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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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자신에게 벌어지는 나쁜 일들이 차라리 여름철 장마처럼 한꺼번에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 대한민국 한해 강수량의 대부분이 6, 7월에 집중되어 쏟아지는 것처럼, 나쁜 일들도 한꺼번에 몰려 들어왔으면 하는 생각.
새벽에게 양해를 구한 뒤,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핸드폰을 한 손으로 감싼 채 병실을 나왔다.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기혁이 특유의 능글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물었다.
―아직도 병원이야? 걱정도 팔자군. 니가 걱정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안심하라고.
절대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상대의 호언장담은 그저 불쾌할 뿐이었다. 인상을 쓴 단유는 빠르게 스마트폰을 조작하여 해킹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 그리고 단유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는데, 1인 병실이 있는 복도임에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침 회진 시간이 갓 지난 탓일지도 모르겠다. 보호자들이나 혹은 가벼운 운동을 원하는 환자들 때문에 은밀히 움직이긴 어려워 보였다. 단유는 걸음을 옮기며 통화를 계속 했다.
“어디지?”
―여기? 한국이야. 아직은.
“아직? 해외로 떠날 셈인가?”
―왜? 내가 떠나면 아쉬울 것 같아?
“그래. 많이 아쉬울 거다. 새벽에게 한 짓과 똑같이 되돌려줘야 하는데 도망간다고 하니 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네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거야.”
―아, 나 그 대사 들어봤다. 그거 무슨 영화에 나오는 대사 아냐? 영화는 안 봤는데, 인터넷에서 본 기억은 나네.
잠깐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액정에 뜬 프로그램 작동 상태를 살폈는데, 아직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좀 더 시간이 걸리나 보다. 이전에 테스트를 해보지 않아서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아보지 못했던 게 진짜 ‘아쉬운’ 순간이었다.
비상구의 문을 열고 비상계단으로 나온 단유는 계단을 오르며 대꾸했다.
“하지만 너한테는 그게 방법일 수 있을 거야. 만약 국내에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찾아낼 거니까. 그리고 니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순간, 당장 찾아갈 거야. 너도 알겠지만, 네 위치만 알면 끝이야.”
―아, 정말 부러운 능력이야. 그런 힘이 있었다면 세계 최고의 도둑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니겠지? 혹시 그 힘을 사용해서 도둑질은 해 본 적 있어?
“난 너 같은 사람이 아니다.”
―나 같은 사람?
“앞뒤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는 사람. 사회의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보는 사람.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
―워워, 적당히 해. 상처받는다고.
“그래서, 아직 한국이라는 말인가?”
―그래. 그리고 한국을 떠날 생각도 없고. 내가 너처럼 가방끈이 길어서 영어라도 잘했다면 모르겠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할 줄 아는 말이 한국말밖에 없어. 그리고 다들 한국이 살기 좋대 잖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왕 노릇하며 살 수 있는 곳인데. 그래서 계속 한국에 있으려고.
“신 노릇, 왕 노릇 하며 살고 싶은 게 네 소원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최대한 오래, 그리고 길게, 그리고 편안하게 사는 게 소원이라고 할 수 있지. 사실 신 노릇? 할 필요도 없어. 하지만 이왕이면 아무도 건들지 못하는 게 좋잖아? 자유롭게, 내가 꼴리는 대로 다 하고 사는 거. 아무도 날 무시하지 못하고. 너도 그렇잖아?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살고 싶어 하잖아.
핸드폰에 나타난 표시를 보니 이제 몇십 초 후면 위치가 정확히 특정될 수 있을 거라고 나왔다.
“유아독존이란 말이 있다. 가끔 정신이 나갔거나 자아가 미성숙한 이들이 이 말을 개별적 존재로서 자신이 만인의 위에 있다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네가 딱 그 꼴이다. 우월감에 도취되어 타인을 깔보고 존중할 줄 모르는 너 같은 이가 결국 어떤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는 역사적으로 수차례 증명된 바가 있다. 어떤 이는 독재자의 자리에 올라 수백 만명의 희생을 요구했었지만, 결코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어쩌면 너에게도 어울릴지 모르겠다. 내가 너를 찾기 전에 스스로 자결한다면, 네가 한 짓에 대해 완벽히 용서는 못 해주더라도 눈감아 줄 용의는 있다.”
―아, 몰라. 어려워. 무슨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하냐?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배운 놈이라고 배운 척 하겠다는 거야?
상대의 목소리가 다소 격앙된 듯이 들렸다. 반면 단유는 이전과 달리 차분하게 응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역시 마음가짐이 달라진 탓이리라.
옥상까지 올라온 단유는 핸드폰에 위치가 뜬 것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그러는 너는 못 배운 티를 내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거고?”
―와, 이 새끼. 혀에 기름칠을 했나? 지난번에는 무슨 로봇처럼 죽이겠다고 협박만 하더니, 왜 갑자기 이래?
“너 같은 이를 만나보지 못해서 이리저리 휘둘렸다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핸드폰에 뜬 위치를 정확히 검색하고, 그 주변의 CCTV를 불러와 현장을 둘러보았다. 서울에 위치한 한 호텔이었는데, 중심가는 아니더라도 주변에 오가는 사람은 많아 보였다. 기혁은 바로 그 호텔 내 객실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야, 막말로 내가 너한테 뭘 했냐?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녀석 죽이지 않은 것만도 고맙게 생각해야 할 처지 아냐? 내가 작정하고 손을 썼다면 그 꼬마 새끼는 이미 숯덩이가 돼서 시체안치소에 있어야 했어.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를 뻔했지만, 단유는 애써 누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당장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게 되었지만, 정확히 몇 층 몇 호실에 있는가는 알아내지 못했다.
