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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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뭐 하슈?”
뜨끔한 큰형님은 뒷목에서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챙길 게 그리 많아요? 좀 도와드릴까?”
“아, 아니다. 다 챙겼어.”
“얼른 챙겨서 나오시오. 그놈이 다시 여기 올지도 모르는데 빨리 정리해야지.”
“어, 그, 그래.”
돈을 가방에 넣는 척 총을 빼돌린 큰형님은 벨트 뒤로 총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려니 긴장하느라 잊고 있던 어깨의 통증이 다시 찾아와 절로 신음이 나왔다.
“거 참. 가방은 이리 주쇼. 들어드릴게.”
“······.”
“뭐해요, 달라니까.”
긴장한 큰형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기혁의 눈은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무감각한 시선이 되레 그 속을 의심케 만들었다. 당장 그의 말을 들어줄 수도,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인데 큰형님은 선뜻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곤란했다.
“왜요? 내가 그거 들고 튈까봐 겁이라도 나는 거요? 형님, 제가 언제 돈 욕심 낸 적 있수? 큰형님이 그 자리에 오르도록 도운 게 누구였는지 있었수? 지난 몇 년동안 용돈 받으며 살았던 게 나요. 그동안 내가 어디 불만 한 마디라도 한 적 있었소? 없었잖아요? 응?”
불만을 내비칠 빌미를 아예 주지 않았던 지난날의 노력이 허사가 된 느낌이었다. 사실 그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도록 추대했던 이유가 그저 기혁의 게으름과 편의 때문임을 모르지 않지만, 이를 언급할 수는 없었다. 불만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라, 불에 탄 숯덩이가 되고 싶지 않다는 문제였으니까. 그래서 그때는 선택을 한 것이다. 기혁이 만들어놓은 난장판을 정리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조직을 이끌며 상부상조하는 선택을. 일생일대의 선택이었고, 얼마 전까지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기혁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목표가 그리 상충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큰형님은 다시 한번 일생일대의 선택을 해야 할 기로에 놓였다.
“자.”
큰 형님은 묵직한 가방을 기혁에게 내밀었다. 어깨가 아파서 가방을 든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혁은 딴생각은 전혀 없다는 듯 처음과 똑같은 표정으로 큰형님이 건넨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우선 병원부터 갑시다.”
“아무 병원이나 갈 순 없다. 자칫 다른 조직에 소문이 날 수 있어.”
“풋, 설마 이런 일을 당하고도 다른 조직에서 모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기혁의 말처럼, 비밀로 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선택을 했다. 사무실에 올라오기 전까지는 당장 돈 들고 튀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조금 전 선택을 강요받은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조금 더 기혁을 믿기로 선택했다. 즉, 조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무력으로 기혁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손에 든 돈가방이 기혁에게 넘어간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껏 고생했던 것이 모래성처럼 부서진다는 게 아쉽다고 느끼는 변덕스런 감정이 선택을 종용했다. 기혁이 자신을 계속 지지해 준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도 선택을 하는 데 기여했다.
선택한 이상, 이제는 좀 더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끌고 나가야 한다. 그것은 이제껏 큰형님이 해 왔던 일이었고, 지금까지는 성공적인 편이었다.
“네가 도와만 준다면, 충분히 재기할 수 있다. 죽은 애들도 없고, 저런 부상 쯤이야 다른 조직과 전쟁하다 다친 것과 비교하면 양호한 편 아니겠냐? 얼마간은 피해가 있겠지만, 금방 되찾을 수 있을 거다.”
큰형님의 야심에 기혁은 웃음을 흘렸다.
“역시 큰형님이십니다.”
기혁은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큰형님을 바라보았다.
“거기 숨겨놓은 총만 없었다면 나도 마음이 동했을 거요.”
큰형님의 얼굴이 핼쓱해지며 반사적으로 총에 손을 가져갔다.
“어어.”
“아니다, 오해야. 이건, 혹시 그놈이 다시 오면, 그러니까 방어를 위해서···.”
“주절주절, 다급하죠? 핑계가 안 먹힐 거 같지 않아요?”
“정말이다.”
“누굴 바보로 아시나.”
피식 웃는 기혁의 모습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느낌이 들었고 큰형님은 이제껏 단 한번도 지금만큼 빠르게 움직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총을 뽑아 기혁을 겨눴다.
