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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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이라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병실이 있는 층을 관리하는 간호사들은 단유가 복도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저 다음 쉬프트가 오기만을 지루하게 기다리며 모니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마 현재 이 병원 내에서 가장 조급함을 느낄 이는 단유가 유일하리라. 그렇지만 단유는 그런 조급함을 꾹꾹 눌러내며 새벽이 누워있을 병실로 조용히 접근했다.
조심스럽게 미닫이문을 열었더니 다행히 레일 위를 구르는 바퀴 소리가 크지 않아 안심했다. 몸을 밀어 넣기 전에 이미 단유는 병실에 새벽이 혼자라는 걸 알았지만, 눈으로 확인하니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눈이 부시지 않는 취침등 아래 규칙적으로 숨을 내쉬는 새벽의 잠든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때, 호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벌써 온 거야? 많이 놀랬지?
단유는 통화를 위해 옥상으로 이동했다.
“어디야?”
―에이, 설마하니 내가 또 지난번처럼 그런 실수를 할까? 니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도 아는데 말이야.
“그래서 어디냐고?”
―서로 피곤하게 굴진 말자고. 내가 어딨는지, 니가 어딨는지 알아서 뭐해? 이렇게 잘만 이야기를 나누는데. 안 그래? 그런데 말이야, 참 부럽네. 니 능력. 난 고작해야 가마에 불 때울 때나 쓸 능력인데, 넌 어디든 그렇게 슉슉 갈 수 있는 거야? 이야, 부럽다.
단유는 옥상 가장자리로 가서 주변을 살폈다. 새벽이 입원한 병원이 어디인지 아는 데다가, 단유가 병실에 들어온 타이밍에 맞춰 전화를 할 정도니 분명 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다만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단유의 능력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리라. 말하자면 그에겐 자신과 같이 공간을 이동한다거나 하는 능력이 없다는 방증이고, 근거리에서의 방어에 취약하다는 설명이 될 것이다. 새롭게 알게 된 그 사실들을 토대로 상대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시켜 나가다 보면 그를 무사히 제압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리라.
다만 그 기회가 올 때까지 자신이 참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네가 원하는 게 정확히 뭐지?”
―내가 뭘 원할 거 같은데?
“···나를 죽이고 싶은 거겠지.”
―워워. 이봐,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난 너를 죽이고 싶어한 적이 없다고. 니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너를 죽이려고 든 적은 없었어.
“내 지인을 납치하고 고문까지 했던 이가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 것 같은데? 덕분에 이렇게 너랑 늦은 시간에도 오붓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처음부터 끝까지 능글맞게 대꾸할 뿐인 상대의 태도가 못마땅해도 딱히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게 화가 났다.
―이봐, 지난 일은 잊고 우리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만나서 이야기하지.”
―아니, 그건 좀 아닌 거 같네. 우리가 아직 그 정도로 신뢰를 쌓은 것 같진 않으니까.
“지난번엔 만나자고 하지 않았던가?”
―그건 자네의 능력을 모를 때 이야기고. 지금은 내가 좀 무섭네? 정말 사람 말이라는 게 무섭다는 걸 새삼 느껴. 정말로 매일 목을 씻고 기다려야 할 거 같으니까 말이야. 비밀인데, 난 엄청나게 게으른 사람이거든? 그래서 어떨 때는 씻는 게 귀찮아서 하루 종일 떡 진 머리로 돌아다닌 적도 있어. 물론 모자는 쓰고 있었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게으르고 귀찮은 게 많은 내가 매일 목을 씻고 기다려야 한다면, 그건 정말로 자네를 무서워한다는 뜻이야. 오케이?
“쓸데없는 소린 하지 말고 정말 원하는 것을 말해.”
―난 정말로 자네랑 잘 지내고 싶어. 이봐, 솔직히 말해봐. 혹시 나 말고 자네의 능력을 아는 이가 있나?
“······.”
―맞춰볼까? 아무도 없을 거야. 어떻게 아냐고? 널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그런 걸 떠벌리고 다닐 성격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거든.
단유는 고개를 들어 하얗고 시린 빛이 나는 달을 바라보았다. 지금 통화를 하고 있는 상대의 시커먼 속이 마치 저 달의 뒷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넌 떠벌리고 다녔고?”
―아니, 난 너랑 다르지. 네가 만났을, 아직 살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큰형님은 내가 어떤 힘을 쓸 수 있는지 알고 있지. 너에겐 놀라울 일이겠지만, 전혀. 네 능력을 주변 사람이 안다는 건 생각보다 큰 문제가 아니야. 알면 어때? 단지 그 사실을 주위에 퍼뜨리고 다니지만 않는다면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어. 그런데 큰형님은 아직 살아 있나?