여기서 섣불리 그 호텔로 이동했다가는 상대가 눈치를 챌 수도 있으니 그의 감각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상대를 지켜보다가 덮치는 방법을 써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이전에 극장에서 벌어졌던 사고를 능가하는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더 대화가 필요 없을 거 같다. 부디 아무 짓도 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라. 그리고 남아 있는 마지막 시간을 부디 반성하며 지내고 있길 바란다.”
―풋, 마지막 뭐?
단유는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CCTV의 화면을 살피며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잠시 후, 옥상에서 단유의 모습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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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주위의 상황을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것은 본능적인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사람은 통제력을 가지길 희망하고 갈망한다.
주위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서 통제력을 획득하려 하거나 혹은 상황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는 대신, 상황에 대한 이해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만족하는 경우가 있다.
통제하거나, 혹은 통제되지 않거나.
기혁은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만드는 것에 만족하던 이였다. 직접 조종하는 것보다, 조종당하지 않는 상황을 만드는 것에 더 집중했었다. 그것이 자신을 더욱 안전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트라우마는 차치하고, 그가 힘을 얻은 이후에도 그의 통제력은 오롯이 벽을 세우고 자신만의 영역 내에서 자유로움을 즐겼다. 좋게 표현하면 말이다.
그러나 40에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마주친 적 없던, 자신과 같은 초월적인 힘을 가진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자 그의 자유, 통제력은 시험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제껏 그래왔듯이, 위협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영역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 그러나 상대는 생각보다 더 강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가볍게 생각하고 취했던 조치가 그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고 두 사람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수준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했으나, 그것 역시 패착이 되었다. 아니 패착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덕분에 상대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기혁은 상대를 떠보기로 결심했다. 상대는 고작해야 이십대 중반의 나이. 비록 서울대를 나왔다지만, 고작해야 교과서만 파고들던 범생이 수준의 꼬마일 뿐이었다. 반면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뒷골목에서 자라며 숱한 아수라장을 거쳐 살아난 사람이었다. 그의 힘이 분명 도움은 되었지만, 그 덕에 얻게 된 위기 관리 능력과 생존력은 부잣집 도련님, 혹은 모범생 스타일의 샌님이 따라오기 힘든 능력이라고 판단했다.
비록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가벼운 도발에 부들부들거리던 녀석의 목소리는 기혁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잘만 하면 그가 가진 힘으로 녀석을 제거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다만 지금까지 그랬듯 느슨하게 대처해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도 있었다. 이제까지는 상대했던 대부분이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일반인’이었으니까 조금 느슨하게 대처하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더구나 많은 경험을 쌓으며 노련해진 이후에는 더더욱 위기를 느낄 만한 상황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상대는 진심으로 두려울 정도의 능력을 가진 이였다. 만약 자신이 그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 자신을 상대할까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다양한 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정말 다른 거 하나 없이 양파나 자르는 부엌칼만 들고도 자신의 뒤에서 나타나 등을 찌르고 사라져버리면 속수무책인 상황이 연출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지난 일주일간 거기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안 쓰던 머리를 억지로 굴리며 애를 썼다. 그가 뜬금없이 나타나 그의 손에 붙잡혀 있던 남자를 빼돌릴 때의 상황을 수십 번 돌아보며 그 정도 타이밍에도 당하지 않을 수 있게 감각을 벼렸다. 생각을 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도록 연습도 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전개 시킬 수 있게 장소를 찾아 헤맸다.
몇 번의 통화에서 얻은 정보로, 그가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지만 그의 능력이 밝혀지는 것은 굉장히 꺼려한다는 것을 짐작해냈고, 또 그가 ‘예상외’로 도덕적인 선을 지키려는 강박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단유라는 사내에 대해 추정해낸 정보들을 토대로, 기혁은 그와 싸우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냈다. 그가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꺼려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간단히 명동 가운데에서 판을 벌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테다.
‘괜찮은데?’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 가운데 몸을 묻어두면, 과연 그가 자신을 찾아 순간이동으로 급습하는 것이 가능할까? 게다가 곳곳에 설치된 CCTV와 사람들의 시선이 교차하는 장소인데?
다만 걱정되는 건, 자기 역시 그런 장소에서는 민첩하게 반응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로 인해 아무리 예민하게 벼린 감각도 둔해질 수 있고, 자칫 자신이 틈을 보이게 되면 그가 무리해서 자신을 능력을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 기혁은 그런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지난 일주일간 단유와 대적할 장소를 찾기 위해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흠, 여기 괜찮은데?’
적당히 사람들로 붐비면서도 트여있는 장소라 주위를 살피기 좋다. 게다가 여차하면 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장소.
주위를 둘러보니 둘 셋씩 짝지어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고, 잔디밭에 앉아서 피크닉을 즐기는 이들도 있었다. 조금 거리는 있지만, 자신이 조금 무리하면 얼마든지 불을 지를 수 있는 고층 아파트도 가까이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유도하기도 나쁘지 않고.
기혁은 눈을 감았다. 유유히 불어오는 강바람이 늦여름의 더위를 식혀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곳, 바로 잠원한강공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