그러나 동시에 큰형님은 비명을 지르며 총을 떨어뜨려야 했다. 팔을 휘저으며 손에 붙은 불을 꺼보려 했지만, 마치 피부에 접착제라도 발라놓은 듯 들러붙은 불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에휴. 하여튼 욕심이 사람을 망친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기혁은 짝다리를 짚고 살풀이 굿이라도 하는 무당처럼 격렬하게 손을 휘젓는 큰형님을 바라보았다.
“기회를 두 번이나 줬잖아요? 근데 왜 그 기회를 발로 차고 그래요.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라고. 괜히 사람 섭섭하게 만들어서는 기분 울적하게 만드네.”
“부, 불 좀! 제발! 뜨거워! 뜨겁다고!”
“아쉬워요. 우리, 꽤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알았어! 제발, 불 좀!”
“그래도 그간 정이 있는데, 형님이 애들처럼 울면서 지리는 꼴은 보지 못하겠네. 그동안 고마웠소.”
손가락을 튕기자 손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불길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번지며 고통에 찬 비명까지 삼켜버렸다.
잠시 후, 사무실을 나와 어두운 거리를 걸어나가는 기혁의 뒤로 검은 연기로 뒤덮인 건물이 불타올랐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를 배경 삼아 기혁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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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병실에서 아침을 맞이한 단유는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뉴스로 화재 소식을 접했다. 다수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뉴스를 들으며 단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핸드폰에 대고 물었다.
“네 짓이야?”
―선물이야.
웃음기가 배어있는 듯한 상대의 목소리에 짜증이 솟구쳤다.
―야, 만약 그대로 신고가 들어갔어 봐? 일이 되게 복잡해지고 어쩌면 너한테도 별로 좋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아, 물론 네가 증거 따위를 남겼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하지만, 요즘 워낙에 기술이 좋아져서 말이지. 과학기술이란 게 생각보다 발전이 빠르더라고. 다행히 주변에 CCTV는 없어서 일을 조용히 마무리하기엔 좋았어.
다시 한번 이 자가 걸어 다니는 폭탄, 아니 화염방사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테러리스트? 그마저도 과분한 호칭이다. 그냥 미친놈이다.
―감동 먹은 모양인데, 어때? 그동안 생각은 많이 해봤어?
“무슨 생각?”
―새벽에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에 대해서 말이야. 내 제안, 아니 내가 제안했었나? 아, 못했구나. 갑자기 통화가 종료된 바람에 말이지. 이 참에 제안하지. 김단유.
“이름 부르지 마. 내 이름이 더러워지는 기분이야.”
―감성적인 친구였네? 아무튼, 너, 나랑 손잡자.
“···손잡고 사업이라도 하자고? 네가 이제껏 해왔던 더러운 일들을 하기 위해 이렇게 판을 벌리는 건가?”
―두 가지를 우선 짚고 넘어가지. 첫째, 더러운 일은 내 의지로 한 게 아냐. 네가 어깨에 구멍을 냈던 큰형님이 내게 시켰던 일이지. 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몸이었거든. 둘째, 내가 하는 말을 넘겨짚으며 말을 자르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나, 생각보다 게으르고 예상 밖에 제멋대로인 녀석이거든.
굳이 그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제멋대로인 것은 진작에 알아봤다. 단유가 튀어나오려는 욕을 애써 삼키는 동안 기혁의 말이 이어졌다.
―손잡자는 말은 한 편이 되자는 거야. 싸우지 말자고. 우리가 싸워봐야 남는 게 뭐 있어? 서로 피곤하기만 할 뿐이지. 보니까 너도 나름 네 정체를 숨기려고 애쓰며 살았던 것 같은데, 우리가 싸운다고 생각해봐.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쉽게 당하지는 않는다고. 그럼 어떻게 되겠어? 당연히 일이 커지겠지? 그 와중에 서로의 정체가 외부로 노출되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어. 그런 서로가 원하는 게 아니잖아? 정리하면, 너랑 나, 좋게좋게 가자는 거지. 필요할 때 서로에게 힘이 돼 주는 관계, 정도로 정리하자고.
“전혀 못 알아듣는 눈치니, 다시 말하지. 난 절대 너와 같은 하늘에 있을 수 없어.”
―야, 내가 네 부모를 죽인 철천지원수라도 되냐? 왜 그렇게 못 죽여서 안달이야?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그래. 내 주변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너를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나 원 참. 알았어, 알았어. 네 동생인가 뭔가한테 한 건 잘못했다. 사과할게. 됐지? 부족해? 거기 병원에 입원하고 있지? 내가 병원료 다 내줄게. 오케이?
