전에 간단한 미팅이 있다고 해서 나중에 오기로 했고, 기다리겠다는 단유네를 먼저 보냈다.
뒷자리에 앉은 상미는 한강 공원으로 가는 동안 하은과 함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무엇을 시켜 먹을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평소라면 내심 흐뭇해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운전대를 잡지 않은 한 손은 몇 번이고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고픈 마음이었다.
“단유야.”
“응?”
“차 너무 빠른 거 아냐? 어차피 명수 오려면 시간 걸릴 텐데 천천히 가.”
상미의 말에 하은이 대꾸했다.
“뭐 어떠니, 도로에 차도 없는데. 조금 일찍 가서 자리 잡는 것도 나쁘진 않지.”
단유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모르게 속도를 냈나 봐요. 천천히 갈게요.”
그러면서 액셀 페달을 밟고 있던 발에 힘을 뺐다. 나란히 달리던 차들과 속도가 비슷해지니, 긴장하고 있던 상미의 얼굴에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그런 표정 변화가 룸미러를 통해 확연히 보이니 단유는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 마디했다.
“가서 뭐 먹을지 정했어?”
“아니,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 이것만 보고 있으니 저절로 결정 장애가 생기는 기분이야. 혹시 선생님은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명수 말대로 짜장면이나 시켜 먹는 게 속 편할 거 같단 생각도 드네?”
“에이, 그러면 너무 아쉽잖아요.”
상미의 손가락이 바쁘게 액정을 누비고 다녔다.
뒷좌석의 관심이 다시 음식으로 돌아간 틈에, 단유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더는 손이 방황하지 않도록, 이번에는 기어에 손을 딱 붙인 채로 운전했다.
****
점심 때가 거의 되었을 무렵, 세 사람은 한강 공원에 도착했다. 중간에 잠깐 도로에 차가 많아 조금 밀린 감도 있지만, 어쨌든 도착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안내센터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마자 상미가 호들갑을 떨었다.
“와, 날씨 좋다!”
하은이 웃으며 물었다.
“안 피곤해?”
“괜찮은데요? 여기서 밥 먹고 바람 좀 쐬다가 집에 들어가면 컨디션 완전 회복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사실 방송하느라고 원체 집 밖으로 나가지를 않다 보니 괜히 피부가 푸석푸석해진 것 같잖아요? 그래서 더 화장빨을 세웠는데, 시청자들은 점점 제 얼굴이 하얘지는 것 같다고 착각하더라고요. 아무튼 종종 이렇게 나와서 바람을 쐬어야지 안그러면 완전 폐인 되겠어요.”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이 그냥 집 앞 공원에라도 가면 되지.”
“마음은 그런데, 혼자 나가려니 괜히 좀, 네? 그런 거 있잖아요? 그냥 내키지 않고 그래서 잘 안 나가게 되더라고요.”
“게을러서 그래. 게을러서.”
“고쳐야죠. 헤헤. 가요, 선생님.”
상미는 하은의 팔짱을 끼고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주차를 끝낸 단유가 조용히 따라갔다.
공원을 찾은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여유는 화창한 날씨에 더해 보는 사람들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햇살에 반짝이는 한강의 물결과 그 위를 지나는 한강 수상택시는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했고, 그 위로 드넓게 펼쳐진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은 당장 핸드폰을 들어 찍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전경이었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 또한 공원을 찾은 사람들을 들뜨게 하는 요소 중 하나였고.
세 사람은 드넓게 펼쳐진 잔디밭 위 푸른 가지를 드리운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너 어디 전화 올 데라도 있어?”
단유는 핸드폰을 보고 있던 시선을 떼어냈다.
“응? 아니, 뭐···.”
상미는 짐짓 토라졌다는 듯 팔짱을 끼며 단유의 모습을 지적했다.
“근데 왜 계속 전화기를 들여다보는 거야? 평소에는 전화기가 어딨는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더니. 자, 자. 별일 없으면 우리 모두 전화는 깊이 넣어두고 즐깁시다! 좋잖아요? 네! 언제 또 이렇게 다 같이 나와보고 그래요? 네?”
