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779화 (779/956)

정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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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서울의 하늘이 유난히 맑았고, 하늘을 담은 듯 푸른 강물은 보기만해도 시원해질 정도였다.

그 탓일까? 유독 오늘따라 한강 공원에 사람이 많이 모였다. 풀밭에 자리 잡고 앉아 쉬는 사람들, 그 뒤로 자전거 전용도로를 따라 줄지어 자전거하이킹을 즐기는 사람들도 신이 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모두가 영화 속 스틸컷에 나오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진 않았다. 몇몇은 화장실을 핑계로 빠져나와 공원 뒤, ‘으슥하다’고 생각되는 그늘 속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물고 타르와 니코틴을 충전하고 있었다. 처음에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아내의 등쌀에 밀려 안락한 소파에 눕는 대신 들뜬 아이들을 대동하고 공원에 나온 지친 가장이 잠시 빠져 나와 머물렀을 수도 있고, 친구들과 피시방을 가는 대신 썸타는 그녀와의 로맨스를 꿈꾸며 데이트를 나섰지만 바람을 맞은 한 청춘이 타는 속을 달래려 머물렀던 자리일지도 모른다.

무지 티셔츠를 입은 이십 대 후반의 사내와 기능성 소재의 셔츠를 걸친 장년의 사내가, 마치 수색 나온 군인들처럼 각자 다른 방향을 살피며 열심히 담배만 태울 뿐인 그곳에 검은 셔츠에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음산한 기운을 뿜어대는 사내가 다가왔다.

다른 방향을 바라보다 우연히 사내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불의의 사고를 피하고자 얼른 눈을 돌렸지만 사내는 곧장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남자는 아직 반쯤 남은 담배를 얼른 비벼 끄고 자리를 피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고민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검은 모자가 도착했다.

제발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이곳은 옆 사람과 통성명이나 피곤한 대화는 하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곳이란 말이야, 라는 저항은 무의미했다.

“담배 하나만 빌려 줘요.”

아, 유일하게 허락된 의사 표현이 바로 그것임을 잠시 잊었다. 그리고 상대가 앞서와 같이 말을 건네면, 없던 동지애를 발휘해 요구를 들어주는 게 도리였다.

“여기요.”

담배곽에서 귀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건넸다. 건네받는 손이 대충 보아도 꽤 험해 보이는 건 단지 인상 탓일까?

담배를 입에 물고 남자를 빤히 바라보는 검은 모자의 모습에 숙어 외우듯 자연스럽게 입에 붙은 말이 튀어나왔다.

“불도 빌려드릴까요?”

이건 사실 친절이었다. 보통은 담배를 빌리는 사내가 먼저 물어보는 말이지, 빌려주는 이가 묻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이런 친절을 먼저 내보인 건, 자신이 그만큼 선량하고 우호적이니 부디 예상치 못한 행동이나 말은 삼가달란 뜻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검은 모자는 남자의 친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던 모양이었다.

“핸드폰 좀 잠시 빌립시다.”

“폰이요?”

검은 모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담배를 문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은 것 같은데 담배에 불이 붙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것을 의식할 틈은 없었다. 호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빼야 하나 말아야 하나, 라는 사소한 내적 갈등이 다른 곳에 신경을 돌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또한 바로 옆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던 기능성 소재 셔츠의 중년인이 어느새 담배를 피웠는지―자기보다 늦게 왔었기에 분명 자신보다 더 긴 담배를 물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재떨이 같은 쓰레기통에 장초를 비벼 끄고 달아나려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좀 빌립시다.”

다소 톤이 올라갔다고 느낀 건 분명 착각이 아닐 것이다. 아주 잠시 눈을 돌렸던 게 티가 났는지는 몰라도 검은 모자의 말에 남자는 정신이 돌아왔다. 주춤거리다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 한 마디만 들어도 안심이 될 것 같은데, 검은 모자는 묵묵히 폰을 건네받고는 익숙하게 버튼을 눌러 어딘가로 통화를 시도할 뿐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데도 속이 답답했다.

****

기혁의 위치를 확인한 단유는 곧바로 그가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호텔 근처로 이동했다. 미리 CCTV로 사람들의 시선에서 비껴난 외진 장소를 봐놨기에 능력을 사용함에 있어 문제는 없었다. 다만 호텔에서 좀 많이 떨어진 장소라 거기서부터는 도보로 접근해야 했다.

조금 걱정되는 건, 과연 상대가 단유의 접근을 어디까지 접근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차라리 지난번처럼 멀리서 지켜보는 게 좋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단유는 주변의 건물들을 살폈다. 아쉽게도 그리 높은 건물은 없었지만, 차라리 그게 더 호텔 입구를 살피기에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적당한 5층짜리 상가 건물 옥상에 자리를 잡은 단유는 우선 집에 들러 망원경을 챙겨 돌아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첩보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을 따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모습이었다.