말로는 ‘큰형님’이라고 하지만, 어떤 존경심도 보이지 않는 사내의 말에서 단유는 그가 언급한 ‘큰형님’이란 이를 어떻게 대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힘으로 겁박했거나, 혹은 새벽이에게 했던 것처럼 누군가를 인질 삼았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살아 있다.”
―뭐, 딱히 고마워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행이네. 사실 큰형님이 능력이 좋아. 아, 내가 말하는 능력이 우리가 가진 능력을 말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 꽤 수완이 좋아서 덕분에 편히 지낼 수 있었거든. 잘 달래서 계속 써먹어야 하는데, 죽지 않았다니 다행이야.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다. 생경하게 느낄 문제는 아니었다. 그가 아니더라도, 이 사회에는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전혀 가지지 못한 이들이 많으니까. 예를 들어 초인적인 능력 대신 초월적인 재력을 가진 이들이 뉴스에 등장하는 모습들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이거 참 어색하군. 애써 어색한 티를 내려고 하지 않는데 많이 어색해. 마치 햇병아리 같던 시절 몰래 사귀던 여자친구랑 밤늦게 통화하는 것처럼 말이야. 사실 그런 연애를 해 본 적은 없는데, 만약 그런 연애를 한다면 이렇지 않았을까 싶어. 마음에 두지 마. 그냥 해 본 소리야. 그래도 나중에 생각나면 괜찮은 여자친구 소개 시켜 줬으면 해. 보니까 아는 여자도 많은 것 같던데.
하마터면 고함을 질러 잠든 환자들을 모두 깨울 뻔했다. 미간을 잔뜩 좁힌 채로, 단유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다시 한번 내 주변 사람들을 건든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말했지?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다고. 이렇게 통화할 수 있는 사인데 뭐하러 그런 짓을 해? 그러니까 함부로 전화번호를 바꾼다거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랬다간 질투심이 폭발해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알지?
“헛소리 작작해. 애써 참는 중이야.”
―좋아, 좋아. 그럼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고. 우리 시간 많잖아?
“미쳤군. 난 너와 이렇게 통화할 마음 없어.”
―난 있어. 그게 내가 정말 원하는 바고.
“···나랑 연락하는 걸 말하는 건가?”
―좋은 관계로 지내는 거. 말했잖아? 진심이라고. 너랑 나, 우리 둘의 능력이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고. 오, 마이, 갓. 세상에. 믿을 수 없게도 이 세상에서 우릴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우리 둘 뿐이야. 서로가 서로를 위험하게 만들지만 않는다면, 우린 이 세상의 신이 될 수도 있다고!
“신?”
―그래, 신! 아, 물론 나야 성냥이 없을 때나 쓸모있는 정도지만, 그것도 활용하기 나름이라서 꽤 쓸만할 거야. 하지만 너, 아무 곳이나, 아무 곳 맞지? 아무튼 어디든 순간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감히 미국의 군대라도 우릴 상대할 수 있을까? 핵무기도 두렵지 않을걸? 안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너와 힘을 합치는 것 따위는 결코 고려할 문제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설령 한다 해도 그것이 신의 버금간다거나 군대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왜? 왜 그렇게 자신이 없는 거야? 군대? 백만 군대가 쳐들어와도 손가락 한 번 튕기면 걔네들은 다 죽은 목숨이라고. 난 그 정도는 돼.
“이제 알겠어. 니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데?
“넌 그냥 힘에 취한 미치광이야. 다른 이들의 희생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불이나 지르고 다니는 냉혈의 미치광이.”
―칭찬이지?
어쩐지 그가 지속적으로 능글맞게 구는 이유가 단지 화를 돋우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정함을 유지하기 어려워, 상대가 진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듣지 못했지만, 단유는 통화를 계속 이어나갈 수 없었다.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한 후, 단유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서울 도시의 밤공기는 진득했고, 덥혀진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울 때 불쾌감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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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바닥에 넘어지며 정신을 잃었던 큰형님이 정신을 차렸을 때도 여전히 주변은 어두웠고 조용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신음을 흘리며 깨어난 뒤 곧바로 어깨에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손을 더듬어 어깨 부위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비명을 내지르고 싶어지는 고통이었다. 젊은 시절 이 바닥에 뛰어들면서 숱하게 맞아보고 때로는 칼에 깊이 베여 보기도 했지만, 이런 상처를 입은 적은 없었다.
마치 총 맞은 것처럼 구멍 난 어깨의 상처를 확인한 큰형님은 기억을 떠올렸다.
‘기혁이 말고도 또 다른 녀석이 있었다니.’