그 말에 하은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게 다 너 때문인 걸 모르니? 밤낮이 바뀌어서 다들 바쁘게 돌아다닐 때, 집이 떠나가라 코 골면서 자는 애가.”
“어? 제가 코를 곤다고요? 에이, 선생님. 거짓말 하지 마요. 저 코 안 골아요.”
“안 골긴? 호빵이랑 패티가 너 코 고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고 그래.”
“단유야, 정말이야?”
단유는 잘 모르겠다는 투로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때였다. 단유는 뒷머리가 찌릿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래?”
저도 모르게 일그러뜨린 표정을 상미가 보고 물었다.
“아,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그래. 그럼 그동안 주문하고 있을게. 넌 뭐 먹을래?”
“아무거나.”
“아무거나라고 말하는 애가 제일 밉더라.”
“공항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메뉴 하나 정하지 못한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얼른 화장실에나 가.”
단유는 상미와 하은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최대한 여유롭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자리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등을 돌리자마자 단유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울리는 동안 단유의 눈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잔디밭에 앉은 가족들, 느릿느릿 산책을 즐기는 노부부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동호회 사람들.
잠시 후, 호텔을 지키고 있을 흥신소 사장이 전화를 받았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건가요?”
사장은 별일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러나 단유는 사장의 대답에서 평소와 다른 느낌을 받았다.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걸까?
“정말인가요?”
―거짓말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요구하신 대로 호텔 앞뒤에 사람을 배치해서 24시간 감시 중이니 느긋하게 기다리세요.
느긋할 수 없는 상황임을 모르기에 저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장이 말한 24시간이라는 표현이었다.
‘24시간.’
“지금 현재 호텔에 배치된 인원은 몇이나 되나요?”
“···당연히 4명이죠. 설마 저희가 사장님 돈 떼어먹겠습니까? 저희, 신용으로 장사하는 놈들입니다.”
분명 감시의 구멍이 생겼거나, 혹은 단유가 짐작하지 못하는 이유로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뒷목을 짜르르 울리던 감각이 좀 더 진해졌고, 그만큼 단유의 미간 사이에도 깊은 골이 생겼다. 좀 더 주의해서 살펴보지만 그가 찾고자 하는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그가 여기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흥신소 의뢰 상황은 더 추궁해봐야 의미가 없었다. 사장이 내뱉는 호언장담보다는 단유 본인이 느끼는 감각이 더 정확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단유는 빠르게 통화를 마무리한 후, 곧장 핸드폰으로 위치 추적을 실시했다. 여전히 핸드폰의 위치는 호텔로 나오고 있었지만 믿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화면이 바뀌며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단유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보세요?”
―여, 오랜만이야.
단유는 이를 악물었다.
****
“여기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네?”
기혁은 빈정대는 말투로 말을 건네며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앞에서 다소 초조한 얼굴로 슬쩍슬쩍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행동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세상 참 좋아. 돈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거든.”
핸드폰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기혁은 그저 즐거웠다.
“어떻게 내 뒤통수라도 치고 싶어서 안달이었을 텐데 말이야.”
오히려 기혁이 상대의 뒤를 칠 수 있게 된, 이 기막힌 상황을 뽐내며 설명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단유가 놓친 단 한 가지는, 기혁이란 사내가 가진 경험이었다. 머리로 익힌 지식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개인의 경험이 낳은 지혜를 무시할 순 없는 법이다.
기혁은 오래 전부터 호텔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살았다. 단지 호텔이 편하기 때문에?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왔던 기혁은 절대적으로 안전한 아지트란 없다는 것을 보았다. 상대 조직의 급습으로 당한 동료들을 숱하게 보았고, 자신도 그런 식으로 상대가 머문 집을 불태운 적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한 곳에 정착한다는 것이 절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돈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에도 기혁은 여관을 오가며 다녔고, 신화파의 간부가 된 이후로는 호텔을 전전하며 생활해 왔다.