노트북을 펼쳐두고 화면에 주위 CCTV의 화면을 주기적으로 검색하는 것과 동시에 호텔 입구를 관찰했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상대를 특정하기에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제 문제는 단지 얼마나 걸릴지 모를 시간과의 싸움 뿐, 이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아, 지하 주차장.’

호텔에서 나오는 방법은 정문 뿐 아니라 지하 주차장을 통해 나오는 방법도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너무 당연한 건데도 잠시 잊고 있었던 건 단유가 여전히 평소처럼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방증이었다. 그리고 생각을 이어나가면, 호텔 정문이 아닌 후문 혹은 직원들이 드나드는 또 다른 출구로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단유가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굳이 그렇게 어려운 방식을 선택하겠냐는 의문이 들지만, 그런 선택지를 제외하더라도 당장 단유가 살펴야 할 곳은 정문과 후문, 그리고 지하주차장이라는 선택지가 남게 된다.

‘이런.’

단유는 이마를 짚으며 다시 계획을 수정했다. 만약 운이 좋아 그가 정문으로 나오기만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단유가 가장 바라는 것은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단유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프로그램을 통해 지금처럼 통화 시에 상대의 핸드폰이 무선 기지국에 신호를 보내는 순간을 포착해낼 수 있었다. 이것을 좀 더 개선하는 방법은 없을까?

‘무선 기지국을 해킹할 수 있을까?’

통합관제센터의 CCTV를 해킹하기 위한 기능이 포함된 프로그램을 조금 손보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지국 해킹과 그곳으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한 정확한 프로토콜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소요되는 시간이란 게 있다. 얼마나 걸릴지는 직접 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으니, 계속 머릿속에 충돌이 일어난다. 새로 프로그램을 뜯어 고치기 위해 들일 시간에 차라리 여기서 좀 더 분주하게 발품을 팔며 돌아다니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드는 것이다. 괜히 시간을 질질 끌면서 스트레스 받는 이 상황을 오래 유지하고 싶지 않다는 게 단유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를 놓치게 되면 그게 더 큰 손해로 다가올 수도 있으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결국 단유는 인정해야 했다. 이 문제는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단유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흥신소에 도움을 빌기로 했다. 마침 상대는 기혁의 몽타주를 기억하고 있으니 그를 감시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돈만 맞으면 어렵지 않죠.”

감시를 부탁한다는 이야기에 자신들이 그런 일에 특화되었다며 자랑하는 흥신소였다.

“그래도 사장님은 양반이십니다. 어떤 분들은 좀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하는 지는 듣지 않기로 했다. 단유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늦지 않게 발견해내는 것 뿐이었다.

“더 쉽네요. 그냥 여기 주변에 애들 좀 깔아두고 지켜만 보면 되는 일 아닙니까? 대신 사람을 많이 쓰면 쓸수록 비용이 커집니다만.”

누차 말했지만 비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단유의 발언은 흥신소 사장의 입꼬리를 광대 끝까지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사람을 고용한 덕에 시간을 번 단유는 이를 프로그램 수정하는 데 썼다. 지난 번처럼 밤을 새가며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최대한 빠르게 기능하도록 만드는 데 초점을 뒀다. 지난 번의 작업이 도움이 된 탓인지, 단유는 밤을 새지 않고도 3일 만에 프로그램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성과에도 불구하도 단유는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3일이라는 시간 동안 흥신소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받을 수 없었다는 것과 기혁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적으로 상정한 상대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모른 채 무작정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이 단유의 불만이었고, 그 불만을 해결할 방법이 마땅히 없다는 것이 더 큰 스트레스로 찾아왔다.

하지만 그 사이, 단유는 상미와 하은의 외출금지를 해제했다.

“이제 괜찮은 거니?”

“네.”

“다행이네.”

“그동안 협조해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니까, 네가 무슨 공무원이라도 된 것 같다야. 협조는 무슨 협조야?”

“그런가요?”

하은 앞에서만큼은 쑥스러워하는 감정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단유였다. 하은은 그런 단유가 귀여워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기엔 제가 이제 너무 큰 것 같지 않나요?”

“네가 나보다 컸던 건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아니었나? 그리고 니가 아무리 커도 나한테는 여전히 10살의 코찔찔이 꼬마애야. 귀여운 구석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던 꼬마. 너 기억나니? 내가 너 처음 봤을 때 말이야···.”

단유는 이야기가 길어지려는 것을 막으며 얼른 하은의 외출을 도왔다.