도대체 이 세상에 왜 그런 괴물같은 놈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자신은 왜 그런 괴물 같은 놈들을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 만나서 이 고생을 하는 것일까? 존재의 의의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찰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시궁창 바닥까지 내동댕이친 것 같은 자신의 운명을 탓할 수밖에.
저벅저벅 걸음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누, 누구냐?”
“나요.”
“기혁이?”
그러고보니 새로 등장한 괴물은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이놈들이 번갈아가면서 괴롭힐 생각으로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장은 기혁이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녀석은?”
“여긴 없소.”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제 이 생활을 접어야 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조금만 더 욕심을 내면 서울을 완전히 접수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기혁이 놈의 뒤를 봐주는 것도 질렸고 기혁이만큼 무서운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았으니, 이제껏 모은 돈을 들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모은 돈도 적지 않으니까, 딱히 고된 일을 하지 않고도 평생 적당히 유유자적하게 누리며 살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많이 다쳤수?”
“보면 모르겠냐? 당장 병원에 가서 무슨 말로 둘러대야 할지 고민이다. 아마 사실대로 말해도 믿지 않겠지.”
“얼굴은 보았소?”
“그놈 얼굴?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대충은 안다. 그런데 그 녀석도 너랑 비슷한 힘을 가진 거지?”
“뭐 비슷할 거요. 근데 정확히 어떻게 당한 거요?”
큰형님은 생각나는 대로 상황을 설명했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기혁이 고개를 휙휙 돌려 주변을 살폈다.
“다른 애들은요?”
“위에, 사무실에 있을 거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도 못 했다. 그제야 그들의 생사가 걱정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의 생사가 아니라 그들이 올라간 사무실이 온전한지가 걱정되었다. 더 정확하게는 사무실에 비치된 금고가 무사한지 궁금했다. 금고가 무사해야 자신의 미래도 무사하리라.
굳이 기혁 앞에서는 강한 척을 할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있어서 큰형님은 입술을 깨물어 신음을 삼킨 뒤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시오?”
“위에 놈들이 무사한지 확인해야 할 거 아니냐?”
“아아.”
알았들었다는 듯 시늉만 하는 기혁의 반응이 형식적으로 느껴졌다. 원래 알고 있었지만, 기혁은 ‘동생들’이라고 부르는 조직원들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기혁에게 ‘신의’나 ‘의리’와 같은 감성적인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조직 내에서는 나름 오래되고 충성심이 강한 조직원 정도로 포장되었지만, 철저히 계산에 따라 움직이는 청부업자 정도의 포지션이 기혁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청부를 맡기고 계산을 해주는 자신은 뒷골목 포주와 다름없었다.
사무실로 올라가니 과연 엉망이 된 사무실과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동생들’이 보였다.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리려는 이도 있었고, 숨소리도 내지 않고 마치 죽은 것처럼 누워 있는 이도 있었다.
기혁이 무릎을 굽히고 조직원들을 살피니, 큰형님이 물었다.
“죽었냐?”
“아뇨, 살았네요. 팔 한쪽이 부러진 것 같지만 죽진 않았네요.”
“다행이군.”
큰형님은 널브러진 동생들을 지나 사무실 끝, 자신의 책상 뒤편으로 이동했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금고를 보니 안심이 되었다. 그의 목적이 돈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설마 녀석도 다른 조직에 속한 걸까?”
“아닐거요.”
“어떻게 알아?”
“걔 서울대 졸업생이요.”
“서울대? 잘 아는 사이였단 말이야?”
“아니요. 그놈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소.”
“근데 어떻게 알아? 유명한 놈인가? 아니면,···너희들끼리 아는 뭔가가 있는 거야?”
“너희들끼리라뇨?”
“그러니까, 너희들, 그···능력을 가진 놈들 말이야.”
“능력을 가진 놈들이 많을 것 같소?”
“처음 널 봤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왠지 더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럴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그녀석이 전부요.”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런 놈들이 더 많았다면, 자신 같은 평범한 이들은 살기 힘들었을 테다. 큰형님은 금고를 열어 얼마 정도는 동생들의 치료비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비 조로 얼마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자신의 새 인생을 위해 투자해야 할 것이다.
그때 등 뒤에서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슬며시 고개를 돌리니 기혁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아니요, 하던 일 마저 하쇼.”
큰형님은 금고 안에 담긴 돈을 빼내며 말했다.
“애들 치료비로 거덜나게 생겼네.”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하면서 동시에 손은 금고 안쪽에 몰래 보관해뒀던 총을 더듬었다. 만일에 대비해 준비해 놨던 것을 오늘에야 꺼내게 되었다. 그래도 부디 이 총을 직접 쓸 일은 없길 바라지만, 조금 전 마주쳤던 기혁의 시선은 큰형님을 불안하게 만들었다.