“너한테 손 벌릴 생각 없다.”
단호하기만 한 대답에 기혁은 조금 전처럼 능청스럽게 대꾸하지 못했다.
―아 놔, 어쩌라고?
“넌 내 눈에 띄면 죽는다.”
―그래서 뭐?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살라고?
“아니.”
―그럼 뭔데?
“널 반드시 찾아서 죽일 거야.”
―이거 참, 말도 안 통하는 골통 새끼랑 엮인 거 같네. 야, 너 도대체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당히, 좋게좋게 사는 게 좋은 거야. 아직 어려서 그래? 그런 말 들은 적 있지?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다는 말. 우리가 그래. 우린 좋은 동지가 될 수 있어.
“미치광이의 동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네 말처럼 난 조금 미쳐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만 미친 거야? 어차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조금씩 미쳐 있어. 그들과 내가 다른 건 단지 가진 힘이 다르다는 것 뿐이지. 눈을 떠. 세상을 봐. 그럼 나보다 더 미친 놈들이 많은 세상이란 걸 알게 될 거야. 내가 미쳤냐고? 그럼! 당연하지. 미치지 않고서는 이 세상을 살 수 없단 말이야.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아이고, 미안해라. 그런데 어쩌나. 죽은 놈들은 죽어야 할 이유가 있어 죽은 놈들이야. 대부분 우리 조직에 적대하던 놈들이야. 다시 말해서 조폭들이라는 거지. 범죄를 저지르는 놈들 말이야. 선량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피해를 줄 수 있는 놈들. 그런 놈들이 죽은 거야.
“그게 너의 행동을 정당화시켜주진 않는다.”
―아니, 충분히 정당하지.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날 욕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떤 사람들, 그놈들한테 피해를 입은 적이 있던 사람들은 날 칭찬할걸? 잘했다고. 자신들이 못하던 일을 대신 해줘서 고맙다고 말이야.
“극장에서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들도 마냥 착한 사람들은 아니었을걸? 내가 일일이 죽어 마땅한 이들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잖아? 만약 그들이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면 난 그들을 죽이지 않았을 거야. 아, 그리고 정확히 설명이 안 된 거 같은데, 극장에서 내가 직접적으로 죽인 사람은 세 명 정도가 다야. 그 사람들은 분명히 죽어야 할 이유가 있었어.
“무슨 이유?”
―날 불쾌하게 만들었지. 다른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사고에 휘말린 것일 뿐이고. 그들에 대해서는, 그래, 원한다면 조의를 표하도록 하지.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해 주지. 하지만 그런 희생은 살면서 종종 겪는 일이잖아? 멀쩡한 건물이 무너지고, 배가 침몰하고,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 그런 사고 중 하나였지.
“···불쾌하다고 사람을 죽이는 게 정당화되지 않아.”
―그런가? 알았어. 앞으로는 안 그러지. 그럼 너도 날 죽이지 않아야겠네? 콜?
단유는 조롱하는 기혁의 말에 대답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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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대화가 서로의 갈등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합리적이며 유효한 수단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기혁이라는 사이코패스를 상대할 때는 더더욱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종종 단유에게 전화를 걸어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것은 ‘대화’라고 부를 수 없는, 그저 말장난에 불과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만담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단유는 그의 만담에 어울려주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와 상대하는 모든 시간이 모두 낭비처럼 여겨졌다. 발전적이며 창의적인 것들을 고려하기도 바쁜 시간에 소모적이며 비효율적인 만담으로 시간과 기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단유는 규칙적으로 집에 들러 상미와 하은이 무사한지, 집 주변은 안전한지 확인했다. 그리고 그 외 시간은 새벽의 병실에서 보냈는데, 새벽이 부담스러워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단유는 꿋꿋이 간호를 핑계로 새벽의 병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마냥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들고 온 노트북으로 몇 가지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심력을 쏟았다.
“뭘 만드시는 건데요?”
새벽이 호기심을 보였다.
“안전 장치.”
“안전 장치요?”
“응.”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 건데요?”
주변의 기기들을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고, 단유의 핸드폰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역추적해서 상대의 위치를 알아보는 프로그램. 요컨대 다기능 해킹 프로그램이었다.
“그런 게 왜 필요해요?”
“이상한 전화가 계속 걸려와서.”
“신고해요.”
“신고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이 문제는 누구의 손도 빌릴 수 없었다. 자칫하면 더 큰 희생자를 낳을 수 있는 존재를 대상으로 하니, 반드시 단유가 직접 해결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