“학원으로 가실 거죠?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일이 많이 밀렸을 거야. 전화로 대충 이야기는 했지만, 아마 오늘 가면 얼마나 엉망일지 가늠이 안 된다. 사람들한테는 뭐라 그런담?”

“제 핑계 대시면 되죠.”

“네 핑계를 왜 대? 됐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넌 어떡할래?”

“전 병원에 잠시 들렀다가 일 좀 보고, 그리고 들어올게요.”

“이제 집에 꼬박꼬박 들어오는 거야?”

“그럴게요.”

“들어와서 상미랑 좀 놀아주고 그래. 심심해 죽으려고 해.”

“상미야 컴퓨터만 있으면 되는데요. 그리고 이제 완전히 밤낮이 바뀌어서 같이 어울릴 시간도 없고요.”

“그래도 저녁에 깨어서 불 꺼진 거실 보면 걔도 많이 심란할 거야. 나 같으면 진작 우울증에 걸렸을 거야.”

“상미가 우울증에요?”

그럴 리가 있겠냐는 단유의 물음에 하은도 잠시 생각하는 척 하더니 이내 단유의 의견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그럴 리는 없나? 그래도 여자는 예민한 동물이라 너처럼 마냥 무덤덤할 순 없어. 내가 봐주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친구인 네가 어울려 주는 거랑은 같을 수 없지 않겠니?”

“그런 건 명수가 해야죠.”

“아, 명수 오늘 들어오지?”

“네.”

“가만, 그러고 보니 걔 배웅하러 가야 하나?”

“그럴 필요 있어요? 어차피 입국하면 바로 지네 구단으로 갈 텐데.”

“그래도 가족이 맞이해주는 거랑은 또 다르지. 그리고 걔 내년에 해외로 갈지도 모른다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에이전트에서 그렇게 추진 중이라는 말은 들었어요. 나중에 결정되면 명수가 먼저 이야기해 주겠죠.”

“그건 그거고, 음. 시간이···괜찮을 거 같은데. 우선 공항 가서 명수 한 번 보고, 그리고 나서 학원 가도 괜찮겠지? 뭐 어때. 내 학원인데. 그치? 이미 며칠을 쉬었는데 반나절 더 쉰다고 뭐 문제 있겠어?”

“처음에는 엉망일 거 같다고 걱정하시더니?”

“그건 그거고. 너도 시간 괜찮지?”

“뭐, 괜찮을 거예요.”

여전히 흥신소로부터 연락은 없었고, 핸드폰은 3일째 조용할 뿐이었다. 만약 공항에 간 사이 무슨 문제가 있어도 핑계를 대고 빠져나오는 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저도 가요.”

마침 상미의 방문이 열리며, 풀 셋팅(?)이 끝난 상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는 거 아니었어?”

“오늘 명수 오잖아. 방송 좀 늦게까지 하면서 안 자고 기다렸지.”

“자기 서방 본다고 단장했네, 우리 상미.”

“서방은 무슨 서방이에요. 못된 놈인데 그래도 미운 정이라고 가는 거지. 그리고 어제 몇 시 입국이라고 메시지까지 남겼더라고요. 안 가면 삐쳐서는 앞으로가 고될 것 같더라고요.”

“어이구, 명수가 삐쳐? 그럼 안 되지. 아, 생각만 해도 괴롭다, 괴로워.”

“그래서 가려고요. 선생님은 준비하셔야 되죠?”

“어, 빨리 준비 끝내고 나올게.”

하은이 욕실로 씻으러 들어간 틈에 상미가 거실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우, 눈부시다.”

“원래 아침 햇살은 눈부신 거야.”

“오늘 날씨 되게 좋은 거 같은데?”

“오늘 나들이하기 딱 좋은 날씨라더라. 안 피곤해?”

“괜찮아. 오늘은 방송도 없으니까, 좀 늦게까지 깨어 있어도 괜찮아. 나중에 푹 자면 되니까.”

“건강 신경 써.”

“잔소리는. 됐어. 너는? 그냥 그대로 나갈 거야?”

“뭐 어때?”

“그래. 너야 늘 그렇지. 아, 오늘 날 좋으면 우리 같이 놀러 가지 않을래?”

“안 되겠는데.”

“야, 너 너무 매정한 거 아냐? 최소한 어디로 놀러 갈 건지 물어나 봐주지.”

“바빠서.”

“요새 왜 그렇게 바쁘대. 진짜 큰 문제라도 있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

“멀리 가자는 건 아니고, 저기 한강 공원 있잖아? 저기 잠깐 가자. 저기서 볕 좀 쬐면 기분 좋을 것 같지 않아?”

“둘이 가.”

“그냥 같이 가.”

“···봐서.”

“오케이 한 거다?”

마침 단장을 마친 하은이 나왔다. 세 사람은 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명수를 맞이하기 위해 공항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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