그런 생활의 연장선에서 기혁은 차나 카드, 심지어 핸드폰까지 자신의 명의로 된 것을 만들지 않고 살아왔다. 요컨대 자신의 뒤를 추적할 만한 흔적을 되도록 남기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남들이 잘 모르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을 남발할 수 없는 바에야 철저히 준비하고 조심하는 길만이 오래 살아남는 비법이었다.
그런 생활이 가져다 준 또 다른 습관이라면 수시로 주위를 살피며 특이점을 찾는 것이라 하겠다.
“사실은 그게 내가 적들을 상대할 때 쓰는 방법이거든. 상대를 추적하고 상대의 빈틈을 찾은 뒤, 상대가 방심하는 순간 딱!”
그런 경험들이 있으니 거꾸로 자신도 그렇게 당할 수 있음을 주의하며 대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습관이 이번에 빛을 발했다. 자신이 머문 호텔 주변에서 떠나지 않고 자신을 지켜보는 상대를 발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기혁도 나름 전문가라면 전문가인데, 저렇게 엉성하게 감시하는 자들을 발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형사들이라면 조를 이루어 함께 감시할 텐데, 저들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단독 감시 형태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을 발견하고 기혁이 취한 조치는 우습게도 심부름센터, 즉 흥신소였다.
“서울에만 흥신소가 몇 갠 줄 알아? 하지만 걔들이 다 똑같지가 않아요. 그냥 돈만 축내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비용은 좀 들어도 정말 솜씨 좋은 애들이 있거든. 그런 애들은 신용 장사하는 놈들이라 쉽게 거래선을 트지 않아 이용하기가 어려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네가 어설프게 의뢰한 덕에 내가 이렇게 네 뒤통수를 때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지. 그러니까 앞으로는 잘 알고 사용하라고. 물론 앞으로의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만.”
단유가 어설프게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기혁의 위치를 추정하는 사이, 기혁은 이미 흥신소를 이용해 단유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경찰 쪽에 닿은 선을 이용해 단유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중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만나니까 기분이 좋네. 여기 어때? 좋지? 사람들도 많고 말이야. 사고 치기 딱 좋은 날이야. 안 그래?”
―허튼 짓이라도 했다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다.
“허세는 그만 떨어. 물론 네 능력이 꽤 두려울 정도긴 하지만 나도 한 성격 하거든? 계속 자극했다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무엇보다, 내 시야에 닿는 한은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해.”
단유는 자신이 서툴렀음을 인정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런 상념으로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빨리 그를 찾아야···.
―아, 그런데 말이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어.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 하는가 의문이 드는 사이, 기혁의 말이 이어졌다.
―너, 나 보이냐? 분명 이 근처라고 했는데···아, 거기 있네? 안녕?
그 순간 단유도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사내를 발견했다. 그리고 동시에 머릿속에서 위험신호가 댕댕 울리며 온몸의 근육이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다. 기혁의 시야에 단유가 들어왔다는 말은···.
‘제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단유는 순간 이동을 선택했고, 동시에 단유가 있던 자리에 불꽃이 화르륵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다시 단유가 나타난 곳은 기혁의 바로 앞. 그러나 기혁의 웃음을 보는 순간, 단유는 다시 순간 이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 빠른 선택이 또 한 번 단유의 목숨을 살렸다.
‘이제는 감출 생각이 없다는 건가?’
단유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사내가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끝장은 봐야지 않겠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기혁의 뒤를 쫓아오던 한 남자, 그저 핸드폰을 돌려받길 원했을 뿐인데 불행히도 기혁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던 탓에 그는 첫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갑자기 몸에 붙은 불길에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본 단유는 이를 악물었다. 기혁을 끌고 순간이동으로 장소를 옮기려던 계획이었는데, 기혁은 생각보다 더 빠른 반응속도로 단유를 위협했고, 단유가 틈을 보이니 곧바로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불이야!”
비명을 내지르는 사람들과 핸드폰으로 119로 신고를 하려는 사람들 속으로 태연히 걸어 들어가는 기혁의 모습을 바라보며, 숨어서 기회를 노리던 단유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물 소환 마법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